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모이 사전...2

by 김석철




압도적인 화력으로 무장한 군사력 못지않게 역사나 문화 같은 무형의 자산 역시 국력의 어마무시한 저력이 됨을 우리 대한민국이 역력히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초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지배는 당할 망정 곧 죽어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깡다구 하나로 당차게 버텨온 동방의 작은 나라가 전 세계를 향해 포효를 합니다.


쌍코피가 터지고 얻어터져 삭신이 골병이 들면서도 같이 죽자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래서 삼 세 판이란 승부도 생긴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떡대가 좋고 기세등등한 상대라도 초장부터 야코가 죽어 빌빌거린 적이 없습니다. 일단 맞짱부터 깝니다. 꿀벌오소리인가요? 그 무대뽀로 개기는 막가파 동물 있잖습니까. 밀림의 왕인 사자고 나발이고 저돌적으로 들이박아버리는.

암만 봐도 깜도 안 되는 놈인데, 툭 건들기도 전에 박박 기면서 머리 조아릴 줄 알았는데 웬걸?

왕이란 작자는 제 살 거라고 존심 다 팽개 치고 삼십육계를 놓는데도 힘도 빽도 없는 백성들이 죽창 들고일어나 오소리처럼 맹렬히 저항해 버리니 적들은 학을 땠을 겁니다. 그 유전자를 물려받은 현 국군의 전략도 아주 단순무식 그 자체입니다. 한마디로, 니 죽고 내 죽자는 전략입니다. 논개작전으로 같이 죽어보자는 데야 몸 사리지 않을 나라가 어딨겠습니까.

한판 졌다고 고분고분 인정을 절대 안 합니다. 재수가 없었다고 여깁니다. 두 판 째 지면 슬슬 오기가 생기고 하, 요것 봐라 이럽니다. 세 판을 지면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뒤끝은 작렬입니다.

'두고 보자!'


이순신 장군님이 명량해전에 나설 때 뭐라 그러셨습니까.

신에게 아직 열두 척이 남아있고, 아직 신이...

'아직'이라고 그러시지 않습니까.

단 한 명이 남아도 '아직', 그러면서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대단한 민족 아닙니까?

우리 민족의 자랑거리야 어디 한둘이겠습니까마는 나는 반박불가의 최고봉은 단연코 '우리말과 우리 글인 한글'이라고 확언합니다.

압도적인 어휘수는 가히 넘사벽입니다. 어휘수는 곧 표현력과 비례합니다. 국립국어원의 국민 개방형 사전인 '우리말샘'에는 현재 110만에 이르는 표제어가 등재되었습니다. '표준 국어대사전'에는 50만 자 가량 실렸는데, 대략 70만 자 안팎으로 보고 있습니다.

나는 하도 오래되어 너덜너덜해진 국어사전이랑 17만 단어의 두툼한 우리말 사전 둘을 곁에 두고 있습니다. 17만 단어가 실린 사전을 들추면 모르는 단어, 아리까리하거나 긴가민가한 낯선 단어가 수두룩 빽빽합니다.

이 나라에서 나서 이 년을 제하고 근 육십 년을 뿌리박고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말의 태반이 생소한 단어라는 게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영어 공부하는 백분의 일만 시간을 쪼갰으면 이렇게까지 낯 부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말 사전 정독을 올해의 으뜸 계획으로 잡은 겁니다. 예쁘고 앙증맞은 우리말을 얼마나 많이 만나게 될지 내심 기대가 큽니다.


우리글인 한글의 우수성이야 이루 말해 뭐 할까요.

창제의 목적과 창제자가 특정된 글자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한글 역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저력이 한글에는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저항하고 버티고 땀과 피를 쏟으며 지켜냈습니다. 관에서 주도한 것도 아닙니다.

목숨과 맞바꾼 글자, 우리의 한글입니다.


작년 말에 당근에 초중등교육용 4만 단어가 수록된 큼지막하면서 두툼한 우리말사전이 올라왔습니다. 알록달록한 삽화와 아기자기한 구성에 괜히 콩닥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행여 남이 낚아챌까 패내키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고작 4만 단어, 그것도 초중등 학생 교육용 사전 앞에서 또 다시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말모이 작전, 조선어학회 사건, 1957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큰사전이 편찬된 역사적 사실과, 훈민정음 창제일인 1월 15일이 북한의 한글 날인 반면, 우리 대한민국은 훈민정음 반포일일인 10월 9일을 한글 날로 기념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면서도 어이없게 초중등 초급 단어가 실린 우리말 사전의 단어는 몰랐던 겁니다. 주객이 한참이나 전도된 겁니다.


다행입니다.

'우리말샘'에 사장된 고어, 사투리, 방언, 신조어들이 속속들이 합류를 하고 있습니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들께 박수를 보냅니다.

우리말, 우리 혼을 지키고자 목숨을 걸었던 지사들이 한 자 한 자 떨리는 손으로 적어 내려 간 소중한 말모이들이 이제야 '우리말샘'으로 쉼을 찾아듭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