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서울 종로 창덕궁과 후원 겨울 눈 내린 풍경)
차가운 공기가 도시를 감싸는 계절이면, 바쁜 일상도 잠시 걸음을 늦춘다. 느리게 떨어진 눈발은 밤새 고즈넉한 흰빛을 남기고, 그 흔적은 아침 햇살 아래 더 은은하게 번진다.
오래된 담장과 굽이진 길 사이로 겨울이 스며드는 순간, 한 시대를 품은 공간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서둘러 밝히지 않는 아름다움이기에 더욱 궁금해지는 곳, 바로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정취가 머무는 자리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서울 종로 창덕궁과 후원 겨울 눈 내린 풍경)
창덕궁은 조선 왕조가 가장 오래 머문 궁궐로, 자연 지형을 따라 지어진 우리 고유의 건축 미가 살아 있는 장소다.
자연과 건축이 억지로 다투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 인정받아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궁 뒤편에 자리한 후원은 이러한 가치를 가장 온전히 보여주는 공간으로, 왕들이 사색과 휴식을 즐기던 비밀스러운 정원이다.
눈이 쌓인 후원의 길은 평소보다 한결 차분한 기운을 띠고 있다. 완만한 오르막을 지나면 부용정과 부용지가 가장 먼저 나타난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서울 종로 창덕궁과 후원 겨울 눈 내린 풍경)
사각 연못 한가운데 올려진 둥근 섬, 그리고 잔설이 내려앉은 팔작지붕은 겨울 정원의 장식처럼 고요히 서 있다.
과거 정조가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당시의 풍경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부용지를 지나면 효명세자가 공부하던 북향의 건물, 의두합이 이어진다. 화려한 단청 대신 소박한 기와를 올려 학문 공간의 성격을 담아냈다.
이어서 숙종이 장희빈을 위해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애련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연꽃을 사랑한다는 뜻을 지닌 이름처럼, 고요한 연못가에는 겨울의 흔적만이 얇게 남아 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서울 종로 창덕궁과 후원 겨울 눈 내린 풍경)
애련지를 지나면 연경당으로 이어지는 길이 펼쳐진다. 효명세자가 부모를 위해 잔치를 열었다는 곳으로, 넓은 마당과 단정한 행각이 특징이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겨울빛이 소박한 마루 위에 고요히 드리워지며, 왕실 일상의 단면을 상상하게 한다.
후원의 마지막 동선에는 승재정, 존덕정, 그리고 관람지가 자리한다. 언덕 위 승재정에 오르면 아래로 펼쳐지는 관람지를 조망할 수 있으며, 부채꼴 지붕을 얹은 관람정이 그 풍경의 중심이 된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서울 종로 창덕궁과 후원 겨울 눈 내린 풍경)
주변의 정자들이 서로를 향해 시선을 주고받는 듯한 배치가 인상적이다. 존덕정 내부 벽면에는 정조가 말년에 남긴 글귀가 전해진다.
‘하늘 아래의 수많은 빛이 결국 하나의 달에 머문다’는 뜻을 담은 내용으로, 한 나라의 군주가 지녔던 의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뒤편의 거대한 은행나무는 가을이면 노란빛으로 물들지만,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가 후원의 정적을 더욱 깊게 한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서울 종로 창덕궁과 후원 겨울 눈 내린 풍경)
눈이 내려앉은 후원은 다른 계절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선사한다. 많은 식생이 휴면에 들어가는 시기이지만, 그 빈자리가 오히려 건물의 선과 조경의 형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조경과 건축이 한 화면에 놓인 듯 보이는 겨울 후원은,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은 가치를 감각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시기다.
관람 시에는 정문인 돈화문 대신 임시 입구를 이용하며, 정시 입장 방식이므로 여유 있게 도착해야 한다.
궁궐 내 경사로와 무장애 동선, 휠체어·유모차 대여 서비스, 수유 공간 등 편의시설이 잘 마련되어 있어 시니어와 동행객도 안정적으로 관람할 수 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서울 종로 창덕궁과 후원 겨울 눈 내린 풍경)
후원 관람권은 별도 구매가 필요하며, 겨울철에는 현장 발권도 가능해 접근성도 높은 편이다. 한겨울 고궁 산책을 계획한다면, 눈 예보가 있는 날을 선택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왕이 사랑한 산책길이 흰빛으로 덮인 순간, 후원은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겨울의 얼굴을 드러낸다.
조용한 발걸음만이 길 위에 남고, 흩날린 눈이 오래된 기와 위에 내려앉아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느낌을 준다.
서울에서 경험하는 가장 한국적인 겨울 풍경을 찾는다면, 후원은 그 답에 가장 가까운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