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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rewriter Dec 25. 2020

2019년 1월 18일

아빠와의 싸움


 아빠와 크게 다퉜다. 평소라면 1~2분 내로 끝낼 무미건조한 통화를 30분 넘게 끌었다. 역시 돈 문제였다. 돈은 인화성 물질과도 같은 것이어서 한 번 불똥이 튀면 삽시간에 애먼 곳으로 번졌다. 논쟁은 서로의 책임론으로 불거졌고 그러다 같은 곳을 맴돌았다. 소리 높여 성을 냈지만 득 되는 건 없었다. 이런 지겨운 싸움, 그만하고 싶다. 싸움의 원인이 꼭 돈 때문만은 아니다. 소통의 불능(소통의 부재라도 해도 무방하다)은 우리 가정의 불행을 초래하는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다. 그건 가난보다 더 지긋지긋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둘 사이에 필요한 건 ‘돈’보다는 ‘소통’이었다. 


 가난은 그 끝과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가난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처럼 누구를 나무랄 수도 없었고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 2015, 39면.


 가난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김훈의 말대로 바닥과 끝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소통의 문제는 다르다. 소통의 불능은 나를 지치게 했다. 그것은 가난과는 달리 뚜렷한 장애물로 코앞에 다가왔다. 어떤 얘기를 하든지 간에 아빠와는 벽에 대고 얘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벽은 내 말을 튕겨낼 뿐이었다. 그렇게 견고한 벽은 아무리 큰 소리로 얘기해도 실금 하나 가지 않았다. 아빠는 자기 세계에 갇힌 나머지 눈과 귀를 닫고 말하는 입만을 열어두었다. 그런 아빠를 원망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힘없는 가장의 모습과 우리 아빠의 모습은 많이 달랐다. 확고한 자신만의 세계를 고집했다. 그는 평생 막노동 현장에서 몸을 갈면서 일했다. 자신의 경험을 곧 세상만사의 ‘진리’라고 스스로 여겨 왔다. 분명 값진 경험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경험’을 토대로 한 아빠가 고집은 어떤 견고한 논리와 합리적 이성으로 짜여진 생각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진리’여야 하는 그릇된 신념에 가까웠다. 물론 사람들과의 의견이 다르건 말건 그건 아빠의 신경 바깥의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떠한 합리적인 말로도 아빠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런 고집이 지금의 당당한 아빠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고집을 저주했다. 공공장소에서 소리를 지르며 침이 튀도록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 함께 있는 것만으로 진이 빠졌다. 그런 아빠와 말을 하면 쉽게 지쳤다. 자리를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빠의 그런 성격과 기질을 견딜 수 없었다. 


 특히 아빠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천진하게 웃으며 내 자랑을 늘어놓을 때 어쩔 줄 몰랐다. 그것은 나의 죄책감을 자극하기 위해, 그리고 본인이 가장으로서 아들을 잘 키웠다는 사실을 피력하기 위해 펼치는 일종의 영악한 ‘립 서비스’ 같은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아빠의 말이 틀렸다고 할 수 없었다. 어떤 반박도 늘어놓을 수 없었다. 좋은 분위기를 초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따위 가식을 강요받는 건 실로 역겨운 일이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는 게 아니다. 정말이지 아빠와의 원활한 소통을 하는 거다. 아빠는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법이 없었다. 결국 아빠와 소통은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렇게 소통의 부재 속에서 성장했다. 사춘기 때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아빠와 사이좋게 웃는 자식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 환멸을 느끼기까지 했다. 서른이 된 이 시점에서도 가끔 유치하게 남의 행복을 질투하는 철부지 같은 마음을 먹는다.


 언젠가부터 나는 아빠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아빠라는 존재를 배제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말처럼 되는 줄 알았다. 물리적으로는 그랬으니까. 5년의 자취, 6년의 군 복무를 합치면 집을 나와 산지도 벌써 11년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정립해갔다. 그러다 가끔 집에 가면 아빠가 낯설어 보일 때가 있었다. 조금 더 주름이 짙어졌거나 머리가 희끗해진 것 말고 크게 달라진 건 없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위선적인 연민으로 불편했다. 마음의 불편함은 아빠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는 방증이었다. 억척스럽고 고집 센 아빠의 성격을 나는 꼭 빼쏘았다. 쓸데없는 것에 목숨을 걸고 나의 주장을 관철했고 많은 사람을 잃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 일을 그르친 적도 있다. 말싸움을 하다 지친 친구들이 날더러 ‘똥고집’이라고 할 때마다 나는 몇 번씩 심장이 내려앉았다. ‘똥고집’이라는 말 자체가 가져오는 모욕감보다 내가 아빠를 닮았다는 데서 오는 충격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렇게 긴 시간 떨어져 있었지만 몸 안에는 아빠의 고집스런 성격이 인박여 있었다. 그렇다. 조금의 비약을 섞어 말하면, 그를 피하는 길을 선택했지만 나는 종국에는 ‘그’가 된 셈이다. 그건 쉬이 떨쳐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죽을 때까지 내가 감당해야 하는 고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그 부분을 극복하는 것―혹은 헤어나오는 것―이, 그것을 고집하는 것이 아이러니 하게도 인생의 중대한 과업이라고 나는 여기게 됐다.


