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으로 100만 원이 든 통장 하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엄니 이 여사는 말했었지.
이 여사 소원? 아직도 감감해. 대가리 다 큰 자식이 몇인데... 그래서 슬퍼.
"그놈의 돈이 웬쑤다, 웬쑤!"
이 여사의 넋두리는 어쩜 그렇게 한결같은지. 자식도 원수, 돈도 원수.
오징어 땅콩에 콜라 하나 집어 들었다고 그새를 못 참고 대번에, '이번 달에 니는 클났어. 곧 쪽박 찰 걸?' 호들갑이 폰을 방정맞게 흔들어댄다. 아닌 게 아니라, 자판대에 꽂힌 가격표부터 눈이 먼저 꽂힌 게 하루이틀이 아니다. 싼 게 비지떡, 물건 모르면 가격을 보란 말이 시주승 공염불로 여겨지니 주머니 사정이 여간 쪼그라든 게 아니다.
온갖 궁상을 떨어가며 아득바득 꼬불치는 돈에는 확실히 눈이 있기는 있나 보다. 재수에 옴이 붙은 건지, 조상님 묫자리를 잘못 앉힌 탓인지 아무리 쫒아도 손에 잡히지를 않는다.
깔딱 고개의 칠부 능선은 항상 내 걸음보다 빠르게 뒷걸음질 친다.
며칠 전부터 통장 디다보기가 덜컥 겁이 났다.
야금야금 갉아먹힌 통장의 잔고에 마지노선이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마누라가 나와 아슬하게나마 부부의 연을 이어가는 동아줄이 위태롭게 되었다. 다섯 밤만 지나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김없이 마눌의 생활비 청구서가 날아들 텐데 은근히 악덕업자에게 빚 독촉 당하는 모양새다.
세상에서 떼어먹기 어려운 돈이 경조사 부고, 청첩장과 집사람이 매월 내미는 청구서다.
마누라 팬 날 장모 오고, 쌀 떨어진 날 손님 온다고 세금고지서 보다 무서운 부고장은 기가 막히게 타이밍을 안다.
치사하지만 부득불 신발끈을 늦게 매야 할 판이다.
쪽박 차기 직전인데 까짓 거 사나이 가오 따위가 대수랴. 그나마 집구석에서 아직은 눈칫밥이라도 건수 할 수 있는 이유도 내가 돈줄이기 때문인데, 밑천 다 드러나는 순간 꿔다 논 보리자루 신세 되는 거 순식간이다.
열심히 산다고 살았지만 정작 이 나이 먹도록 먹고사는 기초적인 문제로 전전긍긍 골머리를 싸잡고 있으니, 여태껏 인생 더럽게 헛살았구나 싶다.
두둑한 지갑과 좋은 의복은 사람에게 자신감을 선사하는데, 애석하게도 가난한 노가다꾼이자, 어설픈 반푼수 농부 겸, 돈 안 되는 작가인 나는 그 어떤 것도 자신 있게 내밀게 없다. 세상 바쁘게 사는 인간인 척은 독으로 하지만 정작 실속이란 게 없는 허접한 쪼다 중의 상쬬다인 거다.
어제 늦은 시각, 초상이 났다는 고지서를 통보받았다.
이 어려울 때는 좀 기다렸다가 천천히 죽으면 안 되나, 결혼 그 까이꺼 속딱하게 둘이서 알콩달콩 은밀하게 하면 어디 덧 나나.
폰에 낙인 된 계좌번호가 돈 떼어먹을 생각일랑 하지들 말고, 사회생활 잘하라고 노골적으로 눈총을 한다.
도대체 청구금액이 얼마란 말인가. 마눌은 10만 원 하자고 한다. 기세 좋게 30만 원 쏘라고 가장으로서의 가오를 잡았다. 이래저래 쪽박 찬 주제에 방구라도 시원하게 한 방 갈겨야 싸나이 면이 서지 않겠는가.
먹을 거, 입을 거 아껴가며 자린고비 짓에 아득바득 발버둥 쳐봐야 맹탕 제자리걸음에 변변챦은 지갑, 때깔이나마 좋은 귀신으로 죽자는 편을 택했다.
통장에서 눈길을 끊어버렸다.
위기감에서 짜증으로, 이제는 분노의 경지에 이르러버렸다. 먹고사는 문제, 참으로 어렵다.
신용카드부터 뽀게버려야 하나,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