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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Feb 26. 2022

코스 섬

에게 해에 떠 있는 정령들의 섬

  코스 섬은 ‘작다, 예쁘다, 조용하다’ 는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그 앞에 부사를 붙여서 ‘아주 작다, 아주 예쁘다, 아주 조용하다’라고 말하면 코스 섬의 분위기가 더욱 잘 전달될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 중에서 ‘조용하다, 고요하다’가 내게는 훨씬 더 적절한 말로 떠오른다. 그 ‘고요하다’는 이미지는 지금도 매우 특별하게 코스 섬을 연상하게 한다. 모든 복잡하고 거칠고 아귀 같고 정신없는 世上萬事가 완전하게 제거된 세상, 모든 사물들이 자기 있을 곳에 정갈하게, 딱 들어맞게, 조용하게 자리 잡은 세상, 태양은 높이 떠 있고 푸른 바다는 발아래 넘실거리고 공기는 그지없이 맑으며 파릇한 잔디밭 너머 숲속에는 동물들마저 숨죽이고 있는 고요한 세상, 그것이 내가 간직하고 있는 코스 섬의 잔상이다.      


  코스 섬은 로도스에서부터 크루즈 선을 타고 선실에서 1박을 하며 다다르게 되었다. 선실이 아늑하고 예쁘고 깔끔했지만 바다 위에서 처음 자게 되는 잠이라 흥분한 탓이었는지 새벽녘에 일찍 잠이 깨고 말았다. 뿌연 새벽 빛 속에서 배의 선실 창으로 내다 본 그 중간에 있는 섬들의 풍경은 꿈속에서처럼 몽롱하고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그런 섬들을 몇 개 지나치고 나서 목적지인 코스 섬에 도착했는데 코스 섬은 멀리서 보기에도 장난감처럼 작고 예뻤다. 우리 일행이 배가 다다르는 작은 항구에서 짐을 끌고 내리자 거기에서 바로 산책길처럼 호젓한 둑길이 나타났고 한쪽 옆에는 옛날에는 파수대로 사용했다는 작은 언덕이 어우러져서 모든 것이 얼마나 정갈하고 예뻤는지 첫 눈에 반할 지경이었다.     


  코스 섬의 시내는 걸어서 구석구석 돌아다녀도 한 시간 남짓 걸릴 만큼 작았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길에 아기자기하면서도 작은 상점들, 호텔들, 기념품 가게와 식당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는 항구 마을이 전부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도 작고 예쁘고 찬란하게 빛나는 마을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싶게 그림처럼 앙증맞게 아름다웠다.      


  첫째 날에는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가게도 둘러보고 다리 아프면 벤치에 앉아 쉬기도 하고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기도 하면서 한가하게 마을 탐색을 했다. 항구 앞에 자리 잡은 아담한 시청, 교회, 학교, 파수대언덕 등이 옛 명화에 나오는 마을 풍경과 너무 비슷한 느낌이어서 우리가 어딘가 옛날 아득한 시점으로 되돌아간 듯 했고 산책하면서 어떤 향수마저 느껴지면서 고향 같은 아늑한 마을 풍경에 빠져 들었다. 둑길 옆 벤치에 앉아서 황혼이 퍼져나가는 하늘을 보다가 이른 저녁을 먹고 호텔로 들어갔다.    

  

  둘째 날에는 처음부터 우리의 목적지 중 하나였던 섬 뒤쪽 편의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 가기로 했는데 택시를 타고 가는 방법과 꼬마 기차를 타고 가는 방법,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이왕이면 꼬마 기차가 낭만적이기도 하고 코스 섬 여행에는 더 맞을 것 같아서 그 기차를 타고 덜커덩거리면서 시골풍의 마을길을 15분쯤 가니까 다다르게 되었다.     


