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웬만한 화가 뺨 칠 정도로 그려가 고있는데 직접 그리려 하면 현실은 몸통과 팔과 다리를 어떻게 붙여 그려야 하는지 조차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아.. 미술시간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며 두 시간을 선생님과 친구들 눈치를 보며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왜 미술시간은 항상 두 시간인 건데.. 힝'
난 왜 이렇게 못 그리지?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저렇게 쓱쓱 잘 그려나가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비밀 중 하나가 미술학원이었지만 우리 엄만 딸들을 미술학원에 보내주지 않았다. 미술학원은커녕 준비물로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준비해서 학교에 가기 전까지 나는 스케치북과 크레파스, 그리고 색연필을 사용해 본 적도 없는 아이였다.
나의 스케치북은 매일 한 장씩 뜯어내는 날짜달력 뒷장이었고 크레파스 대신 모나미 볼펜이나 연필이 전부였다.
시골에서 어렵게 자란 3남매 중 막내였던 남편은 집에 스케치북 한 개, 크레파스 한 세트 색연필 한 세트가 전부였다고 했다. 필요한 사람은 세 사람이었지만 아버님과 어머님은 어려운 형편에 한 세트씩만사주셨다. 그리고그 한 개는 자연스럽게 장남이 독차지했던 그 시절. 템빨이 중요한 미술이나 만들기에서 남편의 관심은 서서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빨간색을 사용하려 하면 형이나 누나가 이미 사용하고 있어 기다렸지만 곧 다시 쓸 거라며 다 쓰고도 주지 않고 다른 손에 꼭 쥐고 있는 색연필이며 크레파스.
앞장은 이미 형이나 누나가 다 그리고 뜯어 준 스케치북 뒷장은 앞 그림이 훤~히 비춰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결혼 후 아이들 그림 그리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남편과 나는 감탄을 연발한다.
"우와! 우리 둘 다 그림을 못 그리는데 얘들은 어쩜 이렇게 거침없이 그려나가지? 게다가 심지어 잘 그리기까지 해."
"그러게. 오빠. 게다가 그림 속에 나름의 이야기도 보여. 그리고 그림 속 인물들이 다들 행복해 보인다."
어린 시절 나의 그림은 색도 없고 시커먼 게 이야기도 없었는데, 딸내미들의 그림은 다채롭고 화려하고 그림 속의 모두가 즐거워 보여 다행이다. 비싼 돈 들여 가르친 보람도 느낀다.
2년 먼저 학교에 들어간 나의 언니는 동생에게 절대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빌려주거나 한번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는 언니가 아니었다. 나의 이야기에 천천히 등장할 우리 언니. 지금은 나에게 둘도 없는 소중하고 고마운 언니이지만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언니와 나는 어린 시절부터 서로 없어지길 바랐던 원수지간이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부모 아래서 자랐는데, 즉 하루하루 전쟁터에서 20년을 살아왔는데 어떻게 둘 사이가 좋겠는가? 어린 두 자매의 불안한 마음은 만만했던 서로에게 폭력과 욕설로 풀어내는 게일상이었다.
아무튼,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던 나에게 미술시간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한 번에 그림을 완성한 적이 없었고 망쳤다는 이유로 애꿎은 스케치북만 부부북~ 찢어내거나 다음장으로 넘겨댔다. 두 시간이라는 긴 수업시간 동안 제대로 된 그림 하나 그리지 못해 학교에서는 선생님께 혼이 났고 친구들은 내 그림을 보며 놀려댔다.
울고 싶은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지만 아빠는 비싼 스케치북을 함부로 쓴다며 딸내미 싸대기를 두어 차례 날리고 나가떨어진 나를 발로 밟으며 돈 아까운 줄 모르는 복에 겨운 년이라며 욕을 했다. 난 구석에서 엎드려 울지 않으려 애쓰며 찔끔찔끔 눈물을 닦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수치스러웠고 억울했다.
놀랍게도 아빠는 술을 마신 취중상태가 아님에도 언니와 나를 수시로 손 발 등을 이용해 때렸고 엄마에겐 욕을 밥 먹듯 하며 재떨이를 집어던졌다. 지금 같으면 아동폭력, 가정폭력범으로 실형감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90년대엔 그냥 가정사였다.
엄마는 엎드려 찔끔거리는 나를 한번 보고는 왜 애를 때리냐며 한숨을 쉬고 아빠를 한번 쏘아보는 게 다였고 그에 대한 부정적 감정과 화풀이는 단연 내가 되었다.
" 비싼 스케치북 귀한 줄 모르고 이런 식으로 막 사용하면 다신 안 사준다. 각오해. 준비물 못 가져가서 선생님한테 혼나고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당해봐야 아껴 쓰지."
라며 으름장을 내고 나를 불안으로 몰았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 손재주가 아주 메주야. 지 언니랑 다르게 어쩜 저렇게 손재주가 없는지. 우리 김 씨 (엄마네) 집안에 저 정도는 없는데 대체 누굴 닮아 쟤는 저 모양이야. 발로 그려도 너보단 낫겠다."
그때는 나의 손재주 없이 태어난 스스로를 탓했지만 자라면서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 치이.. 엄마가 낳아놓고는..."
혼자 중얼거리며 엄마 탓이라도 하면
" 한 배속에서 나왔는데, 네 언니는 얼마나 손재주가 좋니? 그래도 엄마 탓이야? 웃기는 소리 하고 있어. 아주."
라고 말하며 8살짜리 딸내미를 할 말 없게 만들었고 손재주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림 잘 그리는 언니는 엄마의 무기였다.
그러나 우리 집은 항상 거기까지였다. 공부를 잘하면 더 잘할 수 있게끔 지원을 해주거나 그림을 잘 그리면 더 잘할 수 있게 길을 닦아주든가 글을 잘 쓰면 글짓기 학원은 못 보내줘도 책이라도 맘껏 읽을 수 있게 사주거나 도서관이라도 수시로 데리고 다니는 노력 따위는 없었다.
" 더 어렸을 땐 잘만 하더니 크면서 점점 더 못해지네. 왜 이래? 남들은 못하던 애들도 크면서 더 잘하는데. 쟤는 어째 영~틀렸어."
그걸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인가? 그들은 못하면 잘할 수 있게끔 지원을 해주니 못했던 아이들도 점점 발전을 하고 잘했지만 지원을 안 해주니 그 자리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기세도 꺾기고 실력도 꺾이는 법이지.
본인이 손재주 없이 낳았으면 미술학원이라도 보내서 그나마 손재주가 좋아질 수 있도록 노력이라도 했어야 했던 것 아닌가?. 재주가 메주라고 놀리며 타박할게 아니라 재주를 메주로 낳았으면 후천적 노력이라도 했어야지 노력이란 할 줄 모르는가.
이런 아픔을 갖고 살아온 나는 나의 아이들한테만은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이 원했던 6살부터 동네 미술학원에 보냈고 제법 실력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