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밤 나무였다는 나무.

by 김석철


나는 도토리묵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싫어한다.

된장이 범벅된 빛바랜 낙엽 같은 삭힌 콩이파리도 그렇고, 주책없이 방귀만 뿡뿡 대는 꽁보리밥도, 희멀건한 국물 속에서 눈깔 부릅뜨고 째려보던 메르치가 싫어 수제비도 싫어한다.

음식 속에 녹아 있는 지난날이 떠올라서다. 그야말로 죽지 않기 위한 역할 외에는 음미니 식도락이니 하는 말은 애당초 해당 사항이 멀었다. 주린 배가 긁어대는 쓰라림만 덜어 준다면야 토끼풀이면 어떻고, 잔반 얻어다 꿀꿀이 죽처럼 먹은들 대수였을까. 실제로 미군부대 짬밥 얻어다 끊여먹던 게 의정부 부대찌개의 원조 아닌가.

초근목피, 똥꾸녕이 찢어진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허구한 날 풀떼기만 삼켜대니 ph2 정도의 강력한 위산액조차 맥을 못 추고 오롯이 돌덩이보다 야물게 뭉쳐진 지독한 변비로 되돌아왔다.

살충제로도 쓰이는 훤칠한 자리공, 씨앗 스무 개면 성인도 사망시킨다는 맹독을 지닌 아주까리의 이파리를 비롯해 벌레들 조차 몸을 사리는 독성식물들 까지도 굳이 끓이고 찬물에 담가 식히는 번거로운 과정의 법제를 해가면서 먹어댔다. 고사리 또한 마찬가지다. 잡초라고 일컫는 명아주, 환삼, 망초 도대체 못 먹는 풀이 있기는 한 건지 쌀이 남아도는 현재도 풀떼기에 대한 부심이 남다르다. 한국인의 밥심은 결국 악착같이 살아남은 초근목피의 부산물인 셈이다.


농막 위로 불과 삼십 보 윗쯤에는 백여 평 정도의 언덕배기에 기대어 어른 키 두 배 길이의 조경수가 심겨있었다.

몇 년을 오가면서 힐끔거렸지만, 잎가지만 무성할 뿐, 꽃이나 열매가 맺히는 꼴을 본 적이 없는 그저 그런 나무였다. 단풍이 아름답다거나 뽀대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든 건 몰라도 난 것은 안다고, 퇴근길의 농막 풍경이 왠지 퀭하니 낯설었다.

늘 있어서 존재조차 잊고 있던 볼품없던 나무들이 불과 몇 시간 만에 홀라당 사라져 버리고 황톳빛 맨살만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어?언제 저기 꿀밤나무를 다 캐 갔노? 죽었는지 꼬락서니 한번 안 보이더니만 총알같이 파갔네?"

나무에 대해서는 암만 까막눈일 망정 적어도 상수리, 떡갈, 도토리, 개암나무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사라진 나무 아래서 응가를 한 게 어디 한두 번인가. 도토리 열매라고는 구경을 못해봤는데 도대체 어디를 봐서 꿀밤 나무라는 건지.


죽기 살기로 악착같이 쫓아다녔다.

들의 색채가 갈색으로 물들고, 바람에 서늘함이 묻어날 즈음이면 동네 여인네는 죄다 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지천에 깔린 도토리를 주워 별식인 도토리묵과 떡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 야들아, 얼릉 비켜드려라. 학차이 둘째 독종 아들레미 등장했데이"

제 키만 한 도토리나무 사이를 날다람쥐처럼 좌충우돌 뛰어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꿀밤나무는 전부 것인 양 용심을 부렸다. 뙤약볕이 쏟아지는 갯펄에서도, 캐고 남긴 남의 감자밭을 뒤질 때도 어김없이 독종인 어린 나는 빠지지를 않았다. 고작 열두 살 적이었다.

다람쥐, 멧돼지의 주식이자, 한국인만 음식으로 먹는다는 도토리가 입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꽤나 번잡하다.

특유의 떫고 쓴 맛을 빼내기 위해 물에 충분히 불리고 빻고 거르고를 반복해서 전분이 가라앉으면 불 앞에 앉아 휘휘 저으며 걸쭉하게 만든다. 그리고 식히면 이맛도 저 맛도 없는 도토리묵으로 밥상의 별식으로 오른다.

온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눈 맞는 강아지처럼 쫄랑대며 줒어모은 꿀밤이 풀떼기만 먹으면서 근근이 가난한 세월을 버텨냈던 우리의 옹색한 밥상에서 한가닥 웃음이 되었다. 개밥의 도토리, 개조차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는 떫고 써서 아리기 조차한 꿀밤이 가을을 열고 겨울을 견디게 했다.


뒷산에 숨죽여있던 생소한 나무는 꿀밤나무였다. 다람쥐가 낼름 줒어갔는지, 다람쥐보다 멧돼지가 더 좋아한다는 도토리를 잽싸게 물고 가는 통에 내 가뜩이나 작은 눈에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먹었으면 어떠랴. 다람쥐, 청설모, 멧돼지면 어떻고 하다못해 바구미 벌레면 또 어떨까.

인간인 내가 애써 줒어모았던 도토리는 처음부터 내 관할이 아니었던 것을.

낯선 곳으로 떠난 꿀밤나무였다는 나무는 나처럼 무심한 사람의 땅이 아닌 곳에 뿌리를 내렸음 좋겠다.



나는 수제비도 군내 나는 콩이파리도, 도토리묵도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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