  아테네 시내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과 제우스 신전, 헤파이스토스 신전, 수니온 곶의 포세이돈 신전 등 이미 그리스 신전들은 많이 보아왔던 터여서 아스클레피오스 신전도 그 비슷한 것이겠거니 하며 그리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가서 눈앞에 그 신전을 대하니 오히려 이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무언가 색다른 맛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신전이라고는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신전 터임을 알 수 있는 돌무더기가 대부분이고 군데군데 아직 서 있는 대리석 기둥들이 있었고 그 아래 삼층으로 된 테라스가 오히려 옛날의 모습을 더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코스 섬의 바다가 발 아래로 시원하게 내려다보이고 산 중턱에 조용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신전 터는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혀 주는 어떤 힘과 동시에 수천 년 전의 인류는 이 섬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까 하는 호기심도 여느 때 다른 신전을 보았을 때와는 달리 강하게 올라왔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은 그리스 신화에서 의술과 치유의 신이었다. 아폴론과 테살리아의 왕녀 코로니스의 아들로 태어난 아스클레피오스는 어려서부터 의술에 큰 관심을 보였고 케이론에게 의술을 배우면서 의술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많은 아픈 이들의 병을 고쳐주다가 마침내는 죽은 사람까지도 소생시키는 바람에 제우스의 분노를 사서 제우스신의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아폴론이 아들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제우스가 그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하늘에 올려 ‘땅군자리’라는 별자리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고대인들은 심지어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에서 기도하고 잠을 자면 꿈에 아스클레피오스 신이 나타나서 치료법을 말해주고 그 방법대로 하면 낫는다는 믿음까지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섬은 고대와 중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병자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의학의 상징으로 아스클레피오스의 1마리 뱀이 감긴 지팡이가 사용될 정도로 아스클레피오스가 의학에 미친 영향은 크고도 깊다. 코스 섬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은 B.C. 5~4 세기 경에 이 섬에서 태어나서 의술을 보다 현대식으로 확립한 히포크라테스의 병원 겸 학교로 사용되면서 그의 활약으로 규모나 보존 상태가 양호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신전 터에도 어떤 구원적, 염원적, 신앙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고 아픈 사람들의 애타는, 간절한 기도가 곳곳에 서려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신전 전체가 숲속의 양지바른 곳에 매우 넓게, 주위는 신비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아주 고요한 곳에 누워있었기 때문에 경건하고도 신성한 분위기가 감싸고 있었고 여느 신전과는 사뭇 다른 정기가 느껴졌다.   

   

  대지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로 인해 조금만 돌아다녀도 지치는 날씨 때문에 우리 일행은 더위를 피하느라 돌무더기 중에서도 신전 뒤편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ㄷ’ 자 회랑이었던 곳을 찾아냈다. 그 곳에서 햇빛을 가릴 수 있는 나무그늘에 앉아 딴 생각 없이 오랫동안 고요한 신전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눈앞에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과 오염하고는 거리가 먼 깨끗하고 맑은 공기, 발 아래 내려다보이는 파아랗게 넘실거리는 바닷물, 신전을 둘러보는 사람들의 조용한 발소리, 고요하게 누워있는 수천 년 전의 돌무더기들, 신전 기둥들.... 나는 어딘가 전혀 낯선 곳에, 내가 전혀 모르던, 꿈에도 알지 못했던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덥지만 쨍하면서도 맑은 공기, 숲속의 수많은 생명체들, 정령들 속에 둘러싸여 있는 듯한 돌로 된 제단과 신전, 계단, 테라스들... 어쩐지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어 한참을 머뭇거리며 망설이며 그 풍경들을 보고 또 보았다. 그렇지만 우리가 타고 온 꼬마기차가 방울을 울리며 귀로를 재촉하였기에 아쉽지만 떨치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에 우리가 묵었던 호텔은 바닷가 바로 앞에, 항구와는 예쁜 둑길로 연결된 곳에 있어서 그림 같은 분위기였고 위치 때문에 조금 비싸기는 했지만 매우 쾌적해서 비싸다는 느낌을 상쇄시켜 주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조식을 먹을 때도 차려놓은 스타일이 또 너무 화려하면서도 상큼해서 분위기를 돋구어 주었다. 음식은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고 디저트와 차 또한 너무 맛있어서 더 먹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야할 정도였다. 그러나 호텔의 진가는 한낮 무렵이 되어 햇빛이 쏟아져 내리자 바로 붙어있는 바닷가의 물결이 얼마나 맑고 파랗고 아름다운 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그리스 바다의 황홀함에 취해 수영할 생각도 잊고 오랫동안 그저 멍하니 툭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는데 저 앞 먼 바다에는 몇 몇 개의 섬의 형체가 비교적 또렷하게 보이면서 섬들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위기가 또 색다르게 느껴졌다.  

   

  저녁에는 호텔 뒤편의 골목길을 걸어 다니다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난 다음 코스에서의 짧은 2박 3일을 뒤로 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아테네로 향했다. 아테네에서 바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 코스 섬의 파란 바닷물과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의 고요한 정경이 눈앞에 어른거려 마음 일부를 그곳에 두고 온 듯 잊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20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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