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100. 몸무게 16 .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소아는 키 100cm 몸무게 16kg의 작은 체구의 아이였다.
키 100CM, 몸무게가 16KG은 한국 어린이 평균 기준 사,오세 아이들의 체형인데 초등학교에 입학 한 아이가 이런 작은 체구로 책 가방을 메고 지나갈 때면 동네 아주머니들은 하나같이 '언니 가방 메고 어딜 가니?'라고 짓궂게 말하곤 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덩치보다 큰 책가방을 메고 다니는 아이를 보면서 언니 가방 메고 놀러 다닌 걸로 오해할 때도 있었다.
소아네는 달동네 꼭대기 집으로 꼬맹이 소아 걸음걸이로 30분을 굽이굽이 이어진 골목길을 돌고 돌아 학교를 다녀야 했다.
초등학교 입학 당시 같은 반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작은 아이였다.
작은 체구를 가진 소아였지만 액티비티 한 활동을 선호했으며 탁구, 합창 반도하고 학교 내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했다.
사람들 눈에 보이는 작은 체구를 먼저 보지만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허약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은 다부지고 고 야무진 성향의 어린이였다. 소아의 그런 모습을 선생님들은 대견하게 생각하여 어떤 학생들보다 친절하고 세심하게 신경 써 주기도 했다.
또래 친구들은 소아의 소박하고 털털한 성격은 마음에 들어 했지만 선생님들로부터 은연중에 보호를 받으며 학교생활을 하는 모습을 그저 좋게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리 삼 년 동안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은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소아를 조금씩 멀리했고 소아는 아이들의 보이지 않는 따돌림을 마음으로 먼저 느끼게 되었다.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은따'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들의 관심은 본인이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로 인해 친구들로부터 멀어지면서 느끼는 외로움과 슬픔은 오롯이 본인이 감당해야 했다.
왕따나 따돌림은 21세기 학교에서 새롭게 생긴 것이 아니라 일제 식민시대 때부터 존재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일제 식민지 시대에 한국인들은 일본 본토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 받았고 하등 한 존재로 업신여김을 당해야 했었다. 이런 몹쓸 일제 식민시대 유산이 지금까지도 끊어내지 못하고 사회 곳곳에 존재해 있고 그 유치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유산의 시작이 어린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라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십 세기에는 학생 숫자도 지금보다 훨씬 많았고 학교 폭력도 훨씬 많았을 텐데 왜, 공론화가 되지 않았던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한 가지라 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 시절의 대한민국은 지금처럼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4.19 혁명 이후 근 30년 동안 군사 독재 하에 있으면서 학교에서 아이들의 인권은 존재하지 않았고, 어른들은 먹고살기 위해 하루 12시간이 넘는 노동 시간을 견뎌야 했으며, 이런 어른들에게도 인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아이들의 인권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먼 미래의 단어였을 것이다.
소아네 집은 그 당시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달동네 중 하나였다.
달동네이기는 하지만 넓은 대청마루와 작은 마당에 화단도 있는 괜찮은 집이었다. 마당에서 동생이랑 야구도 하고 땅따먹기도 하고 비석 치기도 했었다. 부모님 두 분이 결혼할 때 이 집은 소아 아빠의 명의였지만, 아빠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서 돈벌이가 원활하지 못해지면서 이 집은 돈 많은 부동산 투기하는 사모님한테 전세로 팔리게 되었다.
서울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동네였지만, 동네 어른들은 모두 가깝게 지내면서 동네 가파른 언덕길에 계단도 만들고 아이들을 위해 언덕 중턱에는 꽃밭을 만들기도 했다. 이 당시 어른들은 손으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소아 아빠는 오래된 집 담벼락이 긴 장마에 물을 먹어 개구리 배처럼 부풀어 올라 터지기 직전이 되었을 때 집 담장을 허물고 혼자 벽돌을 쌓아 올려 담을 다시 만들었고, 기왓장이 오래돼서 방 안 천장에서 물이 샐 때면 직접 기왓장도 교체했었다. 또, 집 벽지가 오래돼서 누렇게 바뀔 때쯤이면 혼자서 방 3개 모두 도배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손재주가 좋은 아빠를 보면서 세상 모든 남자들은 다 이렇게 일을 잘하는 줄 알았다. 후에 모든 남자가 아빠처럼 뭐든지 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아빠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빠 혼자 그런 일을 다 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당신이 직접 그런 일을 했던 건 몸이 좋지 않아 직장 생활을 할 수 없어 수입이 원활하지 않았기에 돈을 아끼기 위한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이 든 후에 알게 되었다.
