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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세훈 Nov 23. 2024

동구릉(東九陵)

동쪽에 있는 9기의 능

동구릉은 약 450여 년에 걸쳐 조성된 9기의 능이 모여 있는 조선 최대의 왕릉군으로,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이곳에 잠들어 있다.      


1408년(태종 8)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이 처음으로 조성되고 이후 문종의 현릉(顯陵), 선조의 목릉(穆陵), 현종의 숭릉(崇陵), 장렬왕후의 휘릉(徽陵), 단의왕후의 혜릉(惠陵), 영조의 원릉(元陵), 헌종의 경릉(景陵)이 차례로 조성되었다.


능이 조성될 때마다 동오릉(東五陵), 동칠릉(東七陵) 등으로 불리다가 문조의 수릉(綏陵)의 옮겨지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동구릉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의 왕릉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으로, 왕이나 왕후의 능을 단독으로 조성한 단릉, 나란히 조성한 쌍릉,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 한 능에 왕과 왕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 왕과 두 왕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 등 다양한 형태로 조성된 능이 모여있다(자료: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건원릉(健元陵, 조선1대 태조의 능)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건원릉은 1408년(태종 8)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 검암산에 왕릉 자리를 정하였다.


왕릉공사를 위하여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여명의 군정(軍丁)이 참여하였다.


원래 태조는 생전에 두 번째 왕비 신덕황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하여 신덕황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본인의 능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었으나, 태종은 태조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현릉(顯陵, 조선5대 문종과 현덕왕후)


현릉은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현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문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문종이 1452년(문종 2)에 세상을 떠나자 수양대군(세조), 황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의 대신들이 여러 왕릉 자리를 답사하여 지금의 자리에 현릉을 조성하였다.


앞서 1441년(세종 23) 현덕왕후가 왕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경기 안산에 묘(소릉昭陵)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세조 즉위 후 단종 복위 사건에 친정어머니와 남동생이 연루되는 바람에 폐위되었다.


그러다가 1512년(중종 7) 다시 왕비로 복위되어 다음 해에 문종의 현릉 동쪽 언덕으로 사후 72년만에 왕의 곁으로 능을 옮기게 되었다.


이때 두 능 사이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유 없이 저절로 말라 죽어 죽은 나무를 베어보니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가 『중종실록』에 전해진다.


현릉은 조선시대 기본 예전인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랐다.


 문종의 능침 봉분 병풍석의 문양은 이전(태조 건원릉, 태종 헌릉)의 영저(금강저)와 영탁(금강령) 대신 구름무늬로 바뀌었고, 석상(혼유석) 받침대인 고석의 수도 4개로 줄었다.


현덕왕후의 능침은 문종의 능침과 같은 모습이나 봉분의 병풍석을 생략하였다.


목릉(穆陵, 조선14대 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     


목릉은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목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선조, 가운데 언덕이 의인왕후, 오른쪽 언덕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처음 목릉 자리에는 의인왕후의 능(유릉裕陵)이 조성되었다.


8년 뒤 1608년 선조의 능(목릉)을 건원릉 서쪽 언덕(현 헌종 경릉)에 조성하였다가 1630년(인조 8)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로 의인왕후의 능 서쪽 언덕으로 옮기고 능의 이름을 목릉으로 고쳤다.


이후 1632년(인조 10) 인목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목릉 동쪽 언덕으로 능자리가 결정되었고 능의 이름을 혜릉(惠陵)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목릉과 능역이 가까워 따로 능의 이름을 정하지 말고, 목릉 능역으로 합치자는 논의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선조의 능은 『국조오례의』의 예에 맞게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 석상(혼유석), 망주석 등을 배치하였다.


 의인왕후의 능과 인목왕후의 능은 선조의 능과 비슷하지만 병풍석이 생략되었다.


특히 의인왕후 능의 망주석과 장명등에 새겨진 꽃무늬는 임진왜란 이후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이후에 조성된 조선왕릉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휘릉(徽陵, 조선16대 인조비 장렬왕후)     


휘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능침 봉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석상(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은 5개로 배치하였다.


조선 전기 왕릉(건원릉~헌릉)의 고석은 모두 5개였다가 세종의 영릉 이후에는 4개로 줄었는데, 휘릉에 와서 다시 초기의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이는 태조 건원릉의 예를 잠깐 따른 것으로, 휘릉 이후의 왕릉에는 다시 고석을 4개씩 배치하였다.


휘릉 정자각은 동구릉에 있는 다른 정자각과 달리 정전 양옆에 익랑(翼廊)을 추가하여 웅장함을 더하였다.      


숭릉(崇陵, 조선18대 현종과 명성왕후)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현종, 오른쪽(동쪽)이 명성왕후의 능이다.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였다.


봉분 앞에는 석상(혼유석)이 각각 1개씩 놓여 있고, 그 밖의 석양, 석호, 망주석, 문석인, 무석인, 석마 등은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형태로 배치되었다.     


