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장을 포함 한 전 간부가 갓 전입해 온 아리잠직한 병아리 이등병 한 명 때문에 난리가 났다.
25년 짬의 구렁이 인사계도 이런 사태는 처음이라고 연신 머리를 긁어대며, 우짜지, 우짜지만 연발했다.
중대장은 면담이란 명분으로 회유, 설득과 협박을 하고, 인사계와 중사인 나는 복무규정을 뒤지느라 법석을 떨었다.
본인은 제 칠 일 안식교 신도라서 토요일은 안식일이라 '절대' 출근을 할 수 없다며 요지부동으로 버텼다.
여호와증인의 경우, 살상 무기를 들 수 없다는 이유로 집총을 거부하고, 우상 숭배에 관한 교리에 의해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 등으로 자발적 전과를 달고 교도소에서 대체 복무라도 하는데, 제 칠 일 안식교의 경우는 뾰족한 대책이 서지도 않고 사례가 없어 참으로 난감했다.
대대 본부나 사단 사령부에서도 시원한 지침은 내려오지 않았고, 적용할 부러지는 복무규정도 찾아내지 못했다.
"얌마! 군인이 니 뜻대로 복무를 하겠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럼, 토욜은 절대 안 되니까, 토욜 대신 일요일 출근해서 복무일 채우겠습니다."
팽팽한 기싸움은 어느 한쪽도 물서 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군대가 니 맘대로 오갈 수 있는 데냐? 일욜 혼자 출근해서 도대체 뭐 할 건데!"
반나절을 회유하던 중대장 최대위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너 이 새끼! 니 맘대로 해봐라!"
"인사계요, 이 새끼 토요일 무단 결근하면, 탈영으로 처리하고, 군법에 회부시키소!"
"중대장님, 그렇다고 탈영으로 처리하는 건 좀..."
"인사계까지 내 말이 우습습니까?"
애먼 데 불똥이 뛸까 집결한 간부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그저 최대위의 화가 누그러지기만 기다리는 도리 밖에 없었다. 종교적 신념 하나로 흔들림 없이 버티고 선 신참내기 이등병을 굴복시키는 것은 어차피 물 건너간 듯싶었다.
갓 전입 온 방위병 이등병은 결국 서슬 퍼런 중대장 최 대위를 꺾었다.
죽음도 불사 하겠다는 결연한 신념 앞에서는 상관의 명령이나 외부적 압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명령 불복종으로 삼 일간의 자체 군기교육 처분이 내려졌다. 이등병의 의지대로 토요일과 일요일을 맞바꾸는 조건으로 말이다.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는가?
노구임에도 그는 그 어떤 젊은이들보다 열정적으로 피켓을 들고 사거리를 지켰다. 경이로운 열정과 신념은 지지자들에게는 강력한 구심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가 꿈꾸는 세상, 남기고 싶은 역사는 무엇인지는 묻지 않았다. 광장, 사거리에서 버티고 선 몸짓 하나하나가 묵직한 외침을 대신했다.
누군가가 말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 나이에 대체 어디서 저런 열정이 나오는 걸까요?"
순간 다혈질의 중대장 앞에 마주 선 이등병이 겹쳐 보였던 까닭은 기우였을까?
나는 꿈의 월드컵에서 안정환의 반지 키스보다 대한민국이 붉은색의 악마가 되어 열광하던 날에도 최루탄 가스로 경기가 일시 중지 되었던 기억이 더 또렷한 사람이다.
전 세계가 정말로 지름 22cm의 둥근 공에 미친 듯이 몰려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경남대학교 사거리 대로에 갇힌 새 스타렉스 차량 위로 붉은 티셔츠의 젊은이가 마치 쟌다르크처럼 뛰어올랐고, 방방 뛰었고, 개미떼 같은 응원군들이 일시에 내지르는 환호성을 들었고, 차 안에서 사색이 된 좌불안석의 또 다른 젊은 얼굴을 똑똑히 기억한다. 스타렉스의 지붕은 사정없이 짜부려들었고 그럴수록 환호는 광기로, 군중은 미친 듯이 얼싸안고 차를 마구 흔들며 열광했다. 붉은 시월 혁명의 밤이 그랬을까? 내 눈의 군중은 거대한 붉은 악마가 아닌, 그냥 악마 그 자체였을 뿐이다.
신념에 방향을 잃거나, 애초 그 방향 설정이 어긋났다면. 두려웠다.
스타렉스 지붕 위에 올라서 연호하던 젊은 친구는 들라크루아가 그려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쟌다르크였을까, 술집에서 위대한 게르만 민족을 외쳤던 아돌프 히틀러였을까. 누군들 어떨까.
그 광란의 밤.
스타렉스 안에 갇힌 젊은이의 표정에서 25시의 앤서니 퀸이 마지막으로 보였던 말할 수 없는 모호한 표정이 겹쳐 보였다.
굳은 신념, 뜨거운 열정.
부러우면서 두렵다.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나의 진짜 두려움은 방향성에 있다. 수시로 방향을 수정했고, 늘 오류 투성이었다.
취지와 방향은 옳았으나, 나아가는 방향은 내 생각과는 딴판으로 흘러가기 일쑤였다.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 이등병이 마냥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왜,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위해서... 질문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