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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똥'이다.

by 김석철





나는 타인과의 대화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편이다. 늘 30% 정도만 진실이라고 인정하면서 듣는다. 맞장구도 치고 크게 감탄사도 넣지만 그건 관계를 위한 양념일 뿐이지 일단 진의에 대해서는 의심부터 한다.

사람을 대하는 몸에 밴 자기 보호 본능인지, 부처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내가 쏟아내는 말 자체가 허세와 구라가 심해서 남들도 그럴 거라고 믿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줒어 담을 수 없는 설화로 숫한 곤경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경박한 세치 혓바닥만큼은 내 의지나 통제에서 거리가 한참이나 멀다.

두루두루 무던하게 남들과 잘 섞이는 사람이 내 어머니다. 적어도 남들에게 눈총을 받거나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고스톱과 막걸리가 한몫을 하기는 했겠지만, 이 여사의 치맛폭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시장통을 거닐다 보면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꾸벅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다. 놀라운 사실은 또래의 어르신들만이 아니라 새파랗게 젊은 조카 뻘의 친구들도 왕왕 보인다는 점이었다.

명절날 밥상머리에서, 이 여사 그는 과연 누구인가를 파헤치는 가족 간의 열띤 토론이 있었다. 씰데없는 짓 한다며 핀잔을 늘어놓던 이 여사도 행여 자기 욕이라도 하는가 싶었는지, 능청을 떨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면 귀 하나는 기가 막히게 밝아진다.


이 여사는 직계 가족, 그리고 피 다른 가족인 며느리를 빼고는, 절대 남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식들에게는 쎄 빠질 놈, 웬쑤 같은 새끼들이란 저주를 입에 달고 살지만 며느리들에게만큼은 뒤에서 꿍시렁거리지 앞에서는 정작 찍소리 한마디 못한다.

너그들 알아서 해라면서도 영 못 미더워서 똥 밟은 사람처럼 혼자서 종일 구시렁댄다거나, 권력을 박탈당한 아들들에게 뒷담화를 쏟아내며 은근히 복수를 종용한다. 보복은 무슨, 아들들도 제 코가 석자 설설 기는 판에.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바깥에서 있었던 일을 가지고 들어오는 경우도 없었고, 남에게 내 새끼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일도 없었다.

물에 물 탄 듯 튀지 않게.

잘했니 못했니 오지랖 떨지 않고 막걸리만 열심히 마시기.

이 여사가 평생 살아온 모습이다.


얼마 전에, 우리끼리의 비밀이란 굳은 맹서를 믿고 경솔하게 혓바닥 놀렸다 몇날며칠을 맘고생 무지 한 사건이 있었다. 어차피 정황상 다 알려질 일이었다고 면죄부를 주지만, 나비 날갯짓 하나가 어떤 곳에서는 태풍이 되는 것처럼 말의 속성이 딱 이와 같아서 천리를 날아갔던 말이 걷잡을 수 없이 살이 붙은 채로 부메랑이 되어 사지를 찔러댔다.

이 여사의 핏줄을 타고났는데, 내 주댕이는 어쩌자고 왜 늘 요 모양 요 꼴인지 모르겠다.

혀 밑에 도끼 들었다고 모든 화의 근원은 뼈 없는 혓바닥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자고로 곰은 쓸게 때문에 죽고, 사람은 혓바닥 때문에 죽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고 과묵이 마냥 좋은 거냐?

그럴 리가 없다.


다니엘의 아버지는 모범 가장의 교과서 같은 사람이었다. 걸어서 오분 거리에 위치한 곳에서 명찰사를 운영하는 독실한 종교인의 한 명인 형님은 땡 하면 집, 눈 뜨면 출근. 목소리 한번 높이는 경우가 없고 말도 묻는 말에나 겨우 대꾸를 할까 하여간 소금 안 친 밍밍한 배추김치 같은 무색무취한 사람이었다.

"대름, 아무래도 애 아버지랑 갈라서야겠어요."

깜짝 놀랐다. 농으로 가볍게 넘길 얘기도 아닐뿐더러 형수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25여 년을 살면서 그 흔한 부부싸움이나 언성 한번 담을 넘은 적 없는 모범가정으로 소문이 파다하게 난 집안에서 느닷없는 이혼이라니. 절친으로 오랜 세월 친형처럼 지내오면서 집안의 숟가락까지 낱낱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별안간 밑도 끝도 없는 이혼이라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나무 작대기랑 살면 살았지... 사는 게 너무 무료하고 숨이 막혀요. 대름이 애 아빠 잘 알잖아요?"

한편으론 이 형수가 사는 게 만만하니 배가 불렀나, 애살맞은 교회 오빠야라도 생겼나 싶다가도 또 한편으론 형님 스타일상 충분히 그럴 것도 같아 답답한 세월이 공감이 되기도 했다. 형님 입장에서야 날벼락이지만 형수는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누가 오는지 가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눈만 껌뻑이며 온종일 한마디 입을 떼는 경우가 없으니 유령인간이나 진배없는 형이 아닌가. 말이 워낙 없으니 도무지 꿍심을 알 수도 없고, 염화미소 뒤에 칼을 숨겼는지 알 길도 없었다. 입 댈 게 없으니 형수도 입을 닫고, 형님이야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집안은 평화라는 이름의 적막강산이었다.


그에 비한다면 늘상 매를 버는 친구가 마나님에게 일방적으로 바가지 긁히는 걸 가만히 지켜보면 측은하기는 하지만 참으로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겨서 정겹다.

웬만하면 잔소리 듣는 게 이골이 나서 더러워서라도 싫다는 짓을 피할 텐데 사람 좋아하는 진국 같은 이 친구는 마눌, 그래 암만 씨부리 봐라 기차는 오늘도 달리지. 눈도 끔뻑 안 한다. 말이나 따나 미안하다, 담부터 조심할게 하면 끝낼 일을 일언반구 대꾸도 안 한다. 곁에서 눈치만 살피는 내가 봐도 뿔 난 마누라 염장을 질러대는 꼴이 가관이다.

"마이 무따 아이가, 고마 해라."

야시 하고는 살아도 곰 하고는 못 산다.

속에서 천불이 나서 머끄댕이 다 쥐어뜯어버리고 싶다. 내 친구 부인은 늘상 이러고 산다. 혼자만 죽일 년 되는 거다.

"뭐라고 말 좀 해봐라, 이 화상아!"


침묵은 금이라고?

친구 집사람에게 머끄댕이 다 뽑힐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거다.

아무래도 내 경박한 세치 혀 때문에 사람 하나를 잃은 듯싶다. 입단속을 다짐하지만, 작심오분이나 되려나.


내게 되지도 않는 침묵은, 그야말로 '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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