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구름 걷힌 청명한 가을 날씨, 오늘의 목가적인 여유로움에는 따사로운 햇살과 산들바람, 그리고 하늘거리는 꽃들이 한 장의 스케치북 속에 모조리 담긴 날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늘빛과 꼭 닮은 눈을 가진 하양이와 이쁜노랑이, 착한 용이가 그 속에 어우러져 있으니 구도가 더없이 완벽합니다.
갈바람이 끊임없이 나뭇잎이랑 꽃가지들을 희롱하면서 머물러 있습니다. 하늘거림이 마치 오랜 연인의 입맞춤을 기다린 여인네 같습니다.
내게도 바람이 추파를 던집니다.
햇살과 바람이 해사하게 안겨들어 낫을 든 가을 들판의 농부를 자꾸만 훼방하지만 괜찮습니다. 게으른 농부인 돌쇠아재의 쉼표가 있는 풍경에는 꼭 오늘만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요. 까짓,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되는 거고, 인생 뭐 그리 급할 거 있나요?
호미를 든 손으로 커피잔이 옮겨집니다.
반쯤 식은 미지근한 커피가 이 날씨에는 딱입니다.
뜨거움과 차가움의 딱 중간, 흔히 '어중간'이라고 합디다. 사람으로 치면 어중잽이라고 하죠.
오늘이 바로 여름과 겨울의 한가운데 껴버린 완벽히 어중간한 날인 겁니다.
아차.
이런 날에 하필 김동규의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빠뜨릴 뻔하다니요. 새들의 지저귐이 아니었으면 이 멋드러진 날에 이런 멋진 노래를 깜빡했을 겁니다.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가끔 두려워져
지난밤 꿈처럼
사라질까 기도해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테니까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 김동규,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가사)
얼마 전에 당근에서 오만 원으로 산 음량 빵빵한 스피커가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마구마구 던져댑니다.
눈부시게 청명한 하늘과 햇살의 따사로움, 산들거리는 갈바람과 은빛 억새의 하늘거림, 적당히 식은 커피..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가을은 천천히 익어갑니다.
이제서야 돌쇠아재의 들판은 쉼표 속으로 퐁당 빠져 듭니다. 퐁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