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주무시고 있었다.
코까지 고롱거리며 작은 몸통을 돌돌 말은 채 자는 것을 굳이 기어가서 확인을 했었다.
"테레비를 와 끄노."
귀신같이 알고 눈을 뜬 엄니의 입에서 끄응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더마는? 보지도 안 하는 테레비는 와 켜놓노?"
"야가 머카노? 안 보기는 누가 안 바!"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혼자 떠들어대는 티브이를 누군가는 뜯어말려야 할 텐데, 엄니는 절대 그러지를 못한다. 차라리 예전처럼 길이 보전하세가 끝을 맺고 제풀에 시꺼멓게 죽어버린 화면에서 지직대는 거추장스러운 소음이 되려 정겹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채널은 긴긴 세월 엄니를 질리게 만든 불면의 밤을 잊게 했다.
이모가 세상과 작별했던 새벽, 딱지만 한 각진 방 안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었다. 자는 듯 떠난 이를 사이에 두고 깔깔대는 테레비와 미친 듯이 통곡하는 어머니의 기묘한 공명이 불협화음 속에서 닮은듯 어울렸다.
이모의 유일한 벗인 테레비는 이별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속하게 웃어댔고, 자나깨나 불쌍한 울 언니 노래를 하던 여인은 섧게 울었다.
동은 하얗게 뜨고, 어떤 여인은 울다 지쳐 끅끅대고, 야박했던 티브이는 꼴랑 빨랫비누 몇 장에 몸을 팔고는 이모와 함께 긴 여정을 끝냈다.
이모의 잠 못 드는 밤들과 평생을 동행했던 티브이는 한 줌의 새하얀 눈송이로 훨훨 날아오른 이모를 마지막까지 부리나케 뒤따랐다. 울고 있는 여인을 뒤로한 채 여전히 깔깔거리면서 안녕을 고했다.
어딜가나 한 뼘 안에서 맴돌며 함께 서러움을 견디던 유일한 혈육 언니가 떠나고 이어 자식 놈들도 이모의 낡아빠진 테레비처럼 떠나갔다.
잔상만 잔뜩 남은 빈자리로 또 다른 테레비가 닫혀가는 말문을 비집고 슬금슬금 들어 왔다. 엄니의 방문이 열리는 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그날의 무정했던 티브이는 시치미를 뚝 잡아떼고서 때로는 도도한 재벌집 사모님으로, 혹은 줒어 온 콩쥐 마냥 갖은 구박을 당하면서도 할 말은 다하는 당찬 며느리가 되어 엄니 곁으로 찰싹 엉겨 붙었다.
엄니가 테레비 속의 세상으로 주소를 옮겨간지는 꽤나 오래되었다.
엄니의 방은 언제부터인가 현실과 환상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엉켰고 점차 혼자가 되어갔다. 품 속의 자식들이 멀리 멀리로 엄니의 곁을 하나둘씩 떠날 때마다 현실이 아니라 주말 드라마의 한 장면 일거라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도망을 쳤다.
"애비야, 세상이 참 무섭제. 인간들이 우짜면 저리도 독할 수 있겠노."
"아따, 우리 이 여사. 또 또 드라마하고 대화하신다. 도대체 옴마는 저 드라마 몇 번이나 보노?외와도 볼써 다 외웠겄따."
"야 야, 저기 벼랑빡에 머시라 적혔는지 퍼뜩 좀 봐봐라"
갑자기 생각난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모로 삐딱하게 누워있던 몸을 곧추세우며 한 호흡으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오데, 오데다 적어놨는데?"
" 불 키는데 밑에 적힌 거 안 보이나. 야가, 눈깔이 삤나?"
7, 15. 8, 30. 9,30. 10, 20....
삐뚤빼뚤, 벽지 위에 휘갈기듯 두서없이 적어둔 깨알 같은 숫자들이 보였다. 얼마나 눌러썼는지 시꺼먼 싸인펜 글자는 통통하게 옆으로 살이 붙어 있었다.
로또번호는 아닐 테고...
맥락 없는 숫자들의 나열, 엄니가 숫자 속에 감춘 게 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난수표 같은 번호들과 기대에 찬 엄니의 또랑 한 눈빛.
난수표 같은 일련의 숫자들은 엄니에게만 허락된 비밀의 문을 여는 번호였다.
송해 선생의 딩동댕 종소리에 미소 짓고, 최불암 선생을 따라나서 온갖 맛난 진미들을 맛본다. 테레비가 어머니를 들쳐업고 깊은 바닷속 고래와 함께 헤엄치고 히말라야 오지의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 준다. 뱅기도 타보고 춘향이와 이 몽룡이도 만나 봤다.
어머니가 계시는 텔레비젼 속 세계에서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거나 그리운 이들을 떠나보낼 일이 사라졌다.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이었다.
10, 20.
엠비씨가 엄니를 초대했다.
나는 간첩이 되어 어머니가 천사처럼 웃고 선 세상 속을 훔쳐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