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야 워낙 자연환경 자체가 최고의 관광자원인 곳이라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신비로운 곳들이 넘쳐나긴 하지만 모레노 빙하에 다녀온 이 날 역시, 하루 종일 엄마에게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엘 칼라파테는 모레노 빙하를 보러 가기 위한 베이스캠프이다.
눈이 얼어 얼음이 되고 그 위에 또다시 눈이 내려 시간의 흐름 속에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면적이 부에노스아이레스 면적과 맞먹는다고 한다. 하물며 이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매일 2m씩 전진한다고 하니 정말 할 말이 없다.
모레노 빙하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왕복 버스 티켓만 끊고 빙하 주변으로 잘 만들어진 산책길을 걸어서 구경하는 방법과 아이젠을 끼고 빙하 위를 직접 걸어보는 미니, 빅 트레킹을 신청하는 방법이 있다.
난 또 언제 이 먼 곳까지 와 보겠냐는 심산으로 미니 트레킹을 신청했다. 그 당시 가격으로 15만 원 정도였으니 남미 물가를 감안해 볼 때 꽤나 비싼 가격이었다. 내가 가져간 일 년 전 버전인 가이드 북에 나와있는 가격보다도 3만 원이나 오른 걸 보면 물가 상승 속도가 장난이 아닌 듯 하다.
아침 7시. 숙소까지 픽업 온 버스를 타고 모레노 빙하가 있는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전날 날씨를 확인했을 때만 해도 비 예보가 없었는데 당일 아침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아.. 우산 안 가져왔는데...
2시간 정도 기절했다가 일어나니 모레노빙하 국립공원 안으로 버스가 들어가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빙하트레킹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다시 30분 정도 배를 타는데 호수에 둥둥 뜬 얼음덩어리와 얼음 기둥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와.... 남극도 아니고 신기하다.
그런데 춥다.
뭔가 좀 허술해 보이는 아이젠을 끼우고 빙하 위에 올랐다.
에베레스트 산 위가 이런 모습일까?
뾰족뾰족 얼음산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넘어질까 봐 무섭기도 해서 자꾸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그나저나 발이 너무 시려서 빅 트레킹 신청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트레킹 마지막엔 오늘의 하이라이트! 위스키에 빙하 얼음을 넣어서 마시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빙하라고 일반 얼음과 달리 짠맛이 나는 것도 아니지만 왠지 낭만적이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누가 생각한 이벤트인지 기획력이 좋은 것 같다. 준비물은 위스키 한 병이면 되니 간편하고 경제적이면서 의미부여도 되고.
그렇게 트레킹을 마치고 각자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고 다시 배 타고 나와 산책로를 걸었다.
난 사실 빙하 위를 걷는 것보다 나무 데크로 만들어 놓은 산책로를 걷는 게 훨씬 더 좋았다.
산도 멀리서 봐야 멋있지 산속에 들어가면 그냥 나무와 풀이지 않나?
산, 바다만 볼 수 있었던 대한민국을 벗어나 삐죽빼죽 멋대로 생긴 것 같으면서도 규칙적인 모습의 빙하를 바라보고 있자니 하루종일 봐도 질리지 않고 마냥 신기하고 재밌었다.
가이드북에 따르면 운이 좋으면 빙하가 떨어져 나가면서 천둥 치는 듯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하길래 귀는 쫑긋, 눈엔 레이저를 쏘면서 빙하가 떨어져 나가는지를 감시하면서 걷느라 심심할 틈이 없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 정말 천둥소리를 내며 빙하가 떨어져 나와 호수로 가라앉는 모습도 봤다.
첨 봤을 땐 럭키럭키~ 하면서 호들갑 떨며 엄청 기뻐했는데 뭐.. 그 후로도 한 번 더 들었으니 그렇게 드믄 일은 아닌 듯했다. 이 눔의 가이드북 트레킹 비용도 그렇고 맞는 게 없네.
버스는 아침에 탔던 숙소앞에 다시 나를 내려놨다. 이세계에서의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