 그가 되지 않으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빠는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한 나머지 가족 일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고립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가장이었는지 모르지만 고립된 ‘섬’의 도지사였다. 자기 자신에게 확고한 신념이 있으면서도 그 자체로 완벽한 ‘섬’에 살았다. 타인과 굉장히 이질적인 노선을 선택했지만 그는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평생 누군가에게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관점에서는 자신의 말이 그 자체로 논리정연하면서 전적으로 옳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상대에게 덧붙일 배려의 말 혹은 그런 종류의 친절은 아빠에게 불필요한 것이 됐다. 자신만의 세계에선 그것이 통할 수 있어도, 그의 ‘진리’라는 건 우리가 말하는 ‘무책임’의 다른 말에 불과했다. 그건 아빠와 살면서 반면교사 삼아야 할 부분인 것이다.


 몇 년 전, 아빠는 나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이 약속을 통해 나는 남아있던 아빠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을 했었다. 그것은 바로 돈을 모아 집을 짓고 함께 살자는 것이었다. 나는 열심히 돈을 모았다. 군을 전역하고 소박한 인생 2막에 대한 기대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버는 대로 족족 썼다. 충분한 수입이 있었는데도 아무런 노후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모은 돈이 단 한 푼도 없었다. 빠져나간 돈의 출처를 따져 물었다. 황당하게도 아빠는 그때만큼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는 ‘섬’으로 숨어버렸다. 나는 화를 삭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약속을 이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빚을 내서라도 집을 짓는 게 나의 최선이었다.


 ‘집이야 남들처럼 빚내서 짓는데…….’ 하고 몇 번을 삼켰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미련하게 “집을 짓는 것만큼은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는 아빠의 말도 믿었다. 그때 순간 아빠에게 심적으로 기댔던 거 같다(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모한 생각이었다). 아빠는 오랜 시간 동안 집 짓는 일을 했고, 적어도 그가 주장하는 ‘경험’이 자신이 평생 살 집을 짓는 일에서 만큼은 십분 발휘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도 잠시, 집이 윤곽을 갖춰나갈수록 문제―다행히 부실시공이나 민사상의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니다―역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부족한 돈을 들여 시작한 집이라 건설 과정에서 갈등이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도 아빠는 집의 세밀한 부분을 신경 쓰지 않았다. 집을 짓는 데에 대한 전권을 위임했음에도 그는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싸움은 불 보듯 뻔 했다. 힘들게 모은 돈을 들인 일이어서 그런지 나는 신경이 매우 예민한 상태였다. 한적한 카페에서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아빠와 통화했다. 나 역시 아빠와 다르지 않게 사람들에게 못 볼 꼴을 보여준 것이다.


 이 같은 일은 며칠 전에도 있었다. 나와 아빠가 다투는 것을 지인도 들었다. 나는 그가 애써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고 찰나에 지었던 미소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복잡한 심경은 나의 말주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오로지 그의 표정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전화를 끊지 않은 것을 무척이나 후회한다. 게다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그에게 가족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으며 두서없이 말을 더듬었다. 따귀가 빨개지는 일이었다. 그날 잠들기 전에 생각했다. 따귀가 빨개진 것은 비단 내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아빠가 무자비하게 엄마에게 꽂았던 비수 같은 말을 나도 모르게 지인들에게 할 것 같은 걱정이 들었다. 괜한 걱정이 아니다. 나는 아빠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그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책했다.

 앞서 언급했듯 소통의 불능(소통의 부재)은 가난의 문제 이상으로 지긋지긋하다. 철이 들면서 아빠의 고집은 나와 아빠와의 관계를 넘어선 문제로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운 지인들이 나와의 소통을 애써 피하려 할 때 짓는 표정을 마주할 때마다 물려받은 아빠의 ‘기질’이 명료하게 뇌리를 스쳤다. 그것은 가족 내부의 문제이기도 하고 나만의 개인적 문제이기도 하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가난보다 내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섬이 더 싫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문제다. 혼자 감당해야 할 지난하고 버거운. 그렇기 때문에 같은 곳을 맴도는 이 지난한 대화는 불가피하다. 거창하게 ‘운명’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하는 걸까. 


해선 안 될 말들을 삼키느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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