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에서 아이들은 그저 논다
몇 시간을 함께 놀고 헤어지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습관처럼 물었다.
“아까 같이 놀던 아이 이름이 뭐야?”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몰라.”
이런 장면이 몇 번 반복되고 나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왜 나는 이름을 물었을까.
아이들은 이미 충분히 잘 놀았는데.
아이의 세계에서는
이름보다 먼저 웃음이 오고,
소개보다 앞서 달리기가 시작된다.
그저 함께 놀았다는 사실이면 충분한데,
나는 자꾸 무언가를 확인하려 했다.
이것도 내가 몸에 밴 문화의 습관일까.
아이들이 어릴 때 한국에 간 적이 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지방으로 향하던 길,
옆자리에 앉은 또래 아이가 우리 아이에게 물었다.
“너희 집은 어디야?”
“몇 평에 살아?”
아이는 질문의 뜻을 몰라
그저 가만히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이 아이가 이 질문을 떠올린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배워온 말이겠구나 하고.
문화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다만 자라온 환경에 따라
자연스럽게 익혀진 방식이 있을 뿐이다.
그날 이후 나는
아이에게서 무언가를 더 묻기보다
아이의 시간을 조금 더 믿어 보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미적분이 어려워 힘들어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한 선생님이
주말마다 자발적으로 시간을 내
아이들을 가르쳐 주었다.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그래도 아이는 여전히 도움이 더 필요해 보였다.
한 학년 어린 학생이
수학 실력이 뛰어나 월반해 상급반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아이는 그 친구를 존중하며
“정말 잘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 친구에게서 배우는 걸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경쟁보다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모습이
그때는 낯설고도 새로웠다.
그 친구는 이과로,
우리 아이는 언어와 사람 사이로
각자의 길을 선택해 대학에 갔다.
지금도 두 아이는
서로를 존중하는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비교와 경쟁이
때로는 동기가 되기도 하지만,
조금만 물러서면
전혀 다른 관계의 문이 열리기도 한다는 걸
나는 아이를 통해 배웠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그저 놀뿐이다.
어쩌면 어른인 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