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 누구에게?
심리(적) 지배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판단력을 잃게 만들고, 타인에 대한 통제력이나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
1938년 연극 가스등(Gaslight)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이 연극은 1944년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큰 인기를 얻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살해된 유명 오페라 여가수의 상속인 조카 폴라는 그레고리라는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 상속받은 이모의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 폴라는 이모의 물건들을 다락방으로 치우던 중 의문의 편지를 보게 되는데, 남편 그레고리가 당황하며 편지를 빼앗는다. 그러면서 폴리가 이모의 죽음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얼버무린다. 남편은 가정부를 고용, 폴라가 정신적으로 취약한 사람인 것처럼 묘사한다. 그레고리는 폴라에게 브로치를 선물하고 며칠 후 브로치를 몰래 숨겨 폴라가 브로치를 잃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날 밤부터 집 안의 가스등이 저녁만 되면 약해지고 천장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폴라는 가정부에게 이 이야기 했지만, 그레고리에게 ‘폴라는 정신 이상자’로 교육 받은 가정부는 오히려 폴라가 이상하다고 말해 폴라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그레고리는 폴라를 이웃과도 교류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하며 고립시킨다. 처음에 폴라는 남편의 말에 항의했으나, 점차 그의 의도대로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 남편에게 무조건 의존하며,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이 집의 가스등은 일정한 공급량을 나눠 쓰는 구조였기 떄문에 다른 방에서 가스등을 사용하면 이미 켜 있던 가스등의 밝기가 어두워졌다. 밤마다 가스등의 밝기는 계속 약해지고 발자국 소리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이것은 다락방에서 가스등이 켜졌으며 사람이 왔다갔다 한다는 의미였지만, 폴라는 본인이 환청을 보고 듣는다고 생각해 버리게 된다. 어느 날 남편과 함꼐 이웃의 연주회에 참석하던 중, 그레고리는 자기 시계를 폴라의 가방에 몰래 넣고 시계가 없어졌다고 이야기 한 후 폴라의 가방을 뒤져 시계를 꺼내보이며 사람들 앞에서 폴리가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항의하는 폴라에게 그는 그녀의 어머니가 정신병으로 사망했다는 말을 함으로써 폴라를 더욱 위축시킨다.
한편으로, 이모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수사 중이었던 경찰 브레들리가 폴라의 집에 찾아오고 그를 통해 그녀가 보고 듣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확인을 받고서 그녀는 자신을 추스르기 시작한다. 브래들리는 이모의 죽음에 그녀의 남편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남편의 서랍에서 증거인 편지를 폴라와 함께 찾아낸다. 10년 전 이모를 죽인 범인은 이모의 보석을 노린 그레고리였으며, 보석을 얻지 못한 그가 의도적으로 폴리에게 접근, 결혼 후 매일 다락방에서 이모의 짐을 뒤져 보석을 찾았던 것이었다. 마침내 보석을 찾아 냈으나 그레고리는 결국 살인범으로 체포된다.
1969년 정신과 의사인 Barton 과 Whitehead는 학술 논문에서 "Gas Light phenomenon" 라는 표현을 통해 오늘날 일반적으로 쓰이는 정신심리학적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요즘 이 용어는 그야말로 '발에 차일 정도'로 흔한 유행어가 됐다.
장시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사람 - 가족, 연인, 친구 때로는 직장 상사 - 에게 피해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이 쓴다. 피해 본 당사자에게는 본인이 힘들어진 원인을 깔끔한 한마디로 정리해 주는, 상당히 효과적이고 매우 매우 유용한 말이다.
갈등의 당사자들 사이에서 이 말은 피해자만의 전용어가 된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내가 심한 말을 했어.'라고 할지는 몰라도 절대 '내가 가스라이팅을 했어.'라고 말할 리 없기 때문이다. 왜 '가스라이팅' 을 당한 피해자는 넘쳐나는데 그를 인정하는 가해자가 없는 것일까?
여기서 고려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연극의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가스라이팅 가해자에게는 자신의 이득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존재하며, 그를 이루기 위해 의도적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을 한다. 피해자의 조건은 심리적인 유약함과 무엇보다도일체의 외부 정보가 차단된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가해자라로 불리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인 목표가 있을 수는 있지만, 대부분 상대방에게 해꼬지하겠다는 악의를 가지고 일부러 못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란 보호자 없이 생존이 불가능한 어린아이,장애인 또는 감옥에만 있어야 하는 죄수 , 북한과 같은 독재국가 국민 정도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생각한다 해도 성년인 일반인의 경우 이런 조건에 걸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가스라이팅을 당했다'고 말하게 되는가?
자신의 책임에 대해 묻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꼼짝달싹 못하게 된 가련한 피해자'역할만 하면 된다. 불행을 초래한 행동에 책임을 벗어날 흑백논리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상대편의 일방적인 몰아붙임의 결과이므로 나의 어리석음, 나의 판단착오, 나의 의존성에 대해서 질책할 필요가 없다.
그 순간은 편안하다. 책임에 대한 부담이 없으므로.
그러나 이후에 이 피해자는 그 대가를 너무 크게 치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대가란 다름아닌 '자기 주도권의 포기'라는 것이다.
언급했듯 불가항력적인 생존의 위협이나 철저히 고립된 상태가 아닌 이상 우리는 스스로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 즉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동의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나의 이성적 판단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의 판단은 내 존재의 주도권을 실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에 따르는 책임을 포함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가스라이팅의 희생자로 자처할 때 이는 '나는 주도적으로 내 행동을 결정할 힘이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전제가 깔리게 된다. 이 전제야말로 누군가가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에게 속삭이는 것이다. 책임감을 느낄 필요가 없으므로 자신의 행동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나 의지도 없다. 즉, 내가 달라지지 않더라도 세상이 나를 제대로 대접만 해 준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스스로를 무능하다고 규정하는 자에게 제대로 된 자존감이 자리잡을 일은 없다. 결국 이런 상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비슷한 경험이 계속 반복되면서 약하기 짝이 없는 가련한 피해자의 자존감은 더 뭉개질 수 밖에 없고 그 종착역은 스스로에 대한 경멸 뿐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존중이 없는 사람을 누가 존중할 수 있을 것인가?
개인적으로 '가스라이팅을 당했다' 는 말은 '셀프-가스라이팅(self -gaslighting)을 했다' 라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지금처럼 쉽게 자신을 무능하게 보는 것 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는 이 뜻이 조금은 더 낫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적어도 생각의 주도권은 내 놓지 않았다는 뜻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