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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호랑이 Mar 22. 2021

그 음식의 시작

1. 카레

그 음식의 시작     


1. 카레

  초등학교 저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큰 언니가 나보다 10살이 많았으니, 아마 가정 시간에 뭔가를 배워 온 듯하다. 큰언니는 우리를 큰 방에 모이게 했다. 1남 4녀, 부엌에서 동분서주하고 있는 큰언니를 빼고 넷이 모였다.

  큰언니의 주도하에 둘째 언니는 상을 폈고, 셋째 언니는 젓가락과 수저를 놓았다. 오빠는 행주로 상을 닦았고, 나는 멀뚱멀뚱 서 있다가 등짝을 맞았다. 딱히 할 일도 없는데 그럼 어쩌란 말인가.

  곧 작은 문이 열렸다. 우리 집 부엌은 큰방과 연결되어 있었다. 큰방 문을 열고 들어오면 오른쪽으로 작은 쪽문이 나 있는데, 그 쪽문을 열면 바로 부뚜막이 보인다. 그 부뚜막에서 물을 끓이고 국을 끓이고, 방을 데운다. 그 옆엔 작은 풍로도 있었다. 큰언니는 부뚜막 위에서 다 된 밥을 푸고 있었다. 풍로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색깔의 무언가가 뽀글뽀글 끓으며 생전 처음 맡아보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큰언니는 배급을 하듯 한 그릇씩 우리에게 안겼다.

덩 그란 밥상 위엔 밥그릇 네 개, 그리고 김치 하나.

국도 반찬도 없었다. 뭐지?

  그러다 내 밥 위에 올려준 누르스름한 고약하고 묘한 냄새의 액체를 발견했다. 짜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추장도 아니고.

  “아. 이게 카레야?”

  셋째 언니의 한 마디에 큰 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뭔가 긴장한 듯 그러나 조금은 설레는 듯 밥을 섞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나도 흉내를 냈다. 그리고 한 입. 이건 분명히 감자다 그리고 이건 당근, 그리고 물컹한 돼지고기. 식재료들로 보면 훌륭하고 맛있는 애들인데. 이 누르스름한 물과 만나 알 수 없는 정체가 되어 버렸다. 외계인들이 먹는 건가, 우주인들의 비상식량인가.

결국 나는 반도 먹지 못했고, 누런 카레가 묻은 부분은 걷어내고 물에 말아 김치랑 나머지를 해치웠다. 나포함 언니들과 오빠도 그다지 맛있어 보이진 않았나 보다. 부모님이 어딘가 외출하고 난 뒤의 한 낮, 큰언니가 큰 맘먹고 만들어준 그 카레는 충격이었다. 그렇지만 사람이란 게 참 간사하지, 그 후 몇 번의 실패 끝에 카레는 맛있는 음식 중 하나가 되었다. 추운 겨울, 보온밥통 뚜껑을 열면, 하얀 김과 함께 카페로 뒤덮인 밥을 만나면 기쁘기까지 했다. 김장김치를 얹어 먹는 카레의 맛, 이젠 설렘 대신 익숙함과 아는 맛이 되었다.     

카레는 인도가 원산지인 향신료다. 비타민 등이 많이 들어 있고 건강에도 좋다는데. 우리가 먹는 카레는 일본식 카레라고 한다. 일본이 군인을 모집할  선전문구가 하얀 쌀밥을  없이 먹게  준다는 거였다고 한다. 실제로 하얀 쌀밥을  없이 먹게  줬는데( 하얀 쌀밥은 어디서 나온 걸까 심한  심한 ) 반찬은 따로 돈을 주고 사게 했다  그러자 가난한 농민의 자식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이들은 돈을 아끼려 정말, 흰쌀밥만 잔뜩 먹었다고 한다. 결국 비타민 등의 결핍으로 병이 생겼고, 고민 끝에  위에 카레 가루를 뿌려주거나, 카레를 물에 개어서 같이 줬다고 한다. 고향에서 채소 등을 보내오면 카레에 넣어 같이 끓여  위에 뿌려 먹으니 바로 지금의 카레 조상쯤 된다.     




  가난은 걸음걸이에 묻어있다고 생각했다. 발레를 배운다던 친구의 곧은 허리선과 목을 보며 나랑은 종이 다른  아닐까 생각했다. 꾸부정한 포즈, 그리고 이제  가슴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관심 없는 통에 몸에 맞는 속옷조차 없어,  어깨를 옹송그려 공벌레처럼 걸었던 기억도 난다. 부끄러웠다. 용기를 내서 가슴이 나오는  같다니,  귀찮아하던 엄마의 모습. 너도 시작이니?  , 이제 막내까지 가슴이 나오고 생리를 시작한다니 귀찮을 만도 하지만, 그래서일까  가슴도 생리도 부끄럽고 숨겨야   무엇인가가 되어 버렸다.

옹그리고 가슴을 감추려 노력했던  시절, 그 시절은 결국 굽은 어깨로 내게 남았다.


  그런데 가난한  걸음걸이만이 아니다. 음식에도 나타난다. 그렇지만  늦게 그런 음식을 먹었다고 해서  어떤가 싶다. 젊은 시절엔 부끄러웠다. 파스타를 숟가락에 돌돌 말아먹는  몰라서, 스테이크를 어떻게 익혀 달라고 할지 몰라서, 돈가스가 내겐 최고의 사치인  들킬까 .


지금은?  어때, 굶은 것도 아니고, 단지 시작이 늦었을 뿐인걸.

그래서 내 음식의 처음을 시작하려 한다.

그 음식의 기원은 오래됐겠지만, 내겐 좀 늦은 음식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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