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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 잡힌 날.

by 김석철
묻고 따블로 가!




"야, 야! 판 펴, 판 펴!"
윤 사장이 떴다는 소식에 후다닥 접었던 화투판을 다시 펼치느라 분주해졌다. 일찌감치 일당 다 털리고 개평 기웃거리던 장 씨의 얼굴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개털 된 장 씨뿐만 아니다. 누구 먼저랄 것 없이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잡고 언제 그랬냐는 듯 패를 돌리기 시작했다. 호구로 들어오는 호구를 기다리는 승냥이 떼들의 입가에 침이 고였다.

윤 사장의 돈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다. 승률 3할도 채 못 미치는 동네북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잃기만 하는 7할보다는, 어쩌다 끗발이 미쳐 요행히 따는 날인 3할만 기억하는 속 편한 뇌의 소유자다. 이른바, 흑우다.
얼마 전에도 도박 문제로 집사람과 이혼을 하네마네 크게 한판이 붙었다. 지문이 닳을 정도로 싹싹 빌어 집행유예가 되긴했지만, 역시, 낚시꾼 구라와 노름꾼 입발림은 당췌 믿을바가 못된다. 공사 대금 받은 돈을 홀랑홀랑 털어먹은 것도 부족해 고리의 사채까지 끌어 쓴 게 뽀록이 나버렸다.
그간 공사 대금으로 돌려 막기를 해가며 용케 잘 버텼지만 경기가 침체되면서 돈줄이 마를 대로 말라버려 사체 업자들이 집요한 실력 행사에 나선 것이다.
호구 윤 사장은 거미줄에 휘감긴 나방 꼴이 되고 말았다. 본인만 몰랐던 예견된 파국이었다.

윤 사장을 안지는 꽤나 오래되었다. 공사 의뢰를 몇 차례 받기는 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부도수표 같은 소문난 노름꾼과는 업무 관련으로 엮이는 자체가 싫어 늘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김 사장님, 만원 빵 한판, 오케이?"
자장면을 기다리는 막간이라 내기 바둑을 피할 마땅한 핑곗거리가 없었다. 2점 접바둑 정도의 기력 차이는 대수롭지 않지만, 이 친구와의 게임은 피곤하기 짝이 없어 웬만하면 승부를 피해왔다. 져서 좋을 일이야 없지만, 이기고 나면 뒷감당에 골치 꽤나 아파지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패배를 곱게 인정하지를 않고 추잡스레 물고 흔든다. 만 원을 꼴았으니 이 만원 빵으로 한 판 더 하쟎다. 이 만원은 사만 원... 이길 때까지 동치기를 하자고 들이댈게 뻔하다. 거덜을 내버릴 수도 있지만, 웃자고 시작한 일을 죽자고 덤벼들 수는 없으니 못 이기는 척 발을 뺀다. 판돈이 문제가 아니라, 지고는 견디지 못하는 도를 넘는 승부욕이 윤 사장을 노름판에서 허우적이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인 듯했다.
재미로 두는 투석전 한 판에서도 이런 식이니, 남의 돈 빼먹을 거라고 눈이 뒤집힌 이전투구의 노름판이야 오죽할까. 자신의 턱없이 부족한 실력은 헤아리지 못하고 저돌적으로 들이대기만 하니 결국 호구 중의 호구, 이 사단까지 오고 말았다.
"그래도, 누구 맹키로 계집질하는 것보다는, 노름하는기 더 낫지!"
버럭 내지른 말을 끝으로 윤 사장은 종적을 감추었다.


양손에 두루마리 휴지랑 큼지막한 선물을 한 꾸러미씩 안은 지긋한 나이의 여인네들이 우루루 몰려나왔다. 함박꽃이 핀 얼굴이 겨울의 한 복판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화사했다. 활기찬 모습으로 인사를 나누는 뒤편으로 선생님이라 불리는 말쑥한 차림의 중년 남성 서넛이 연신 엄마, 엄마를 부르며 살갑게 머리를 주억거렸다.

신호대기 중에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젊은이는 전국에 엄마가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어머니라고 불리는 '호구'들은,

늘그막의 외로움을 돈으로 바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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