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소견
올해 받아야 할 건강검진일이 다가왔다.
늘 그렇듯 "별일 없겠지"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많은 날들을 흘렸고, 건강검진 날짜를 가능한 한 해의 마지막까지 미루었다. 하지만 속이 심하게 쓰렸던 날들이 몇 번 있었기에 이번에는 위내시경을 미리 예약하고 몇 가지 추가 검진도 신청했다.
드디어 검진 당일 새벽이 밝았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고, 빨리 끝내고 돌아오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준비했다. 필요한 검사를 모두 끝내기 전까지는 식사도 화장실도 갈 수 없기 때문에 공복감과 요의감을 느끼며 문을 나섰다.
집을 나서니 해뜨기 전의 어둑한 새벽하늘에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듯했다. 혹시 몰라 챙긴 우산을 펼치니 스스로가 기특해졌다. 늦가을의 비가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운동 삼아 걸어가기를 잘한 것 같았다. 서늘하면서도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발걸음에 흥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건강협회에 도착을 했다. 2년마다 받는 정기검진에 익숙해진 터라 자연스럽게 번호표를 뽑고 자리에 앉았다.
옷을 갈아입고 시작된 검사는 특별한 것도, 낯선 것도 없었다. 익숙한 절차였다. 나보다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을 바라보며 내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였다. 문득 이 많은 사람들을 언제 다 검진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검진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위였다. 가끔 심하게 속이 쓰리거나 더부룩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이번 정기검진의 주요 목적은 위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속이 쓰린 거 때문에 커피도 줄이기까지 했었다.
초음파 검사를 마치고 다음 검사를 받으러 가던 중, 이미 검사를 마친 진료과의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순간 ‘뭐지?’ 싶어 돌아가 보니, 간호사가 들고 있는 차트에 포스트잇에 별표와 함께 "영상 CD 안내"라는 메모가 보였다. 처음 경험해 보는 상황이었지만 뭔가 좋지 않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미 검진이 끝난과에서 나를 다시 부를 이유는 뻔해 보였다.
다행히 가장 걱정했던 위 상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건강했고, 가벼운 염증 외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검진을 마치고 좀 전 간호사의 말대로 영상 CD를 챙겼다. 새벽녘 오던 비는 그쳐있었다.
집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가입한 보험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진단금이 얼마인지, 내가 가입한 보험에 중복 보장이 가능한지 확인하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좀 더 여러 가지 보험을 들어둘 걸 그랬나.’ 문득 든 생각이었다. 내가 침착한 건지, 아니면 아직 이 상황이 실감 나지 않아서 무덤덤한 건지 나조차도 잘 모르겠다.
건강협회에서 ‘이상 소견’이 나왔고, 그에 따라 권유받은 조직검사를 받으러 유방외과를 방문했다. 다행히 취소된 예약이 있어서 바로 다음날 조직검사가 가능했지만 검사를 받는 과정은 꽤나 고통스러웠다. 신경이 몰려 있는 부위에 미세 석회가 모여 있어 검사가 더욱 힘들었다. 유방 X-ray는 가벼운 간지러움 정도로 끝났지만, 조직검사는 달랐다.
결과가 나온다면 연락을 준다는 원장님의 말에 일주일 가까이 손에 꼬박 휴대폰을 쥐고 살았던 것 같았다.
퇴근 후, 기다리던 지하철 역에서 받은 전화에 내가 타고 가야 할 지하철 하나를 그냥 보냈었던 것 같다. 혹여 설명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 봐 최대한 집중했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바로 대학병원에 전화를 했다.
다행히 생각보다 예약이 빨리 잡혔고 대학병원의 교수님도 내가 가져간 영상 CD를 보시더니, 건강협회에서 했던 말과 조직검사를 받았던 곳에서 했던 말과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
바로 정할 것은 아니지만 대략의 수술방법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고 두 번째 내원일과 MRI 유방 CT 촬영을 예약하였다.
그렇게 별다를 거 없이 일주일을 지내고 다시 대학 병원을 향하였다.
두 번째 내원에서 교수님은 처음 내원 때 가져간 조직검사 블럭의 결과에 대해서도 말했었다. 블럭을 다시 검사해보니 다행히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소견이었다. 긴장했던 몸이 순간적으로 풀어지며 안도했다. 그러나 교수님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암세포가 나오진 않았지만, 석회의 모양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교수님은 공 다섯 개 중 네 개만 뽑아서 봤더니 뽑은 네 개는 하얀색인데 마지막에 뽑지 않고 남은 하나가 검은색일 수 있다는 예를 들어 설명했다. 나는 곧바로 그 의미를 이해했다. 확실히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다시 조직검사를 했었던 유방외과로 가서 재조직검사를 하기로 했다. 두 번째로 하게 되는 것은 흔히 ‘맘모톰’이라고 불리는 시술이었다. 모양이 좋지 않은 혹 세 개와 엑스레이상 발견된 미세 석회의 부분에 침으로 영역을 표시하여 조직을 떼내기로 했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현실적으로 다행스러웠던 것은 실비 보험 청구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나는 2024년의 마지막 날을 병원에서 보냈다.
일주일 후, 실밥을 제거하러 병원에 갔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모양이 좋지 않다고 떼어낸 혹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세 석회에 대해서는 ‘상피내암’이라는 소견이 나왔다. 며칠 뒤 건강보험공단에서 문자가 왔다. 산정특례 등록이 완료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일관되게 진행되었다면 마음이 조금 더 편했을까? 처음 암 의심 소견을 받았을 때에는 여기저기 알아보고 예약하며 정신없이 움직였지만, 이번에는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가라앉았다. 혹시 아닐 수도 있다는 기대를 내심 많이 했던 모양이다. 처음 암 소견을 받았을 때는 빠르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해결책을 찾으려 했었는데 말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서울에 있는 유명한 병원에 예약을 해볼까 싶어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예약이 가능한 가장 빠른 날짜가 6월 말이었다. 다음으로 전화를 건 병원은 8월 중순이었다. 이미 두 번의 조직검사로 한 달 이상 지체된 상황이라 더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래, 급할 것 없다.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다.
추운 겨울이 지나 따스한 바람이 불 때쯤이면 수술을 마쳤거나 수술 날짜를 잡았을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때는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다.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영역에 너무 욕심내지 말자. 마음을 한번 더 내려놓는다.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