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가 살던 동네는 그야말로 응답하라 1988에서 나오는 쌍문동과 싱크로율 99.7프로쯤이랄까.
주변의 대여섯 집 정도는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갠지 다 알 정도였다.
우리 집 바로 위 골목길에 커다란 평상이 있었는데 거기에 집집마다 아이들이 모두 다 뛰쳐나와 커다란 오디오를 세팅해 놓고 노래가 나오면 다 같이 합창을 하곤 했다. 당시엔 조용필이나 전영록 같은 가수들이 인기절정이었다.
노래도 따라 부르고 술래잡기도 하다 보면 뉘엿뉘엿해가지기 시작하고 밥 묵어라 외치는 엄마들의 고함 소리에 그 집 아이들이 점점 하나 둘 사라졌다. 마지막 아이들까지 가고 나면 동네가 잠잠 해졌다. 그 아이들 중 간혹 엄마말을 안 듣고 대들다가 잠옷 바람에 집 밖으로 울면서 쫓겨 나와 대문 앞에 서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것이 또 다음날 아침이면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랬다. 휴대폰도 없고 심지어 집 전화도 다 갖추고 살지 않았던 시절 이건만 어찌 그리 다 알았을까.
명절 때는 선물을 주고받았는데 주로 설탕포대, 밀가루, 식용유 같은 것이었다. 심부름 다 하고 나면 팔다리가 욱신거릴 정도인데 중간에서 그 집 아이라도 만나면 즉석에서 교환하면 되니까 좋았다.
우리 부모님은 그 동네에서 하는 계 모임의 계주였다.
커다란 노트에 세로로 줄을 쫙쫙 그어놓고 은성이네, 짱구아빠, 개똥엄마, 찡코할매 등등 써놓은 이름 옆에 돈을 내면 그 표시로 볼펜 끝에 인주를 묻혀서 찍어 놓았다.
인주가 덕지덕지 묻어있던 커다란 노트들.
세상엔 왜 주식이나 계나 노름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은 없는 걸까? 어쨌든 예상한 바와 같이 우리 집에서 주도하던 계도 빵꾸가 났다. 하루아침에 우리는 그들에게 정다운 이웃에서 죽여도 시원찮을 철천지 웬수가 되었다.
동네 아이들은 우리와 놀지 않았고 허구한 날 꼭지야 꼭지야 하며 안아주던 어른들은 우리 집으로 쳐들어 와서 엄마 아빠의 멱살을 잡고 패대기를 치기 일쑤였다.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이상했다. 돈이란 게 뭐길래 저 사람의 눈빛이 저렇게 달라지나. 벌레 보듯 차가운 그들의 눈초리.
하루는 그 사람들 중 한 명이 내가 아끼던 소년소녀 세계명작 전집을 모두 갖고 가버렸다. 엄마에게 한참을 졸라서 겨우 산 건데 64권짜리 그 모두를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쓸어 갔다. 그때 난 어린 나이였지만 슬픔과 허탈감 그리고 비애를 가득 느꼈던 것 같다.
얼마 후 학교에서 선생님이 독서증진 주간을 맞아 집에서 책을 한 권씩 가져오라고 했다. 아침 시간에 30분씩 읽는 시간을 가진다고. 변변히 가져갈 게 없던 나는 그냥 갔다가 손바닥 세대를 맞았다. 그리고 그 시간에 산수문제를 풀었다. 그때 내 세계명작 전집 중에 한 권을 자랑스럽게 꺼내놓으며 읽는 아이가 있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얼굴에서 30센티정도 떨어뜨려서. 그 아이는 내 책을 싹 다 싣고 간 아줌마의 아들이었다. 산수 문제를 풀며 그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상상을 백번쯤은 한 것 같다.
그렇게 새드엔딩으로 치닫던 그 동네와의 인연은 우리 집 앞에 큰 도로가 생기고 집이 헐리면서 이사를 나오게 되자
끝이 났다. 그래도 엄마는 한동안 그 동네를 그리워했다.
이사를 나와보니 정 없이 사는 아파트생활보다 그곳이 좋았다는 거였다. 나는 그곳을 나온 것이 엑소더스인 것 마냥 신이 났었는데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나인데 아직도 꿈속에선 내가 그 집에 살고 있다. 그것도 당연스럽게. 과거사란 모름지기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어떤 기억은 자꾸만 덧칠하는 그림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