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여신 ; 디케.
김 하사는 난처한 선택을 강요당했다.
"00 하사, 영내대기 명령 해뒀으니까, 위병소 통제해서 외출 금지 시켜라!"
위병 근무 중인 김 하사에게 퇴근길인 주임상사의 서슬이 시퍼런 명령이 떨어졌다.
"김하사. 집에 잠시 들러 가져올 게 있는데, 한 시간만 좀 부탁하자."
"주임상사님 명령 못 들으셨습니까? 외출은 곤란합니다."
"며칠 영내대기해야 하는데, 내의도 좀 가져와야 되고... 딱 한 시간이면 되는데 한 번만 도와줘."
징계를 당한 고참하사의 집요한 부탁과 짬밥의 압력에, '한 시간만'이란 조건부 약속을 확답받고 위병소 게이트를 열어주었다.
결국 우려한 대로 밤새 귀대를 하지 않았고, 중간 확인을 한 주임상사에게 발각이 되고 말았다.
자의, 타의로 명령 불복의 공동정범이 된 것이다.
뺑뺑이의 추억
정의의 여신인 디케는, 두 눈을 안대로 가린 채 한 손엔 추상같은 검을, 다른 한 손에는 경중을 따지는 천칭저울을 든 모습으로 그려진다.
대한민국 대법원 로비 벽에도 여지없이 디케의 상을 만날 수 있는데, 단호한 위엄이라곤 조금도 찾을 수 없는 곱상한 새댁 같은 얼굴에, 준엄한 '검'이 아닌 '법전'을 끼고 단아하게 앉아있는 모습이다.
일수 받으러 온 초보 사채업자처럼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서 말이다. 극히 대한민국의 사법부다운 이미지가 아닌가. 눈을 그렇게나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안 봐줄래야 안 봐줄 재간이 있나.
지극히, 대한민국 사법부다운 정의의 여신.
그날 문제의 모 고참하사와, 모 난 놈 옆에 있다 억울하게 정 맞은 김하사는 격노 한 주임상사에게 거의 죽기 직전까지 빠따 세례를 당해야 했다.
"사령부에 다녀올 동안 완전군장으로 연병장 뺑뺑이 돌고 있어!"
먼지가 날리도록 빠따를 치고서도 화가 가라앉지 않은 주임상사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씩씩대며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부리나케 군장과 총기를 챙겨서 한여름날의 이글거리는 연병장으로 튀어나가려는 김 하사와는 달리, 문제의 고참하사는 밍기적대며 궁뎅이를 만 발이나 뒤로 빼고 있었다.
우리네 사회에선 언제부턴가 눈치가 빨라 기회를 잘 타고 라인에 적당히 묻어갈 줄 아는, 소위 처세에 능한 사람이'유능' 한 사람으로 인정되는 분위기다. 정의 앞에서의 당당함, 올곧음에 대한 신념은 되려 융통성이 결여된 꽉 막힌 미련함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디케는 단단히 동여매었던 안대를 내던졌고, 공정의 저울은 상황과 힘의 무게추에 따라 요동을 치고, 엄정의 칼날은 상대를 가리기 시작했다. 정의의 상징이자 보루인 디케마저 우리 사회에선 얍삽한 처세의 촉을 곤두 세우고는 적당히 묻어가는 비겁함을 선택한 듯하다.
"위병소에 연락해 주임상사 들어온다 하면 나가서 두어 바퀴 빡세게 돌면 된다."
여름 날씨니까 완전군장으로 두어 바퀴만 돌아도 땀으로 흥건할 테니, 시간 내 열심히 기합 받았는지 모를 거라면서 딴청을 부려댔다. 요령이 좋은 건지, 기본 인성 자체가 개차반인 건지....
졸병 김하사는 졸지에 뜻하지 않은 죄인이 되어 기합을 받는 상황이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계급이 깡패인 군대에서 속앓이 외에는 가타부타를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요령껏 뺑뺑이 돌며 적당히 시간을 때우자는 인간말종의 문제아 고참.
김하사는 참으로 난처한 선택의 길 위에 몰렸다.
하사관 최고 어른 주임상사의 명령과, 쓰레기 고참의 얄팍한 처세의 중간에 끼어버린 어처구니없는 상황, 선택은 이리저리 치이는 힘도 빽도 없는 김하사의 몫이었다.
십 원짜리 쌍욕을 퍼붓는 고참 하사를 등 뒤로 한 채 김하사의 군홧발은 뜨거운 연병장으로 향했다.
'원칙이냐, 타협이냐.'
그날의 김하사는,
'아둔함'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