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나의해방일지'
요즘 최애 정주행 드라마는 '나의 해방 일지'이다. 본방은 TV 시청이고 방송이 끝나 면 넷플릭스 통해 바로 다시 보기 하면서 배우들의 대사에 좀 더 집중해서 시청하게 된다.
노트북의 이어폰을 통해 들리는 작은 소리와 배우들의 작은 움직임, 지나가는 듯 툭 던지는 대사 한마디도 모두 담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듯하다.
'나의 해방 일지'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투영해보기도 하고 지금의 자신의 모습과 비교한다. 나 또한 미정이를 보면서 나의 어릴 적 한없이 소심하고 답답했던 시절이 생각나 마음 찡한 짠함과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나의 아저씨' 이후로 오랜만에 몇 번이고 다시 보기를 할 수 있는 드라마가 나왔다는 것은 정말이지 기분 좋은 일이다. '나의 아저씨'는 지금도 분기에 한 번 정도씩은 정주행을 하는 데 '나의 해방 일지' 또한 나에게는 그런 드라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아저씨'는 시청자가 관찰자 입장에서 보는 드라마였다면 '나의 해방 일지'는 시청자인 내가 여주인공 '미정'에게 동화되어 한 씬 한 씬 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듯하다. 타 드라마에 비해 많지 않은 대사량이지만 적은 양의 대사 대부분이 명대사라 부를 만큼 버릴게 하나 없는 좋은 대사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정이의 목소리를 통해 나오는 내레이션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너무 힘들거나 내가 살고 있는 삶이 제대로 살고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 순간 자신에게 쏟아내는 질문과도 같은 내용들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음직한 생각들이 미정이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오면 그래도 잘 살아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의 대화 한마디 한마디가 그 시절의 내가 하지 못한 말을 배우들을 통해 한다는 느낌이 들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 올라오면서 희열도 느껴진다.
그 시절 나는 미정이 보다 도 존재감이 약했고 사람들과의 대화를 즐기기보다는 혼자만의 시간을 더 좋아했던 성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요즘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로 말한다면 자발적 아싸를 추구했던 삶을 살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이런 대사를 쓰는 작가님 또한 미정이와 같이 짠하고 답답한 시절을 보냈던 적이 있었기에 가슴 울컥하게 마음을 울리는 대사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본다.
" 어느 지점을 넘어가면 말로 끼를 부리기 시작해.
말로 사람 시선 모으는 데 재미 붙이기 시작하면 막차 탄 거야.
나는 네가 말로 사람을 홀리겠다는 의지가 안 보여서 좋아.
그래서 네가 하는 말은 한마디 한 마디가 다 귀해. "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개새끼들도 시작점은 다 그런 눈빛.
'넌 부족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된 것 같은 하찮은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
우리를 지치고, 병들게 했던 건, 다 그런 눈빛들이었다.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고자 달려들었다가 자신의 볼품없음만 확인하고 돌아서는 반복적인 관계. 어디서 답을 찾아야 될까?"
"너는 나처럼 갈구하지 마. 다 줘, 전사처럼 다 줘. 그냥 사랑으로 폭발해버려."
"저는 관심이 가는 순간 바로 사랑이 돼요.
단계라는 게 없어요.
아니, 남들은 관심이 가다가 진짜로 좋아하게 되는 거 같은데, 전 조금이 없어요.
서서히 가 없이 처음부터 그냥 막 많이 좋아요."
"생각해보니까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것 같은 사람들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 불편한 구석이 있어요.
혹시 그게 내가 점점 조용히 지쳐가는 이유 아닐까, 늘 혼자라는 느낌에 시달리고 버러지는 느낌에 시달리는 이유 아닐까. 한 번 만들어 보려고요.
그런 사람. 상대방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에 나도 덩달아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고, 그냥 쭉 좋아해 보려고요. 방향 없이 사람을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 이제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 20점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시험지에 부모님 사인을 받아 가야 했는데, 꺼내진 못하고 시험지가 든 가방만 보면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거웠어요.
사인은 받아야 하는데 보여주면 안 되는, 해결은 해야 되는데 엄두가 나질 않는, 지금 상황에서 왜 그게 생각날까요?
도대체 뭐가 숨겨야 되는 20점짜리 시험지인지 모르겠어요.
그냥 내가 20점짜리인 건지. “
“어디에 갇힌 건진 모르겠지만 뚫고 나가고 싶어요.
진짜로 행복해서 진짜로 좋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 이게 인생이지’. ‘이게 사는 거지’ 그런 말을 해보고 싶어요.”