숭릉의 석물은 현 동구릉 내 원릉(영조) 자리에 있던 효종의 옛 영릉(寧陵) 석물인데, 영릉을 여주로 옮길 때 땅에 묻었던 석물을 숭릉을 조성할 때 다시 꺼내 다듬어서 사용한 것이다.     


숭릉연지

혜릉(惠陵, 조선20대 경종비 단의왕후)     


혜릉은 조선 20대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


단의왕후는 처음 왕세자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이전의 순회세자묘(순창원)와 소현세자묘(소경원)의 예를 참고하여 묘를 조성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단의왕후로 추존되어 능의 이름을 혜릉이라 하였고, 1722년(경종 2)에 왕릉의 형식에 맞게 무석인, 난간석, 망주석 등의 석물을 추가로 조성하였다.


능침의 석물은 숙종의 명릉(明陵) 이후의 양식에 따라 작게 조각하였다. 능침의 장명등은 없어져 터만 남아 있고, 정자각은 광복 후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95년에 새로 복원하였다.      


원릉(元陵, 조선21대 영조와 정순왕후)     


원릉은 조선 21대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원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영조, 오른쪽(동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이곳은 원래 효종의 옛 영릉(寧陵) 자리였으나, 영릉 조성 직후부터 석물에 문제가 생겨 계속 보수를 하다가 1673년(현종 14) 여주로 옮기게 되면서 터만 남아 있었다.


이후 1776년(영조 52)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옛 영릉 자리에 원릉이 조성되었다.


 원래 영조는 1757년(영조 33)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어 쌍릉으로 조성되기를 원하였지만,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영조의 능자리로 대신들의 의견이 나누어지자, 정조는 지금의 자리를 영조의 능자리로 결정하였다.


이후 1805년(순조 5)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의 능 동쪽에 능을 조성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원릉은 영조 대에 편찬된 『국조상례보편』의 예를 따랐는데,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왕과 왕비의 능 앞에 각각 석상(혼유석) 1개씩 배치하였다.


 영조의 원릉을 시작으로 중계와 하계 사이의 단을 없애고 문석인과 무석인을 한 단에 같이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의 비각에는 총 3기의 표석을 세웠는데, 가장 왼쪽의 표석(1비)은 1776년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원릉을 조성할 때 세운 ‘영종대왕’ 표석, 가운데 표석(2비)는 고종 대에 영조로 추존하고 세운 ‘영조대왕’ 표석, 가장 오른쪽의 표석(3비)는 1805년(순조 5)에 세운 ‘정순왕후’ 표석이다.


수릉(綏陵, 추존 문조와 신정황후)     


수릉은 황제로 추존된 문조와 신정황후 조씨의 능이다. 수릉은 한 봉분 안에 황제와 황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일반적인 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에 따라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왕(황제)이 왼쪽, 왕비(황후)가 오른쪽에 모셔지지만, 수릉은 반대로 모셔져 있다.     


문조는 처음 효명세자의 신분으로 1830년(순조 30)에 세상을 떠나, 묘를 경종의 의릉(懿陵) 왼편에 연경묘(延慶墓)라는 이름으로 조성되었다.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익종(翼宗)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綏陵)이라 하였으며, 1846년(헌종 12)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양주 용마봉(현 광진구 용마산)으로 옮겼다.


그러나 1855년(철종 6) 다시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현재의 동구릉에 마지막으로 조성되었다.


이후 1890년(고종 27)에 신정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수릉에 합장되었다.    

 

수릉의 문석인은 기존의 복두관복 대신 금관조복의 형태인데 이는 연경묘 시절에 만들어진 문석인으로, 동구릉 중 유일한 형태이다.


능침 아래에 있는 비각에는 총 2개의 표석이 있는데, 1비는 익종대왕과 신정왕후의 표석이고 2비는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의 표석이다.     


경릉(景陵, 조선24대 헌종과 효현황후·효정황후)     


경릉은 조선 24대 헌종과 첫 번째 왕비 효현황후 김씨, 두 번째 왕비 효정황후 홍씨의 능이다.


경릉은 세 개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三連陵)의 형식으로 조선왕릉 중 유일하다.


앞쪽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헌종, 가운데가 효현황후, 오른쪽이 효정황후의 능이다.


세 봉분은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난간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 봉분 앞에는 석상(혼유석)을 따로 배치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1608년(광해군 즉위) 선조의 목릉(穆陵)이 조성되었으나 1630년(인조 8) 목릉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후 효현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경릉이 조성되었고, 6년 뒤에 헌종이 세상을 떠나자 13곳의 왕릉자리를 간심(답사)한 끝에 ‘십전대길지(十全大吉地)’의 명당이라고 주장한 효현황후의 경릉 오른쪽에 능을 조성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4년(광무 8) 효정황후가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자료: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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