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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by 김석철



F.R. david.




어제, 오늘 노가다꾼이 모처럼 이틀간 열심히 일 좀 했다고 시체처럼 뻗어 누웠다. 몸이란 게 여간 간사한 게 아니다. 며칠 기약 없이 쉬었더니 좀이 쑤시더만, 막상 시멘트 먼지 조금 마셨다고 대번에 티를 낸다. 일찌감치 눈이나 붙이자고 작정을 하고 동면 모드에 들어갔는데, 왠 걸, 이리저리 뒤척이다 애궂은 시간만 다 보내고 있다.

F.R. David의 'Words'가 F.M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온다.

잠은 물 건너간 듯 싶으다.
첫사랑의 소녀가 선곡해서 녹음 한 테이프 속에 담겨있던 노래, 'Words'는 내 첫사랑 소녀가 던져준 수줍은 사랑의 세레나데였다.
Words,
don't come say to me. How can I find a way to make you see
I love words don't come easy.
말하기가 어렵댄다. 사랑한다는 진심을 말하기가 어려워, 노래로 부른다는 가사 내용이다.
애써 붙잡으려 하지 않아도, 음악에 스며든 기억의 조각들은 언제나 '어제'로 머물러 있다.

창원의 모 병원에서 근무하던 누이에게 첫사랑이 날아들었다. 서울에서 실습 나온 의대생과 누이는 짧은 시간 폭죽처럼 서로를 태웠다.
형님의 어머님이 눈에 자갈이 들어가도 허락 못한다며 쌍심지를 켜고 사랑하는 이들을 막아섰다.
눈물의 나날로 매일매일 말라 죽어가던 누이에게 작은 소포가 도착 한 날, 누이는 거의 통곡을 하듯 큰소리로 울었다.
사랑하는 진애야로 시작된 형님의 녹음테이프는 거의 한 시간 동안, 직접 치는 기타에 맞춰 노랫말로 절절한 사랑의 시를 채워나갔다.
노래는 백만 마디 언어보다 강한 힘으로 영혼을 꿰뚫었다.
둘은 결혼을 하였다.

스물의 나이로 일찌감시 세상과 이별한 내 친구는 또래에 걸맞지 않게 장현의 '미련'이란 노래를 즐겨 불렀다.

내 마음이 가는 이 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갈 수 없는 먼 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하는 사람.

코스모스 길을 따라서

끝이 없이 생각할 때에

보고싶어 보고 싶어서

슬퍼지는 내 마음이여.


친구의 방에 턴테이블과 이퀄라이져가 세트로 달린 삐까번쩍한 전축이 들어온 날, 'ABBA'는 친구와 함께 기뻐하며 '워털루'를 신명 나게 쏟아냈었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아바'를 만났고, '아바'는 그리운 내 친구가 남기고 간 이별 선물이 되고 말았다. 장현의 '미련'은 친구들 모두에게 줘 버리고, 매몰차게 홀로 먼 길을 떠났다. 친구가 떠난 빈 공간에는 야속한 노랫말만 댕그렁이 남겨졌다.

밤이 깊어 간다.
'Words'를 선물해 준 첫사랑의 소녀, 'ABBA'를 알려 준 친구가 곁에 없는 이 밤이 얼마나 길어질는지 알 수는 없다.
헛헛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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