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아침 풍경.

by 김석철



빛바랜 밴취의 끄트머리로 슬금슬금 밀려나더니, 볼썽사납게스리 왼쪽 궁뎅이만 아스라이 걸치고 있습니다.

햇살, 그것도 아침이 겨우 열린 고작 아홉 시의 햇살에게 조차 쫓겨 다니고 있으니 하루 해를 넘길 일이 가마득합니다.


오늘은 목요일입니다.

이번 한 주는 폭싹 망했습니다.

날일꾼이 육일 중에 나흘씩이나 에어컨 동냥이나 하면서 띵까거리고 있으니, 졸지에 본의 아니게 늘어진 팔자의 밥충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주머니 사정만 빵빵하다면야 평생을 퍼질러 놀 자신이 있습니다만, 최근 들어 세상이 저를 내벼두지를 않습니다. 숨만 겨우 쉬는데 왜 가만히 있는 지갑이 헥헥거릴까요.

작업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이도저도 못하고 속절없이 을의 비애를 절감하고 있습니다. 뒷배 없는 타일러인 제가 일정을 이렇게나 꼬아놓았더라면 모르기는 해도 아마 갈가리 찢겨 죽었을 겁니다.

업자는 타공정과 겹쳐 작업에 애로가 있더라도 대충 비벼보라고 합니다. 나흘씩이나 데마찌를 놨으니 딴에는 미안해서 하는 말이겠지요. 갑은 쏘옥 빠지고 여차하면 을과 병끼리 멱살 싸잡는 사달이 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그랬어요.

"아무 일도 안 하고 싶어요."

일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은 마치 까스 활명수와 같았습니다.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뜨끔했지만 정곡을 찌른 거지요.

저는 공부가 재밌다는 학생, 일이 즐겁다는 일꾼은 한대 야무지게 쥐어박고 싶어 집니다.

단 한 번도 제게는 해당사항이 없었거든요.

먹고사는 눈앞의 고민만 없다면야 세상 누구보다 신바람 나게 잘 놀 자신이 있습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 법이라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막상 지금처럼 손 놓고 빈둥거리는 날에는 마땅히 할 짓이 없이 좀이 쑤셔 환장합니다.

예전의 노가다꾼들, 아침 댓바람부터 거나하게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 꽤나 보였습니다. 한 푼 벌어볼 거라고 새벽별 보면서 나갔는데, 여차저차한 관계로 그냥 돌아가시라 합니다. 오야지 입장에서 그냥 보낼 수가 있나요. 대폿집 문을 두드려 한잔 먹여놔야 면이 서지요. 불시의 데마찌에 할 짓이 없어 뻘쭘하니 막걸리라도 한잔 걸쳐야 되는 겁니다. 제대로 놀아봤어야 놀죠. 자고로 낮술 취하면 애미, 애비도 못 알아본다는데, 그닥 오래전 풍경도 아닙니다.


팔랑포 방파제로 나왔습니다. 거대한 조선소를 마주 보는 조그만 포구입니다.

지근에 옥포대첩 기념관이 있고, 거북선을 만든 후예답게 웅장한 조선소가 위용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땅땅, 망치소리가 잔잔한 너울을 넘어 작은 포구에 닿습니다. 누구는 햇살을 피해 궁뎅이를 빼고 있는데, 어디선가는 쉼 없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나 봅니다.

포구의 방파제 끄트머리에서 창 넓은 모자를 눌러쓴 젊은이가 바지런히 낚싯대를 까불거리고 있습니다. 나보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 두어 시간은 넘게 바늘을 던졌을 겁니다. 입질 한 번을 못 받고 있습니다. 지나 내나 아침부터 참 불쌍합니다.

사실, 이 팔랑포구에서 고기를 잡아내는 조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여긴 고기 없다고 말해줄까 하다 걍 참기로 합니다. 희망을 깰 수는 없으니까요. 속으로 내기를 겁니다. 자네가 먼저 낚싯대를 접나, 내가 햇살을 피해 이 자리를 뜨나.

이 으슥진 곳에도 잘 만들어진 산책로가 바다와 산의 경계선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모르기는 해도 대한민국 전 국토가 언젠가는 데크 산책로로 연결될 거 같습니다.

좀 전에 꽉 끼는 레깅스 차림의 늘씬한 젊은 처자가 힘찬 걸음걸이로 비싼 산책로를 따라 내려왔습니다.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훔쳐보았습니다. 주책맞게 침도 주룩 흘렀지만 잽싸게 딴청을 부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백수도 마냥 한가하지는 않습니다.

열 시 반.

태양이 대놓고 윽박을 지릅니다.

아, 내기는 제가 이겼습니다. 젊은 낚시꾼이 시바시바 그러더니 밑밥을 사정없이 바닷속으로 냅다 처박아버렸습니다. 행여 들킬까 봐 돌아서 조심스레 웃는데, 이상하게도 졸라 행복했습니다.


무르팍에서 으드득 소리가 납니다.

허탕 친 낚시꾼의 뒤를 살금살금 따라갑니다.

한여름의 태양이 신나게 따라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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