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하루 Apr 03. 2024

계좌번호 따위 없는 청첩장

모바일엔 넣어야 한다는 룰은 누가 만든 거죠?

벌이도 시간도 부족만 했던 시절. 나는 자발적 나홀로족이어야 했다. 이따금 사람들을 만났지만 딱 그때뿐. 하루하루 근근이 유지하며 버텨가다 보면 하나둘 결혼하는 지인들이 생겨나 부러웠다. 그래도 덕분에 예쁘게 치장하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기회가 되기도 하니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주시는 분들이지 않나 싶었다.


문제는 생전 연락이 없던 예전 인연으로부터 받은 모바일 청첩장이었는데 하나같이 계좌번호가 담겨 있었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인연이야 축하를 건네며 결혼식에 방문해 축의를 당연히 할 테지만 몇 년 간 연락조차 없던 이들에겐 뭐라고 답변해야 할지조차 몰라 어색하기만 했다. 솔직히 하객으로 초대하고 싶은 건지 그냥 돈만 받고 싶은 건지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청첩장의 본래 의미는 뭘까? 결혼한다 전하며 상대를 초청하는 초청장의 의미이지 않을까? 그런데 안 올 거면 돈이라도 주라 '친절'하게 계좌번호까지 박는 행태들을 보니 알 수 없는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래서였을까. 예비신랑(현재 남편)이 모바일 청첩장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계좌번호만큼은 뺐으면 좋겠다고 미리 말했다. 남편은 정말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관계들이면 괜찮은 거라고 요새는 간편한 방식들을 선호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좌번호라는 것 자체가 상대에게 돈을 요구하는 행위 같아 거부감이 들었다. 주변에 말은 안 하지만 결혼은커녕 연애마저도 힘든 사람 역시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과거의 내가 그랬다)


일에 치이고 하루하루 삶에 찌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시간 없으면 돈이라도 주라 계좌번호까지 건네는 형태가 과연 맞을까? 계속 만나오던 인연이라 할지라도 이게 정말 맞는 것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정말로 주고 싶다면 알아서 계좌번호를 물을 것이고 그렇게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만 주면 되는 것 아닌가 싶어지기도 했다. 남편에게 그렇게 말하니 다들 귀찮아할 거라면서도 내 의견에 동의해 주었다. 대신 부모님의 계좌만큼은 넣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렇게 우리의 모바일 청첩장은 계좌 따윈 없이 만들어졌다. 남편은 친구들에게 엄청난 질문세례를 받았다며 귀찮다 투덜댔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더 맞는 것 같다고, 그렇지 않냐고 되물었다. (나란 사람 참 피곤한 사람이다) 남편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며 결국엔 누구에게도 청첩장을 보내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을 인정해 주었다. 이런 날 안타깝게 바라보며 더 아껴주기까지 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이전 01화 누구에게도 청첩장을 주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