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이와 하양이가 천방지축으로 와다다 쫓아다니더니 온몸에 치렁치렁 뭔가를 잔뜩 달고 들어왔다. 도깨비바늘풀이었다.
무너진 마지노선,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서 백기 투항을 하고 말았다. 쌍심지를 켜고 철통 같은 방어망을 구축했건만 무너지는 데는 한순간이었다. 게으른 농꾼의 방심과 불청객의 만행에 더해져 방어 체계의 혼란이 복합적으로 야기한 패배였다.
일차 방어선은 진즉에 무너졌다. 초토화된 진지에서는 점령군들의 오만방자한 승전가가 하늘을 찔렀고 곧 닥칠 파상공세를 예고했다. 몇 년간 간헐적으로 척후병이 잠입을 시도했지만 요새는 조그만 빈틈도 허용하지 않았었다. 초병의 눈초리는 불철주야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작년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연합 동맹을 결성한 적들은 걸핏하면 철책을 넘어 들었고 경계근무 진도개 2의 상황을 유지하기에는 사태가 심각해졌다.
언덕 아래 할망구의 시도 때도 없는 마실이 문제였다. 할망구의 동선에 따라 장사진을 이루며 머리를 쳐든 분대급 도꼬마리가 급작스럽게 병력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내부의 간자였던 고양이들이 적과 내통을 하고 도깨비바늘풀을 진지 깊숙이 매복을 시켰다.
비상근무 태세 데프콘 2 발령.
아차차! 잊고 있었다.
작전권, 전시작전권이 내 손아귀에 없는 허수아비, 꼭두각시, 똘만이 주제에 갑호 비상령에 데프콘1 상황이면 뭐 하겠나. 니미럴, 아무 권한도 없는데. 개뿔이나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괜히 밭뙈기 사용권을 이양했다가 적의 전면적인 파상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발만 동동 굴러야 하는 당나라 군대 꼴이 나고 말았다. 1,200평의 밭주인인 내가 고작 180평에 대한 경작권리를 넘겨줬다 낭패를 당하게 생긴 것이다. 내 땅, 내 주권에 대한 주체적인 대응 수단이 없이 먼 나라 이웃에 불과한 동생 녀석들 눈치나 살피면서 읍소를 해야 할 판이니 주객이 전도돼도 한참이나 전도되어 버렸다.
노인회 회장인 할망구는 동네 서열 1위 이장을 빼고는 권력의 실세 중의 실세다. 한소리 흘리고 다니면 새우 등 터지는 건 단지 시간 문제, 눈치만 슬금슬금 살필 뿐 자칫 머리를 잘못 쳐들었다가는 온 동네방네 상종 못할 개차반한 역적 놈 신세가 되어 나락으로 떨어질게 뻔했다.
기생 웃음을 띠고 손바닥 지문이 닳도록 아첨해 가면서 그동안은 갑을 관계가 무색할 정도로 밀월을 함께 나눴다. 알량한 자존심이 밥 먹여주나, 간 쓸게 다 빼주더라도 쎈 놈 곁에 찰싹 들붙어 있어야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지. 적잖은 날들을 머리 팍 수그리고 박박 긴 덕분에 내 영역 '쉼표가 있는 풍경'은 치외법권 지역으로서의 시혜를 톡톡이 누릴 수 있었다.
상속권을 깔끔이 다 정리한 과부가 된 할망구의 잦아진 출두를 일차적으로 저지했어야 했다. 남는 게 시간뿐인 전임 노인회장의 죽은 권력이 은밀하게 달고 온 도꼬마리, 가막사리 군단이 드디어 총공세를 시작한 것이다. 할망구가 야금야금 무너뜨린 개구멍을 통해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던 적군동맹의 거침없는 진격 앞에 망연자실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한번 뚫린 방어선을 통해 하루 30센티미터 이상 파죽지세로 잠식해 들어오는 칡덩굴 전차군단 뒤를 이어 온갖 잡초들이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강아지풀, 명아주, 공포의 바랭이에 좀비 별동대 쇠비름까지 속속들이 합류를 했다. 철천지 원수인 도둑놈풀이라는 도깨비풀의 참전은 근근이 버티던 항전의 의지마저 잠재워버렸다.
언덕 아래의 밭을 빌린 동생들은 강력한 방어 무기인 글루포세이트, 땅에 떨어지면 용탈이 되어버리는 글루포시네이트 계열 할 것 없이 제초용 화생방 무기에 대해서는 넌더리를 떨었다. 농업의 혁명이란 게 말이 좋아 그렇지 결국 농약, 화학비료의 혁명과 같은 뜻이요, 화학비료, 농약, 농기구의 괄목할 발전이 없었더라면 지구상 현존 인류의 절반 이상은 굶어 죽었을 거라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도 정작 경작권만 있는 자기네 밭에서 만큼은 절대 살포불가를 천명했다.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어설픈 전략적 동맹은 상호불가침의 원칙하에 일체의 간섭을 허용치 않았다. 엄연히 내 소유의 내 땅에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토를 달지 말라고 강력한 경고를 날리니 졸지에 주객이 뒤바뀌고 만 셈이다.
적군이 암만 압도적인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와도 내게는 한 방에 진압할 믿을만한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 콧방귀를 뀌었다.
세치 앞을 몰랐다. 우리가 남이가, 부어라 마셔라 해낙낙하는 동안 안으로부터 곪고 있는 진짜 적을 간과해 버렸다. 숭숭 뚫린 어설픈 제휴동맹이 비장의 무기를 믿고 시시덕거리는 나의 발부리를 역으로 걸어버렸다. 무차별 비대칭 전략 무기인 엠씨피피, 글라신의 투하를 막아섰다. 할망구는 적들에게 빗장을 열어주었고, 믿었던 동맹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뒤꿈치를 물어버렸다. 독자의 전시작전권도 없는 무기력이 적나라하게 한계를 보인 전투였다.
도깨비바늘풀, 도꼬마리에 더해 가막사리 연합군의 가열찬 융단폭격에 제2방어선을 포기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배수의 진이다. 모 아니면 도의 길. 물러는 설 망정 지배는 당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잡초군단의 파죽지세를 누그러뜨린 건 지리한 협상이나 비굴한 항복 때문이 아니었다. 비록 작전퉁제권조차 남에게 넘겨줘버린 최소한의 배알도 상실한 비렁뱅이 신세이긴 하지만, 오천 년의 역사가 댓가없이 이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찬바람이 분다.
무명 삼배옷 입고 벌벌 떨어가면서 지켜온 논배미, 밭돼기다.
가막사리가, 도꼬마리가, 도둑놈풀이 맥없이 꺾인 자리에 또 한바탕 찬바람이 일어선다.
(역사는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