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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맨 김 씨의 눈물.

by 김석철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

우리의 마초맨인 김 씨가 한잔 거나하게 취했다는 소리다.
기분이 몹시 좋을 때는 월남에서 돌아온 씩씩한 김상사를 목터지게 찾아대고, 적당히 좋을 때는 어김없이 흥남부두에 눈발이 휘날린다. 취한 정도는 고성방가의 높이와 동네 개들의 요란한 짖음으로 쉽게 알 수 있다.
눈물이 미아리 고개를 깔딱깔딱 넘어가는 날은, 마눌과 애들은 죽은 듯이 자는 척하는 게 상책이다. 세상만사가 김 씨의 공적이 된 날이자, 누구 하나 된통 걸려라고 시빗거리를 만드는 날이다.
그러나, 초긍정 우리의 마초맨 김 씨의 입에서 미아리 고개를 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마초맨 김 씨는 당최 속내를 숨기는 경우가 없다. 화가 나면 상대, 장소 가리지 않고 버럭 대고, 기분이 고조되면 상갓집에서 조차 호방하게 웃어 젖히는 싸나이다. 심성이 이러니, 불편부당한 일에는 그야말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처럼 참지를 못한다.
속내를 잘 들키고 심성이 의외로 여린 구석이 있어 남의 말에 쉽게 휘둘리고 사기도 잘 당한다. 제 마누라 말은 죽어라고 안 듣지만...
그런 김 씨가 유일하게 깨갱하는 상대가 있다.
지독한 싸나이 가오병에 걸린 우리의 김 씨도 제 딸레미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바보천치가 되고 만다. 엄마, 마눌 마저 끝내 굴복시킨 마초맨이 넘지 못하는 유일한 여성인 셈이다.
여하튼, 마초맨 김 씨는 늘 요란하고 끊이지 않는 사건들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제 집 담벼락이 무너지고 서까래가 자빠져도 손가락 하나 꼼지락거리지 않으면서 돈 안 되는 남의 대소사에는 오지랖의 끝판왕으로 빙의한다. 돈 버는 일에는 잼병이어도 우리의 김 씨는 늘 행복한 사내였다.

눈물은 사나이의 수치라고 여기던 우리의 김 씨는 황급히 눈을 훔쳤다. 행여 누가 볼세라 딴청을 부렸지만, 무엇보다 놀란 건 정작 본인이었다.
내가 미쳤나? 이 무슨 주책이지?

마초맨 김 씨는 늙었다.
아니라고 스스로를 속이지만, 눈물만큼은 속이지를 못했다.
여태껏 잘 살아왔는데 뭔가 빠뜨린 게 있는지 자꾸만 여백이 생긴다. 처자를 위해 뼈 빠지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하숙생이 되어버린 듯한 공허가 울컥울컥 솟아오른다.
미아리 눈물 고개의 집창촌이 사라지고, 흥남부두에는 비가 오는지 눈발이 휘날리는지 알 길조차 없지만, 마초맨이 평생 넘던 인생고개는 아직도 중턱인데 많이 지치고 버겁기만 하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마초맨 김 씨가 막걸리병 흔들어가며 목청껏 불러 제치던 걸쭉한 가락이랑, 질세라 같이 왕왕거리던 황구의 댓구를 이 골목에서 들을 수 없다.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와 김 씨의 노래가 사라진 후미진 골목에, 또 누군가의 새로운 노랫소리가 채워질 것이다.
흥남부두가, 미아리 고개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지친 이 땅의 모든 김 씨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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