“누구랑 있으면 좀 나아 보일까.
누구랑 짝이 되면 … 그렇게 고르고 골라 놓고도 그 사람을 전적으로 응원하지는 않아.
나 보단 잘 나야 되는데 아주 잘나진 말아야 돼.
전적으로 준 적도 없고, 전적으로 받은 적도 없고, 다신 그런 짓 안 해.
잘 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 줄 거야.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 팔려하지 않을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야.
부모한테도 그런 응원 못 받고 컸어.
우 리.”
“인간은 다 허수아비 같아.
자기가 진짜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어떻게 보면 건강하게 잘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질문을 잠재워두기로 합의한 사람들일 수도, 인생은 이런 거야. 라고 어떤 거짓말에 합의한 사람들.
난 합의 안 해.
죽어서 가는 천국 따위 필요 없어, 살아서 천국 볼 거야.
지금도 말을 많이 하는 성향은 아니다.
집에서건 직장에서건 불필요한 말은 줄이고 꼭 해야 하는 말 위주로 간결하고 명확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현재 이런 내가 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겉으로 표현되는 단어를 뱉어내기 까지 혼자서 수 없이 많은 말들을 시뮬레이션해보기도 하고, 상대방의 얼굴 표정이나 몸동작을 보면서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그저 스쳐 지나는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까지 늘어놓는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너의 일상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데, 말을 듣는 상대방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주절주절 이야기를 꺼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진공의 시간을 견디지 못해 쓸데없는 ‘TMI’를 따발총을 쏘듯 퍼붓는 사람들을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정말이지 ‘다말증’ 환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잠시간의 진공상태를 경험하고 한 템포 쉬어가면 어떤 가.
온, 오프라인으로 넘쳐나는 쓸데없는 소음 공해 속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지 말고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컨텍을 통해 여유로움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훨씬 편안 생활이 될 것이다.
나는 삼 남매 중 둘째로 자랐다.
둘째로 자란다는 것은 좋은 경험은 아니다. 모든 것을 양보해야 했으며 나의 것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남들과 견주어 평범한 스펙 조차 갖추지 못한 것에 대한 아픔을 스스로 삼켜야 했었던 시간을 보내면서 사람과 말하는 것을 주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의 상처를 타인에게 보이는 것을 원치 않았고 갖지 못한 스펙을 대신하기 위해 더 많은 책을 읽었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야근을 해서라도 모든 업무를 손바닥 보듯이 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니 지치고 힘들었지만 무언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 나를 향한 무한 신뢰와 애정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추앙’이라는 단어를 드라마에서 처음 접했다.
구 씨가 핸드폰을 들어 인터넷 검색을 통해 뜻을 확인하는 화면이 나올 때는 티브 화면으로 머리를 가까이 대면서 자세히 읽어 보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추앙’을 선택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나의 에고가 스스로를 추앙하면서 자신만의 견고한 내공 쌓았고 웬만한 시련 앞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을 만들어 준 것 같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하찮은 존재로 보이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순간을 누군가의 도움으로 헤쳐 나오는 사람도 있지만 자기 스스로 길을 만들어 나오는 사람도 있다.
드라마의 미정이나 구 씨처럼 누군가의 추앙과 사랑을 통해 그 순간은 만난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가족들의 애정과 응원을 통해 그 순간은 만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표현된 방법은 다르지만 무한한 사랑과 애정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무한 애정과 응원과 사랑을 주고받기 쉽지는 않은 듯하다.
드라마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 대신 ‘추앙’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도 무조건적인 사랑은 존재하기 힘들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부모 자식 간에도, 부부간에도, 남녀 간에도, ‘사랑’은 내가 준 만큼 받아야 하고 내가 쏟은 사랑 에너지보다 상대방의 사랑 에너지가 적다고 생각되는 순간 틈이 발생면서 그 사랑은 끝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사십대 이상의 어른들도 덕질 문화가 많이 생긴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연예인에게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애정을 보내더라도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다고 실망하지는 않으니까. 이런 사람들과는 머릿속 상상 연애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이런 사랑이 가능하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현재가 힘들어도 지금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내공을 쌓는다면 10년 후가 되었을 때 더 좋은 위치에서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10년 전의 내가 20년 전의 나보다 괜찮은 사람이었고, 지금의 내가 10년 전의 나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되었으니까 남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아끼고 스스로에게 겸손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보자.
그러면 앞으로 10년 후에는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 감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