소아아빠는 30대 젊은 나이에 백내장을 앓아 시력의 상당 부분을 잃어, 하드렌즈와 안경을 동시에 착용하지 않으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기에 직장 생활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아가 기억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엄마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많이 하셨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집에서 할 수 있는 손뜨개질로 옷을 만들어 납품하는 일을 하였고, 아이들이 자라서 손이 덜 가는 나이가 되었을 때는 미싱사로 취직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일을 할 수 없어 늘 돈에 쪼들리는 생활을 해야 했지만 그런 일로 단한 번도 남편에게 화를 내거나 욕을 하지 않았다.
옛날 어머님들처럼 그런 일상이 자신의 숙명이라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인 게 아닌가 싶다.
소아 엄마는 그렇게 젊은 시절 많은 고생으로 70대에 들어선 지금은 다양한 기저 질환으로 몸 자체가 종합병원이 되어 버리셨다. 그렇다고 아빠가 가부장적인 남편들처럼 집에서 부인이 퇴근하고 올 때까지 손 놓고 기다렸다 밥상을 받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침은 엄마가 직접 준비했지만 점심과 저녁은 늘 아빠가 준비를 했고, 빨래나 허드렛일 같은 집안 일은 모두 잘해주는 남편이었다. 설거지와 뒷정리는 소아와 큰 딸이 하는 일로 정해졌고 두 딸은 별다른 말없이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 자연스러웠다.
소아는 일남 이녀 중 중 둘째 딸이었다. 여러 자식들 중 중간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독립적이며, 생존력도 강하고 고집도 있고 눈치도 볼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소아도 이런 성향의 아이 중 한 명이었다.
부모님은 아들, 딸을 차별하는 분들은 아니었지만 자식을 여럿 키우다 보면 손이 많이 가는 자식이 있기 마련인데, 언니는 중학교 때까지 잦은 잔병치레로 부모님들의 관심 대상이었고, 동생은 늦둥이 막내아들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모님 관심 대상이 되었다. 건강하고 뭐든지 스스로 알아서 하는 소아는 자연스레 부모님 관심 대상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타고나길 잔망스럽게 말이 많은 성향도 아니었지만 비 관심 대상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자기 일은 혼자 알아서 했으며, 아픈 언니로 인해 집안 일 또한 혼자서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뭐든 열심히 하려고 하는 성향은 이런 주변 환경에 의해 어렸을 때부터 다져진 것일 것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다양한 클럽 활동을 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기의 미래를 상상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 탁구클럽 활동을 하면서는 탁구 선수를 상상했고, 운동에 소질이 있다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는 체육 중학교를 가는 것을 상상하기도 했다. 선생님으로부터 자기가 뭔가에 소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잘한 다는 것 자체가 기뻤고 행복했었다.
소아는 무엇인가를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해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무척 다양한 상상을 했었다.
어린 시절 용돈이라는 걸 따로 받아 보지를 못했기 때문에 여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종이 인형을 사고 싶지만 장난감을 살 수 없어서 다 쓴 노트 겉표지와 달력 종이에 직접 인형 그림을 그리고 인형에 어울리는 의상을 그리면서 패션 디자이너라는 꿈도 생각해 봤다. 본인이 가지고 놀 그림을 그리면서 언니 것도 만들어 주었는데 좋아하는 인형의 모습이나 의상들은 언니 취향을 반영해 만들어 주기도 했다.
운동을 잘한다는 선생님 말씀에 직업 군인이 되어 보는 건 어떨까 생각도 해 보았고, 매년 살고 있는 집 전세를 올려야 할 때면 심란해진 얼굴을 보면서 건물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가정 형편이 녹록지는 않다는 걸 알았지만 현실을 잘 알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는 매번 다양한 미래를 그렸고 자신은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많이 가져 보았다. 이런 기분 좋은 상상은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미래는 자신이 원하는 데로 되지 않는 일장춘몽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