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있다가 정년퇴직하는거 말고, 언제든 퇴사해도 상관없는 능력을 가지기
나는 퇴사를 하려고 한다.
25세 대기업 입사 1년 4개월차, 아직까지 취업 성공의 자부심에 바지 끝자락이 촉촉하게 젖어있는 시기이지만 나는 퇴사를 하려고 마음먹게 되었다.
길고긴 취업시장에서 고생해서 벗어났더니 탕비실 커피찌꺼기를 비우는 업무나 시키길래 화가나서 홧김에 내일 당장 사표를 쓰고 도망쳐나오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맡은 업무는 흥미롭고, 나는 배우는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하는 과정은 나름대로 재미있다.
입사이래 야근을 한번도 한적이 없을정도로 업무는 과중하지 않으며, 우리팀은 일정 비율 재택근무를 필수로 하기에 업무환경도 우수하다.
팀원들의 업무는 회사가 생산하는 제품 판매에서 법적 규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있기에 대체불가능하고 팀의 미래는 밝다.
이러한 팀내에서 나는 학위와 이력을 인정해주시는 팀장님의 기대를 받고 입사한 막내 신입사원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퇴사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나는 그 유명한 MZ사원이라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30년뒤 정년퇴직을 앞두고(퇴직나이가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57세에도 이 책상에 앉아서 잡을 쏘고 있는(업무를 하는 행위의 은어이다) 내가 기대되냐고 물어보았을때,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팀은 끝이 둥근 타원형 큰테이블에 둘러앉아 매주 정기회의를 진행한다.
그 자리에는 열정적으로 보고하는 딸셋의 아버지 40대 파트장님도, 지난번 고과에서 억울하게 낮은 점수를 받고 약간은 권태해진 돌잡이 아빠 30대 저년차 연구원도, 약 1년전 모두에게 박수를 받고 팀장자리에서 내려와 현직으로 돌아온 자식둘을 모두 독립시킨 50대 고년차 연구원도, 그리고 아직은 아는것보다 습득해야할 것들이 많아 눈만 굴리는 막내, 나도 모두 섞여서 앉아 있다.
눈에 넣어도 안아픈 귀여운 아기들을 장성하게 키워내고, 물질적으로 부족함없이 예쁜옷과 따뜻한 음식을 먹여가면서도 주말엔 아이들과 갯벌체험을 함께 다니는 다정한 아빠가 되었을 그들이 너무나도 존경스럽지만, 막상 그러한 것들을 이룩하게 한 무대, 회사에서는 모두 똑같이 회색 회사점퍼를 걸치고 경영층이 지시한 업무를 매번, 매년, 30년 가까이 반복해오고 어쩌면 앞으로도 똑같은 일을 해갈 같은 직원일 뿐이다.
그들에게 회사는 안전한 울타리이자 국내에서 몇번째로 꼽는 연봉을 턱턱 꽂아주는 자랑스러운 내회사이지만, 회사는 이런 우수한 인재들을 유출시키 않으면서도 최대한 많은 이익을 낼수 있도록 경쟁기업과의 연봉을 맞추어서 상향선을 조정하고, 고과에 따라 옆자리 직원들과 월급 차이가 나는 바람에 화가 나서 이직하지 않도록 편차를 줄이도록 연봉제도를 매년 갱신하는 또하나의 '기업'일 뿐이다.
수천만 직원이 존재하는 회사의 구조와 매년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할 수 없는 산업구조를 생각하면 당연하다못해 지혜로운 경영을 통해 상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회사라지만, 온전히 내가 손을 놓으면 당장 멈추는 '내 일'로 받아들여지냐 할때 그렇지 않다. 막말로 옆자리 20년차 연구원님이 당장 내일 나가더라도, 팀원들은 내 담당으로 일이 늘어서 조금 고달파지겠지만- 회사는 아무런 지장도 변화도 없다.
어릴때 수많은 장래희망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머리가 좀 크고 나서 드는 생각은, 대체불가능한 사람이 되고싶다- 즉, 영향력이 큰 사람이 되고싶다였던것 같다. 집안 대가족이 모이면 나는 아직은 어른들의 약간의 부러움 섞인 칭찬과 사촌들의 시기질투를 조금 사는 좁디좁은 취업의 문을 통과한 조카(또는 사촌)일지 모르나 회사에서는 아직 1인분 하기엔 경력이 모자라는 신입일뿐이다.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 나만의 업무 방식이 쌓이고, 회사에서 좋아라하는 기막힌 프로젝트들을 척척 제안하며 승진도 턱턱 남들보다 빠르게 올라가는 유능한 선임이 될'수도' 있지만, 내가 지금껏 살아온 눈치로 나의 회사에서의 입지를 파악해본바로, 나는 그정도 될성부른 떡잎의 반짝이는 능력까지는 없다.
그래서 나는 '정년퇴직'이 아닌 '퇴사'를 하려고 한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가장 어려운 문턱인 입사는 해결했으니 앞으로 징계받을 수준의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우리회사에서 정년퇴직은 어렵지 않다. 사실 적당히 일하면서도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살겠다고 하면 너무나 좋은 업무 환경이다.
다만 가만히 앉아서 정년퇴직이 올때까지 기다리거나, 생각하지 않고 살다 눈뜨고보니 정년이더라-라는게 내 미래가 아니기를 바란다. 쏟아붓던 취업준비를 마친지 채 2년도 안되었지만 한가한 장래희망자리가 다시 생기를 되찾기를 바라고, 그를 위해 실패와 도전을 반복하는 젊은 날을 보내려한다.
회사밖으로 나간다고 내가 숨겨놓은 날개를 펼치고 훨훨 날아오를 기막힌 아이디어가 당장 있는가-하면 아니다. 지금부터 귀와 눈을 활짝 열고 열린마음으로 세상 많은것을 흡수해야한다. 어쩌면 한달에 한개씩 새로운 시도하기-와 같은 답없는 과제를 수행해야할수도 있다.
이 모든 머릿속 복잡한 생각의 변화 조차도 2차성징의 뚜렷한 증거처럼 느껴져서 설레인다.
물론 나는 존경하는 옆자리 선임님처럼, 까마득히 어린 신입사원이 어려워할때 눈치채고 잘되어가니하고 가볍게 질문을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음을 넌지시 알려주는 멘토도 되고싶다. 또 맡은업무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끈기있게 해내서 업무를 분배할때 관리자들이 염려하는 일이 없는 든든한 팀원이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은 내가 돋보이지 않아보여도, 마치 지수함수처럼 폭발적으로 성장해서 동기들에 비해 돋보이는 능력을 가진 차기 임원후보와 같은 엘리트연구원이 될지도 모른다.
이 또한 회사안팍으로 경험이 쌓이면서 뚜렷한 가치가 세워지면 어떤자리가 나에게 어울리는지를 알수있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장기를 찾기위해서 아등바등거리는 시간을 보내려는 나는 과연 10년뒤에는 어떤걸 해냈을까? 얼마나 변할까?
'뭔가'를 하고싶은데 '그게 뭔지' 모르는 세대들과- 공유하고 싶다. 지금 꼬인 실마냥 복잡한 머릿속인 그대는 아주 충만한 사람이다. 언젠가 거대한 작품을 만들만한 실의 양이 충분하다고. 이제부터 어떤 작품을 만들지 실을 하나씩 풀어가며 잘라내고, 다듬어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