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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현지 Aug 02. 2023

폭풍을 스케치하다

누군가 다급히 방문을 두드린다

안경알을 닦으며 의뢰인을 맞이하는 당신의 변호사

시가 안 꺼지지 않는 담배의 환한 불씨 안으로 컴컴한 사건들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폭풍의 눈

     

공사 대금을 받지 못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어 전전긍긍하는 인부의 손깍지가 미끄러진다

몰래카메라로 숨죽이며 고통받는 여자의 멍한 시선과

건물이 무너져 긴장하는 교직원의 불안 섞인 한숨과

갑작스럽게 빈티지 샵을 정리해야 하는 임차인의 눈물은

폭풍의 눈, 속에서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 시각, 백화점 별관 미술관 한편에는 작가 킴의 그림이 걸린다

파프리카의 잘린 단면

셀 수 없는 씨앗들 줄지어 늘어서 있다

껍질 속 붉은 알맹이는 적나라하고 구체적이다

      

걷는다, 안개를 걷으며 물길을 따라서

가끔 죽은 새들의 날개와 목 잘린 자라들이 울컥울컥 밀려들어 오는 풍경, 사건의 지점에서

중식당 이른 저녁으로 가장 쉽게 넘기기 쉬운 볶음밥을 먹으며 

변호사는 불 꺼진 사건, 현장의 스위치를 누른다

     

양팔을 벌려 인간저울이 되어 서보는 당신의 변호사

      

불이 켜지자, 포식자인 새들을 피해 나무껍질 위에 붙은 매미들 

일제히 가장 먼 곳에서부터 숨을 죽인다     

그 반대편, 나는 쿠키를 부러뜨리며 이 장면, 폭풍의 언덕을 스케치한다

펜을 들고 인간저울의 밀도를 가늠해본다

      

건물 경비원은 쉽게 퇴근하지 않는 변호사를 향해 오늘도 마감이 늦겠다며 불만 섞인 중얼거림을 계속하고 

가죽 소파 테두리에 불안정하게 찢긴 일상의 구멍들

탁상엔 시가 위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사이

반쪽만 남은 의뢰인의 얼굴들, 잠시만 나타났다, 사라진다

     

멈춘 자명종과 예리한 만년필의 칼날만이 당신의 사건을 향해 방향을 가리킨다

      

당신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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