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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Jul 10. 2024

병원 가는 길



  오늘은 항상 가던 대학병원에 정기검진 차 가는 날이다. 원래는 3달에 한 번 가던 것을 지난 번 갔을 때 교수님이 5달만에 와도 된다고 해서 처음으로 5달이 지나서 가는 중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피검사를 하러 가는 날은 그 전날 밤 10시 이후에 그 무엇도 먹거나 마시지 못하므로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하고 7시에 집을 나섰다. 배가 약간 허전한 듯 했지만 고프다는 느낌은 없었고 견딜만 했다. 아파트 현관을 나와서 비스듬한 경사길을 내려가려니까 키 큰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소리가 명랑하게 들려왔고 어젯밤의 비에 깨끗이 씻겨나간 나뭇잎과 풀잎들이 싱싱한 푸른 빛을 띄고 아침 분위기를 채우고 있다. 공기도 다른 날에 비해서는 청량한 느낌이라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려오고 코로 느껴지는 모든 것에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일이 좀처럼 드문 일이라서 오랜만에 아침 시간의 신선한 느낌에 흠뻑 빠져본다. 지금 이길로 곧장 병원에 가지 않고 어딘가 산으로 들로 강가로 나간다면 콧노래라도 나올 것 같았지만 그건 어차피 불가능하고 난 차질없이 병원에 가야만 한다. 그 대학병원이 내일 모레부터는 전면휴업을 한다고 하니 자칫 딴길로 빠졌다가 다시 약속을 잡으려면 한 달내로는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갑자기 낭만적인 기분이 싹 사라져버리고 난 사무적이고 이성적이 되기로 한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길 하나만 건너면 지하철역까지 이르는 길에 경의선 숲길이 펼쳐지므로 나는 다시 초록으로 뒤덮힌 싱그러운 숲길에서 기분을 추스린다. 초록의 자연은 항상 정답이다. 거기엔 진정성과 자연스러움과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다. 이건 거부할 수 없는 위안이다. 그 어떤 것이 인간의 기분을 이렇게 평화롭게 어루만질 수 있을까? 오늘따라 10분 정도의 거리가 짧게 느껴지면서 20분, 30분 정도의 거리였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하철을 타기 전엔 이렇게 이른 시간의 지하철은 일터로 출근하는 사람들로 몹시 혼잡하겠지 하며 살짝 걱정을 했는데 생각보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한 두 군데 앉을만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로 옆에 노약자석의 빈 자리가 눈에 띄어서 거기에 앉기로 한다. 내가 노약자석에 앉지 않고 일반석에 앉는다면 나보다 젊은 누군가는 서서 가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요즘 노약자석에 자연스럽게 앉는다. 바로 일 이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웬만하면 일반석에 앉아가려고 했던 습관이 변한 것이다. 노약자석에 앉는 것이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명백한 증거를 내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쩐지 흔쾌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시시한 생각에서 벗어나기로 한다.


  오랜만에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친다. 몇 정거장 가지 않아서 내리게 되는 때에는 책을 펼쳤다가 덮는 것이 번거롭기 때문에 남들처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만 병원까지 30분 정도 걸리는 오늘같은 때는 책을 보는 것이 전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따가 피검사를 하고 나면 교수님을 만나러 진료실에 가기까지 3시간을 버텨야하므로 오늘은 아까 나올 때 책 한권을 가방에 넣어갖고 나왔다. 그런데 3백 페이지가 넘는 책이라 가방이 다소 무겁게 느껴지긴 했다. 저번에 읽다가 만 페이지를 찾아 그 다음부터 읽기 시작한다. 옛날에는 책을 읽을 때 읽다가 만 페이지를 그냥 한 귀퉁이를 꾹 접어서 표시해두곤 했는데 요즘은 윤기나는 책갈피 실을 꼭 찾아서 표시를 하거나 그게 없을 땐 책갈피 꽂이로 표시를 한다.  내게 생긴 좋은 습관이다. 그런데 너무 집중해서 읽은 탓인가 하마터면 내려야하는 정거장을 놓칠 뻔한 것을 다행히도 문이 닫히기 5초 전에 뛰어서 내릴 수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 가려다가 내가 아침밥을 안 먹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세어보니 벌써 열 명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나 나는 못 타게 되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에 내 뒤를 바짝 쫓아온 한 아주머니가 마지막으로 탔다가 “정원을 초과했으니 마지막에 탄 사람은 내려주십시오“라는 안내 멘트를 듣고 힘없이 내렸다. 어쩌면 그렇게 내린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는데 간발의 차로 모면하고 보니 ‘탄 자와 못탄 자’의 운명이 아주 작은 차이에 의해 갈려나갔다는 생각에 실소하고 말았다.  


  땅으로 올라와서 병원 입구에 새로이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병원 현관까지 쉽게 도달한다. 예전에 이것이 없었을  때는 언덕길을 힘들게 빙 돌아 올라가야만 했는데 자꾸자꾸 세상은 더 편해진다. 채혈실까지 8시 10분전까지는 도착하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뭔가 자꾸 지체되어 채혈실에 도착한 시간은 바로 8시 2분전이다.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대기자 25명, 대기시간 30분이라는 안내판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그보다 적은 인원수가 대기하고 있는 2층의 제2채혈실로 내려간다. 가 보니 역시나 여기엔 대기자가 6명, 대기시간 5분으로 표시되어 있다. 확실히 여기로 오길 잘했네. 나는 내 판단에 만족한다.


