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석양의 마지막 흔적마저 다 지울 때까지 다섯 아이들은 언덕배기에 모여 서서 구부러진 샛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에구, 불쌍한 새끼들. 이 일을 우짜면 좋노..."
"엄마 장에 갔다 맛있는 거 사 올게. 혹시 엄마 늦으면 국 데워서 밥 챙겨 먹어, 알았지?"
돌아누운 엄마의 이부자리가 밤새도록 흔들렸다. 조그만 가방을 움켜 쥔 엄마는 동구 밖을 벗어나는 언덕을 넘어, 바짝 동여 맨 머리칼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엄마, 맛있는 거 마이 사온나."
다섯 살 막네 영순이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엄마를 따라 언덕을 쫓아갔다.
어제의 어제부터 다섯 아이는 깨금발로 언덕배기의 장승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누구도 니 엄마 도망갔다고, 그러니 기다리지 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열다섯 먹은 큰 아들 승구는 알고 있었다. 어른들이 쯧쯧거리며 애써 멀찌감시 돌아다니는 이유도, 깊은 골의 주름이 자글대는 돌담집 할매가, 쟈들 인자 우짜노, 우짜노를 입에 달고 있는지를.
승구 씨를 소개받은 날은 이른 추위가 칼날을 물고 온 십일 월의 어느 날이었다. 때 이른 한파는 가뜩이나 쪼그라든 사람들을 죄다 포장마차 안으로 밀어 넣으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사실 통성명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소음에 불과한 음악소리와 그에 질 새라 더 커다란 목소리들이 고함소리가 되어 비좁아터진 포장마차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낯 선 삼자가 끼이는 어색한 자리였다면 나오지 말았을걸 싶었지만, 두 사람도 예상치 못하고 우연히 같은 장소에서 만난 듯했다.
술자리 사연이야 그닥 달갑지는 않지만 들을 수밖에 없는 어정쩡한 자리에 앉혀지고 말았으니 도리가 없었다. 그저 권하지 않는 술잔만으로도 고마웠다.
"영순이 하고 내만 살아남았다."
내심 놀랐다. 자기 이야기를 마치 생판 모르는 남 말처럼 저리도 무심하게 툭 던질 수가 있다니... 합석한 뒤 처음으로 승구라는 또래의 사내를 곁눈질로 찬찬히 훔쳐보았다.
버려진 다섯 아이들을 두고 마을 어른들이 내린 결정은, 큰 아들 승구는 어느 정도 컸으니 읍내 자전거방 김사장에게 취직이라도 시켜서 보내고, 다섯, 여덟 살배기 여동생 둘은 먼 친척집으로, 열 살 난 남동생과 열세 살 먹은 바로 밑의 여동생은 각자 먼 읍내의 지인들에게 보내자고 합의가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막네 영순이와 여덟 살 여동생 둘은 친척집에 간다니까 뽈짝뽈짝 뛰며 깨방정을 떨면서 멀어졌다. 승구 씨와 밑의 여동생은 베개잇이 불도록 울었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밤새 돌아누운 채.
안 떨어지려는 여동생을 끝으로 다섯 명의 깨금발 아이들은 엄마가 넘었던 굽어진 고갯길을 따라 기약 없는 생이별을 당해야 했다.
승구 씨의 목소리는 한결 같이 무미건조했다. 억양도, 장단도 철저하게 무시된 메마른 어투였다. 자욱한 담배연기와 어둑한 조명이 승구 씨의 작은 눈을 숨긴 탓에 어떤 눈빛을 가졌는지 알 수는 없었다. 들릴 듯 말 듯 한 낮은 목소리와 말라터진 어투로 미뤄봐서는 감정도, 눈물도 오래전에 다 고갈된 듯했다.
"찾을만하니까 다 죽었더라, 다. 영순이?그래, 영순이는 어찌어찌 살아남았지."
살아남은 자의 죽어버린 영혼을 마주하고 있다는 싸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 앞으로 우짤 긴데?"
반쯤 비워진 소주잔을 채우며 친구가 물었다.
"우짜기는...그냥 사는 기지. 살다 보면 다 살아진다."
왜소한 체구의 승구 씨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은 째 어깨너머로 손만 쓰윽 흔들고는 사라져 갔다.
짧은 만남, 긴 긴 여운을 남겨두고 승구 씨는 비척거리며 어둠이 쏟아지는 회색의 거리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래도, 인생, 살만하잖아?"
승구 씨가 던져놓고 간 독백이 내 기억 속으로 헤집고 들어 온 날은, 유난히 혹독한 한파가 빨리 찾아온 11윌의 어느 날이었다.
"그래도, 인생, 살만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