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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현지 Aug 02. 2023

고백들

속삭이는 나무늘보 

나무늘보가 천천히 도로에서부터 나무 위까지 거리를 가늠하며 기어 올라갑니다

모든 운전자가 너를 기다려줄 때까지 

자신의 집을 버리고 새로운 거처를 찾아 나서는 소라게처럼 

마티니 잔에 걸친 올리브와 

신호등에 걸린 신호를 번갈아 봅니다 


높이가 다른 시소 

나뒹구는 것들 속에 비밀이 적혀있습니다 

아직, 아무도 종이를 펼쳐 해독한 적 없습니다 

뭉툭해진 연필과 소파만이 잠자코 있는 봄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근원에는 배반당한 악기의 기원이 잠들어 있나요? 

당신의 두 손은 양손을 허리에 얹고 화가 났다는 표식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또는 허리를 잡고 키스하는 도구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뜨거워진 머리를 잠시 들어 올리는 힘으로부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초인종이 울립니다)

머리 위에 얹은 두껍고 무거운 두 팔을 버리고 

새로운 공구들을 구경하러 현관 앞으로 갑니다 


수중 도시의 여자 

그녀는 상자 안에서 새로 배달된 그녀를 꺼냅니다 

어둠마저 사라진 오래된 흙길, 맨발로 온종일 걷는 발목 

갈림길에서 머뭇거리자 이정표가 나타날 때까지 

누군가 손을 내밀 때까지 

낯선 도시, 오랫동안 묶여있던 개의 목줄을 끊어버리듯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여름 사마귀 

TV 다큐멘터리 

나체 위의 나체 

거꾸로 겹친 몸들이 클로즈업된다 

암컷 사마귀에게 목을 베여서 잘려 나가는 것도 잊은 채 

수컷 사마귀의 발기된 성기는 계속 움직인다 


뒷모습만 보고 닮아서 따라갔어요 

나는 단지 내 아비가 사라진 길을 따라 

길을 잃었을 뿐입니다 

누군가 건네준 빵과 주스를 힐끔힐끔 마시고

뒤돌아 낯선 이에게 반갑게 인사했을 뿐 


배우들 

그의 단발머리는 흥건히 땀에 젖어있다 

방금 샤워하고 나온 것일까 

매번 호환되듯 움푹 파인 볼, 

팔뚝 위 덕지덕지 아무는 피딱지의 속도로 

침잠하듯 천천히 걸어 나오는 하품들, 

여름 사마귀의 몸을 빌려 

빈 몸의 밀도를 가늠해본다 

사방을 향해 사지를 자유롭게 움직여본다 


눈오리 날다 

내가 아끼는 오리는 날고 싶어서 

온종일 잠자코 있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합니다 

퀘스천 마크가 붙어 있는 곳까지 샅샅이 살핍니다 

그런데 아무도 오리를 마중 나오지 않습니다 

비 오는 날 만난 소녀와 한 침대에서 상하 다른 방향으로 잠이 듭니다 

그러다 문득, 우리는 날기 위해 태어났다는 비밀 이야기를 합니다 


금빛 오렌지 두건 

결혼에 낭만이 없다는 말은 

상대에게 상처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가 

번식하는 낱말들에 너의 동작을 보여줘, 

탁자 위 모서리에 걸친 여자의 오렌지색 두건은 위치가 불분명한 채로 자주 흘러내린다 

금빛 오렌지 여자가 머리에서 천천히 두건을 푸는 순간은 

검은 살결 위 금빛 섀도의 미처 다하지 못한 느릿한 고백과 같지 


밤이 오고 아침이 와서 내가 거기서 다시 출발한다면 

당신, 거기서 반갑게 악수해줄래요? 


전광판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기 위해 짐가방을 쌌습니다 


날지 못한다고 해서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당신의 몸은 온전한가 


창틀 위 암컷 사마귀가 무언(無言)의 흰 알을 낳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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