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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나와 같은 물고기였음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리뷰

by 소려




만남, 사랑, 이별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소중한 사진이 한장씩은 있을 것이다. 비록 그때의 아름다운 순간은 지나쳤음에도 네모난 사각형 안에 여전히 살아숨쉬는 그때의 기억을 보고, 기억하며, 추억한다. 그리고 여기, 잊은 지 너무 오래되어 있는 줄도 몰랐던 낡은 책. 그 속에 끼워져 있던 빛바랜 사진같은 영화가 있다.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따뜻한 햇살이 장면 곳곳에 배어있고, 아기자기한 분위기와 그리움의 정취가 영화 전체에서 잔뜩 묻어나온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사랑스럽고 우리로 하여금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우리가 일본 영화에서 느끼는 특유의 정겨운 감성이 가장 잘 다가오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향수의 장소 속에서 우리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만남, 사랑, 이별에 대하여.




조제

쿠미코는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다. 손녀의 장애를 부끄러워하는 쿠미코의 할머니는 그녀를 집안에서만 키운다. 이른 아침 인적이 드물 때에만 가끔 유모차에 태워져 그마저도 이불로 꽁꽁 싸여진 채 나가는 산책, 그리고 할머니가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헌 책들만이 그녀가 사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를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의 여주인공 이름으로 칭한다.

조제



우연한 사고로 우연히 만나 우연히 집까지 오게 된 쓰네오가 듣게된 그녀의 소개였다. 비록 남들에게 장애인이라 무시받고, 가족에게 마저 숨기고 싶은 짐짝 취급을 받는 이 처연한 사람은 스스로에게만은 소설 속 아름다운 여주인공 조제였다. 그리고 그녀는 곧 그 남자에게도 조제가 되었다. 이것이 그 둘의 만남이었다.

출처: 네이버 영화



호랑이

밥을 해달라는 핑계로 쓰네오는 조제의 집에 매일같이 찾아온다. 그녀의 유모차에 스케이트보드를 달고 사람이 많은 대낮을 달리며 일탈을 벌이기도 하고, 사회복지 공부를 하는 썸녀에게 도움을 받아 낡은 조제의 집을 고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하지만 사소한 오해와 할머니의 반대가 그 둘의 사이를 소원하게 만들었고 한동안 서로를 잊고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할머니가 돌아가셔 불편한 몸으로 조제가 혼자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쓰네오는 한달음에 오랫동안 찾아가지 않았던 그녀의 집을 다시 찾아갔다. 간간히 찾아오는 사회복지사에게 도움을 받고, 옆집 아저씨에게 가슴을 만지게 해주는 조건으로 도움을 받는 등, 조제는 스스로의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결국 쓰네오는 그녀 역시 자신을 좋아하고, 서로 못만나게 된 날 이후로 계속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을 바라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렇게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게 된 둘은 그 날 이후로 매일같이 사랑을 속삭이게 된다.


둘이 같이 간 동물원. 우리 안에서 조제와 쓰네오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호랑이. 조제는 호랑이를 마주 보며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같이 호랑이를 보러오고 싶었다고 말한다. 호랑이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자 그녀는 두눈을 질끈 감고 쓰네오의 손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가장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으면 평생 호랑이를 못 봤겠지만 이렇게 보게됐네. 나한테 고마워해.


이게 그 둘의 사랑이었다.

출처: 네이버 영화




그리고 물고기들

1년 뒤, 쓰네오는 가족 제사가 있는 날에 조제를 소개하러 갈 겸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멋들어진 렌트카를 빌려 긴 여행길에 오른다. 보러 가기로 했던 수족관이 닫는 바람에 잔뜩 실망한 그녀는 쓰네오에게 과하게 투정을 부린다. 그리고 그날따라 유난히 조제에게 신경질적인 쓰네오. 결국, 조제가 화장실에 가있는 동안 쓰네오는 동생에게 일이 생겨 제사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끊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두사람 간의 분위기. 조제는 갑자기 바다가 보고싶다고 말한다. 바다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든 두사람. 그날 밤 뜨거운 사랑을 나눈 뒤 잠든 쓰네오를 옆에 둔 채 조제는 홀로 나지막히 속삭였다.


언젠가 네가 사라지면 나는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저 깊은 바닷속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것도 나쁘진 않아.


