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지옥같은 아침 기상 나팔은 울리지 않았다. 예비군에 대한 나름의 배려인건가. 빌어먹을 나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들의 엄청난 배려와 따뜻함을 느꼈다. 자그마한 것에도 쉽게 감동하는 존재인 것이다 군인은.
예비군은 마치 복수하러 온 사람들 같다. 군생활 동안 억압받고 통제되어왔던 모든 자유의지를 한번에 몰아서 누리고 가려는 사람들 같다. 그래서 그들은 평소보다 더 시니컬해지고 쿨해지며 반사회적으로 움직인다. 물론 허용된 범위 안에서. 딱히 힘들지 않음에도 굳이 기를 쓰고 힘빠진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들의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다. 사춘기 소년들의 엉성한 반항같다.
군대에 와서 가장 두려웠던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두 가지를 꼽는다. '운전'과 '사격'. 다시 말하지만 나는 운전병이었다. 기능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나는 운전병이라는 직책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두려워한 셈이다.
둘 중 '운전'은 점점 좋아졌지만 '사격'은 전역하기 전까지도 영 꽝이었다. 하지만 예비군의 신분으로 다시 사격장에 서니 항상 요동치던 심장은 어느새 고요해져 있었다. 나 역시 어느정도 시니컬해진 것이다. 까짓거 대충 쏴도 잘 쏠 수 있을 것 같은데?
"귀신같이 가운데만 피해서 쏘셨네요" 선한 인상의 중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전쟁이 나도 나는 꼭 운전만 할 거다. 물론 상식적인 간부라면 당연히 그렇게 시키겠지만. 이건 뭐 누끼따는 것도 아니고, 귀신같이 표적의 테두리만 맞추는 소총수는 필요없다. 국가적 자원 낭비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이곳은 식사는 대체로 먹을만 하다. 별로 하는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배가 고플까. 아무튼 점심은 카레였다. 조금 묽었다. 메인 반찬으론 돈까스, 그리고 그 위에 치즈와 토마토 소스를 뿌려주었다. 뭔가 묘한 조합이다. 나는 항상 카레를 먹을 때마다 <헤이트풀8>의 한 장면을 상상한다. 등장인물들이 고기스튜를 맛있게 나눠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스튜가 꼭 카레처럼 생겼다. 타란티노 영화의 식사 장면은 항상 입맛을 돌게한다. 그래서 나 역시 그 장면에 이입해 거친 카우보이처럼 카레를 호쾌하게 푹푹 떠먹는다. 그럼 이 묽은 카레도 조금은 더 맛있게 느껴진다.
이곳은 내가 추구하는 인간관계의 아주 이상적인 표본이다. 모두가 한 공간에서 같은 목적을 수행하지만 서로에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식사 맛있게 하라는 불필요힌 인사치레 또한 하지 않는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있지만 철저하게 개인적이다. 나는 이곳에서 외롭지 않은 소속감만 획득한 채 내 개인의 삶을 살면 된다. 완벽하다. "회사에도 이런 시스템이 적용됐으면"하고 나는 또 이루어질리 없는 망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