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X세대의 여행산문집 사서고생기(2016, 볼리비아)
50일간의 남미여행 중 마지막 12일은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친구, 혜현이와 함께였다.
영어와 요리 능력자인 친구와 함께 다니는 여행은 그전 40일과는 차원이 달랐다.
여행사에서 투어 예약을 할 때에도 어떻게든 알아듣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거나 의사전달을 위해 손짓 발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한 발짝 물러나 '뭐가 있나.. 이 엽서 사진은 어딘가..' 괜히 매장 인테리어나 구경하면서 설렁설렁 돌아다녀도 친구가 알아서 다 통역해 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은 트레킹 일정이 있으면 점심 먹을 곳이 마땅치 않기도 하고 식비도 아낄 겸 전날 마트에서 사 온 빵을 챙겨가서 대충 때운다는 느낌으로 먹었는데 친구가 온 이후로는 얇은 햄을 반으로 접어 모양을 내고 토마토까지 썰어 넣어 뭔가 그럴듯한 샌드위치를 만들어 소풍 가는 듯한 기분이 났다.(캐나다 워홀 하면서 샌드위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단다)
친구 덕분에 한결 편해진 여행을 하며 우유니 숙소로 갔다. 싼 숙소 잡는다고 공용화장실로 정했는데 화장실 안에는 난로가 있어서 따뜻한데 방엔 라디에이터도 없고 너무 추웠다. 일단 해가 떠 있어 따뜻한 밖으로 나와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여행사인 브리사에서 소금사막 데이+선셋 투어랑 선라이징 투어를 신청했다.
내일 하루종일 투어하고 그다음 날 새벽에 선라이징 투어까지 하려면 새벽 3시에 나와야 하는 강행군이지만 막상 오늘은 할 게 없었다. 아직 오후 2시. 점심도 먹을 겸 시장구경을 갔다.
친구는 캐나다에서 싸구려 와인을 맛있게 먹는 배웠다며 와인과 환타를 샀다. 난 맥주 외길인생이라 '와인은 어차피 잘 안 먹는데.. '라고 생각하며 내 몫의 맥주를 집어 들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메리카노도 써서 라떼만 마시는 사람이다.
이날 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서 어찌나 다행인지... 환타랑 섞은 싸구려 와인은 와인 특유의 씁쓸한 맛이 안 나고 칵테일처럼 달달한 느낌만 남아 있어서 나같이 쓴 거 못 먹는 애들에게 딱이었다. 혜현이는 내가 챙겨간 전기쿠커에 계란국 끓여 안주를 만들었다. 이걸로 라면 외의 요리를 할 수 있단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ㅋㅋㅋ 이렇게 추운 방에 앉아 달달하면서도 뜨뜻한 밤을 보냈다.
그 당시 한국은 자몽에 이슬, 이슬톡톡 등 뭔가 과일 맛 섞인 달달한 소주가 유행이었다. 혜현이가 궁금하다고 해서 한국에서 올 때 선물로 몇 병 사가지고 왔었다. 병은 무거우니 플라스틱병에 든 복숭아 소주와 자몽소주 3병을 40일째 가방에 넣어서 같이 여행을 다니는 중이었다.
선물은 무슨... 술은 부족한데 나가긴 귀찮고 우린 그 소주까지 다 까서 마셔버렸다.
취기가 오르고 서로 말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하며 울고불고 잊지 못할 밤을 보냈다.
우린 페루 와카치나에서 버기투어를 하며 사막을 만끽했고 안개가 걷히는 모습이 마치 천상계에 있는 듯했던 마추픽추도 함께했다. 볼리비아로 넘어와 거대한 분지 수도, 라파스 중심에서 아름다운 야경을 봤고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었던 눈부시게 빛나는 우유니 사막을 밟아봤다. 모두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들이었지만 난 주구장창 술만 먹었던 이 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란 사람은 맨날 혼자가 좋다고 외치면서도 자연보단 사람에게 더 위로받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덧.
다음날 소금사막은?
숙취로 힘들긴 했지만 소품까지 준비해 온 적극적인 커플들 덕분에 재밌는 사진을 많이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