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현지 Aug 02. 2023

신체 인식 데스크 앞에 서 있습니다

광장 한복판, 사과는 군데군데 놓여 있습니다 

제 몸보다 큰 사과에 뺨을 비비는 사과들 

사과를 장식처럼 또는 장식 삼아 사과 뒤에 숨는 사과들 

마스크를 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사과들 

눈으로 사과의 표정을 읽지만, 여전히 입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과는 이제 이 외투를 벗어야겠습니다 


어제의 꿈은 식물이었습니다 

부캐가 된 손 다발들이 

신체 인식 데스크 앞에 서 있습니다 

고개를 뒤로 젖혀 사과꽃 향기를 맡습니다 

이 장면은 얼음, 땡 하면 사라지는 놀이일까요 

사과는 되돌아올 수 있다는 어떠한 믿음이나 무모함을 청바지 안, 권총으로 장전하고

안과 밖의 세계를 맴돌며 들판에 서 있습니다 


컴컴한 거미 숲을 헤집고 들어섭니다 

나뭇가지 사이 아득하게 매달린 손잡이들 

한 손에는 채집한 입 모양들이 있습니다 


사과를 닮은 아이는 

알맹이를 감싸 안고 

잠들어 있습니다 

사과의 벌어진 틈 속에서 

오래전 자신을 가두었던 

다정한 사과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사각사각 이를 갈기도 합니다 


다시, 광장 한복판 

사과 속에 갇힌 사과들이 울고 있습니다 

(레인코트를 입은 배달원은 

철문 앞에 봉투를 들고 서 있습니다) 

앞을 향해 걸으려던 사과들 잠시 머뭇거립니다 

미안해, 

사과가 사과하면 사과는 그 손길을 받아줄까요? 

얼음 땡, 하고 사과는 사과로부터 풀려날 수 있을까요? 


오크와 바닐라 향이 나는 사과들 

신체 인식 테스트 앞에 서 있습니다

단단하고 윤이 나는 멋쟁이 사과를 떠올리며 

모자를 쓰고 차례를 기다립니다 

신체 이곳저곳을 바코드로 찍어봅니다

이전 02화 버블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