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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게는 옆으로 걷는다.

by 김석철


어머니는 한사코 밀게라고 우기신다.

사전에도 없는 이름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드려도 일언반구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학교를 마치고 부리나케 달려가 안긴 마산의 앞바다에는 갈대를 아우른 갯벌이 더 넓게 펼쳐져 있었다.

무수한 생명을 보듬고 삶의 터전으로 내어준 갯벌에는 민물장어, 재첩, 꼬시래기와 두 팔을 쳐들고 연신 까불대는 '밀게'가 지천이었다. 특히, 갯벌에서 방정을 떨어대는 밀게는, 우리 가족에게는 단순한 게가 아니라, 허구헌날 달고 산 꽁보리밥의 보리쌀이었고, 수제비의 밀가루였다.


생계의 절박함은 열두어 살에 불과 한 어린 꼬맹이 마저 악다구니를 물게 만들었다. 홀라당 벗고서 물 빠진 갯벌 위를 배로 밀고 다니면서 숨어버린 밀게의 구멍으로 잽싸게 손을 밀어 넣는다. 누가 더 절박하며 재빠르냐로 생사를 건 승부는 결정이 났다. 팔이 짧으니 아무리 날쌔게 게구멍을 덮쳐도 어깨가 묻힐 정도의 깊이라야 꽁꽁 숨어든 밀게를 집어낼 수 있었다. 뙤약볕 아래서 무방비로 뽈뽈 기어 다니다 보면 등짝에서는 화덕에 올려진 생선이 풍기는 냄새가 났다. 반쯤 벗겨진 허물 위로 사정없이 쏘아대는 햇살과 쓰라림이 갯벌 위의 소년을 말리지는 못했다. 얌전히 끌려 나올 리가 없는 밀게는 같이 죽자는 듯이 큼지막한 집게발로 어린 손을 드세게 깨물었다. 살점을 베는 듯한 고통에 악 소리가 터졌지만 야무지게 움켜쥔 손을 펼 수는 없었다. 깊은 굴 속에서는 죽느냐 사느냐를 두고 손과 발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뒤엉켰다.


새벽녘이면 어머니는 기척도 없이 선홍빛 대야에 가득 든 밀게를 머리에 이고 어시장으로 나갔다.

한 날은 국민학교 5.6학년쯤 되었을 형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생뚱맞게도 댓바람에 어머니를 따라나섰다가 찔찔 울면서 돌아왔다.

사달이 나긴 났는데, 어머니의 묘한 표정으로 봐서는 오롯이 형의 땡깡 탓만이 아닌 게 분명했다.

낮에 뻘밭을 기면서 애터지게 잡았던 피 같은 밀게를 손님들이 인심 좀 더 쓰라며 덤으로 양손 그들먹하게 집어갔던 모양이었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아깝고 분했을까. 형은 방에서, 어머니는 팔려나간 밀게의 빈자리에서 한동안 서있었다.


구공탄 아궁이가 있는 손바닥만 한 정지에는 거품을 물어대는 밀게 무리가, 그보다는 조금 더 큰 단칸방에는 다섯의 인간이 서로 영역을 나누어 차지했다.

정지에 임시 터를 잡은 게떼들은 밤새 뽀글거리며 뭉근하게 재잘거렸지만, 어차피 인간 무리가 눈도 뜨기 전에 사라질 보리쌀들이라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보리쌀게들과의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꼭두새벽 장을 나서던 어머니의 자지러지는 비명에 놀라 잠이 깬 어린것들은 영문도 모른 채 눈만 끔뻑였다.

정지가 비록 밀게들의 구역이라고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정지 구석탱이의 대야 안쪽만이 확정된 그들의 영역이었다. 밤새 거품을 게어내며 작당질을 하더니, 기어코 대야를 타고 넘어 죄다 탈출을 하고만 것이다. 게판. 그렇다, 그야말로 완벽한 게판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의 황망은 팝콘처럼 터져나간 밀게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비새끼 마냥 애미의 입만 바라보고 있을 당신의 어린것들이 눈에 밟혔을 것이다. 보리쌀들이 벽으로 바닥으로 미친 듯이 달아나고 있었다.


새벽의 어머니는 새끼들 밥 줄이 달려있는 '밀게'를 잡으려고 뻘밭이 아닌, 좁아터진 구공탄 부엌에서 기어 다니고 있었다.


어머니는 밀게 처럼,

옆으로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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