그 여행으로부터 몇달 뒤 둘은 담담한 이별을 맞이한다. 주먹다짐도, 언쟁도 없는 조용한 헤어짐. 마치 이별할 줄 알고있었다는 듯이 그 둘은 마지막으로 소소한 추억을 나누고는 영원히 헤어졌다. 그게 둘의 이별이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세상 모든 물고기들에게

좋은 영화다. 만남, 사랑, 이별에 관한 상징물을 통해 이들의 이야기를 관객들이 예상하고 납득하게 만들었다. 동물원 씬에서 화면이 암전되기 전 호랑이가 분명하게 쓰네오를 응시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호랑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안다면 의미심장한 장면일 것이다.

유모차를 한번 보자. 유모차는 유년기의 상징. 조제가 유모차를 타고 다닌 다는 것은 그녀의 정신적 성장 정도가 가늠이 되는 부분이다. 유모차는 누군가가 끌어줘야 움직일 수 있는 탈 것이다. 하지만 엔딩에서는 그녀 스스로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예전에 쓰네오가 유모차에 스케이트 보드를 달고 질주했던 것 보단 느리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혼자 스스로 세상에 나와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유모차의 의미는 쓰네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또 달라진다. 유모차를 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쓰네오는 조제와 밖으로 나가 달리며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모차가 망가지고, 한 때는 개조를 하면서까지 함께 하고싶을 만큼 사랑했던 열정이 식어 고장난 유모차를 고칠 수 없게 된 순간이 오자 그는 그녀를 업어야만 했다. 바퀴의 무게 없이 그녀의 온전한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아마 쓰네오는 느꼈던 것이 아닐까. 앞으로 그가 평생 업고 가야 할 무게가. 호랑이의 시선이 말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개인적으로 연출 면에서 감탄한 부분이 있다. 조제가 옆집 꼬마가 밀어주는 유모차를 타고 카나에를 만나는 장면. 카나에는 썸남을 빼앗겼다는 자격지심에 조제의 뺨을 때리는데 이때 카메라가 옆집 아이의 뒤로 이동한다.그러면서 카나에의 시선이 이어지는 아래쪽에 옆집 꼬마가 똑같은 구도로 서있게 되는데, 마치 사회복지사를 꿈꾸면서 장애인을 때리는 카나에의 모순적인 모습이 마치 아이 같다는 것을 표현한 화면 언어이다.


둘이 동물원에 갔을 때는 호랑이를 볼 수 있었지만 수족관에 갔을 때는 물고기를 볼 수 없었다. 그러고는 그들이 바다에 갔다. 호랑이는 현실에서 마주하는 역경, 고난, 그리고 두려움을 상징하고 있다. 그렇기에 호랑이는 볼 수 있었고, 봐야만 했다면, 물고기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그 둘이니까. 조제는 '물고기의 성'이라는 모텔에서 이런 독백을 한다. 자신은 물고기라고, 아무것도 안보이는 깜깜한 심해 속이 자신이 살던 곳이라고. 하지만 물고기는 조제 뿐만이 아니다. 쓰네오 역시 조제와의 이별 이후로 저 바다 속으로, 깊은 슬픔 속에서 헤엄치게 될 거니까. 상처가 아물기만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신비로운 물고기 조명이 그들을 감싼다. 이것은 바다로의 초대. 새로운 물고기들을 위한 위로이다.


그리고 조제와 쓰네오의 각각 마지막 장면, 쓰네오는 슬픔을 못이기고 주저앉아 울고, 조제는 여느때와 같이 점심식사 준비를 한 후 바닥으로 떨어진다. 둘 다 떨어지는 이미지로 끝이 났다.





잠수



그들은 깊은 바닷속으로 잠수한 것이다. 한 명은 슬픔의 바다로, 한 명은 성장의 바다로. 둘의 긴 유영이 언제 끝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 헤엄침의 끝에는 새로운 사랑이 있을까.


영화는 우리를 고요한 여운의 바다 속으로 풀어놓는다. 당신에겐 있나요. 영겁의 파도를 딛고 수면 위로 나와 새로움을 마주할 용기가.


서서히 흘러가는 시간의 파도 속에서, 상처 입은 채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들이여


부디 당신에게도 다시 한번 호랑이를 마주할 용기가 생기기를


그리고 언젠가 그 용기가 당신에게 와



'조제'



하고 달콤하게 속삭여주기를.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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