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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산책… 소수서원 가을 여행

by 트립젠드

고요히 흐르는 선비의 숨결
시간을 거슬러 배우는 품격의 공간
소백산 품 안의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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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경북 영주 소수서원)


물결처럼 이어진 산등성이 너머로 고요한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월의 손길이 스며든 기와지붕 아래, 나지막한 대청에는 붓 향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한때 조선의 젊은 선비들이 학문을 논하고 마음을 닦던 그 자리, 오늘은 여행자가 천천히 걸으며 사색을 배우는 길이 되었다.


바쁜 세상에 잠시 등을 돌리고, 고요한 품격을 다시 배우는 시간. 그곳이 바로 영주 소수서원이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한국의 첫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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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경북 영주 소수서원)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에 자리한 소수서원은 조선의 학문과 정신이 처음으로 깃든 서원이다.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운 것이 그 시작이며, 1550년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아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소수’라는 이름에는 배우고 닦음으로 세상을 밝히자는 뜻이 담겨 있다. 서원의 배치는 당시 서원 건축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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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경북 영주 소수서원)


정문을 지나면 강학당인 명륜당이 있고, 그 뒤로 유생들이 머물던 일신재와 직방재가 나란히 이어진다. 사당은 별도의 담장 안에 자리해 신성한 공간으로 구분되었다.


본래 이곳은 통일신라 시대 절인 숙수사가 있던 자리로, 당간지주와 초석이 남아 과거의 흔적을 전한다.

조선 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속에서도 소수서원은 학문의 근본을 지키며 살아남았다. 지금도 매년 봄과 가을이면 제향이 열려, 조선의 예와 의식이 현재까지 이어진다.


201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서원’으로 등재되며, 그 역사적 가치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학문과 예를 품은 공간, 소수박물관과 선비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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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경북 영주 소수서원)


서원 맞은편에는 소수박물관이 있다. 2004년 개관한 이곳은 3만 5천 점이 넘는 유물을 소장한 전문 박물관으로, 조선 선비문화의 정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국보 ‘안향 초상’을 비롯해 보물로 지정된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주세붕 초상’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고문서와 판목, 성학십도 등의 자료를 통해 조선 유학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2024년 재개관 이후에는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인증을 받아 학술적, 교육적 위상을 더욱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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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경북 영주 소수서원)


박물관을 나서면 걸음은 자연스레 선비촌으로 이어진다. 57,000여㎡의 부지에 자리한 이곳은 실제 전통가옥을 보존·복원해 조선 선비들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와가와 초가가 어우러진 골목길을 걷다 보면, 선비의 검소함과 품격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일부 가옥은 숙박체험이 가능하며, 저잣거리에는 한지공방과 찻집, 떡집이 자리해 여행의 여유를 더한다. 광장에서는 민속공연이 열려 지역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예절과 품격을 배우는 여행, 한국선비문화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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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경북 영주 소수서원)


선비촌 끝자락에는 한국선비문화수련원이 자리한다. 이곳은 단순한 교육장이 아닌, 전통 예절과 인성의 가치를 몸소 체험하는 공간이다.


예절교육관과 도예공방, 세미나실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숙박동에서는 선비문화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어른들에게는 잊힌 품격을, 아이들에게는 예의의 뿌리를 가르치는 의미 깊은 체험이 된다.


단체 연수, 가족 여행, 수학여행 등 다양한 형태로 이용할 수 있어 사계절 언제나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의 매력은 조용함이다. 화려한 볼거리가 아닌, 머무는 시간 자체가 여행의 의미가 된다.


소백산 자락의 맑은 바람과 기와지붕의 그림자 속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학문이 아닌 삶의 예를 배우는 여행지, 그것이 바로 소수서원이 주는 진정한 가치다.


한적함 속에서 만나는 조선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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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경북 영주 소수서원)


소수서원 일대는 도심의 소음과 거리가 멀다. 넓은 주차장과 무장애 접근로가 마련되어 있어 어르신이나 장애인도 불편 없이 둘러볼 수 있다.


서원 관람 후에는 박물관과 선비촌, 수련원까지 이어지는 코스로 하루를 천천히 보내기에 충분하다.


봄의 매화, 여름의 짙은 녹음, 가을의 단풍, 겨울의 고요함까지 사계절의 풍경이 각각의 색으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조용히 걸으며 조선의 선비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에도 작은 평온이 스민다.


세속을 벗어나 배움과 품격을 되새기고 싶은 이들에게, 영주 소수서원은 지금도 변함없이 문을 열어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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