  잠깐 앉아서 기다리다가 피를 뽑히고 나서 나는 먹지 못했던 아침을 먹기로 한다. 여기에선 어차피 빵이나 샌드위치에 커피 혹은 차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음을 알기에 나는 병원입구 에스컬레이터 옆에 있는 스타벅스로 간다. 메뉴판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아메리카노 보통크기 하나와 샌드위치 하나의 값을 결제하고 자리를 찾는다. 창가에 자리가 비어 있었지만 보기만해도 뜨거운 햇볕이 쨍하게 내리쬐고 있어서 할 수 없이 창가에서 떨어진 자리에 앉는다. 어느 방향으로 앉을까 고민하다가 창가를 마주보고 앉기로 했지만 약간 대각선으로 비껴진 곳에 앉아있는 여학생의 시선이 정면으로 나를 향할 듯해서 약간 마음이 불편하다.


  주문대에 내가 주문한 아메리카노와 샌드위치가 나와 있는 것이 보여서 얼른 가져다가 먹기 시작한다. 샌드위치는 생각보다 맛이 없다. 그 안에 들어있는 커다란 햄조각의 맛이 아무래도 뭔가 거슬려서 반쯤 먹다가 다 빼버렸다. 그래도 만족할만한 맛이 아니다. 토마토와 양상추도 듬뿍 들어가 있고 두꺼운 계란 부침도 들어가 있는데 왜 이럴까? 다시는 스타벅스 샌드위치는 못 먹을 것 같다. 나는 3/1정도는 그냥 남기기로 한다. 맛없는데 굳이 다 먹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는 아까 지하철에서 읽다가 만 페이지를 찾아 책을 읽기 시작한다. 오늘은 책의 내용이 쉽고 편안하고 명료하게 머리 속에 들어온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책은 손에 잡고 읽기 시작하면 금방 집중하게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들이다. 나는 가끔 그의 천재성에 탄복하다가 속이 쓰려오기도 한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라는 사람과 그의 현격한 차이에 어이가 없을 뿐이다. 재능이란 타고난 부분이 커서 노력만으로 메꿔지지 않는 것 같다. 아니 그 정도의 노력을 내가 하기는 했던가?


  10시 반이 되어서 나는 본관 2층에 있는 가정의학과 대기실에 가서 자리를 잡고 기다린다. 진료받기에 앞서 혈압을 쟀는데 너무 높게 나와서 다시 쟀더니 15정도가 낮게 나오고 그래도 높아서 다시 재니 10이 또 낮게 나온다. 난 이게 심리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혈압기 앞에 앉기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려서 주체할 수가 없다. 혈압에 대한 심한 신경증적 증세이다. 이번에도 또 높게 나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매번 나를 패닉상태로 몰아가는 것 같다. 이렇게 잰 혈압이 내 건강상태를 옳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나를 진정시키려고 해도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내가 참 변변치 못하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진찰실 안으로 들어갔다. 교수님은 저번에 보았을 때와는 달리 머리를 장발로 기르고 계셨다. 단정히 머리를 깎은 모습보다 조금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걸 본인도 노렸을 것 같다. 틀에 박힌 스타일에서 잠시 벗어나 보는 것은 형식만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변화까지도 가져오리라. 교수님은 내 검사 결과를 찬찬히 살펴보시더니 흐뭇한 미소를 띠며 모든 수치가 정상이며 저번 상태보다 모든 것이 더 좋아졌다고 자기가 더 좋아하는 모습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처럼 운동하고 식이요법 하고 약도 잘 먹으면 계속 100점이 될거라면서 칭찬해 주셨다. 오랜만에 좋은 소식에 마음이 가벼워진다. 항상 걱정을 떨칠 수 없었는데 앞으로도 이렇게만 간다면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바위를 던져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먹을 때도, 잘 때도, 놀 때도 편치 않았는데.


  병원을 나와서 곧장 집으로 가려다가 집에 가서 뭔가 차려 먹으려니 귀찮아져서 식당을 찾기로 한다. 병원 밖으로 길게 펼쳐진 골목길을 차분히 걸으며 이집 저집 간판을 읽으면서 어느 식당이 가장 탁월한 선택이 될지 가늠하다가 언젠가 한 번 간 적이 있는 인도식 커리전문점으로 들어간다. 아직 12시가 되기 전이라 식당에는 두 팀만이 앉아 있었는데 나는 좀 구석진 자리를 골라 앉았다. 양고기 커리 메뉴를 고르고 플레인 난을 하나 주문했다. 맛은 그럭저럭 먹을만 했는데 작게 잘린 빨간 고추조각을 나도 모르게 먹었는지 갑자기 입안이 화끈거려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물을 황급히 들이키며 어찌어찌 삼키긴 했는데 보통으로 매운 맛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빨간 고추가 매울 것 같아서 옆으로 치워놓았는데 작은 조각이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때부터 입안이 화끈거려 맛을 모를 지경이 된 나는 대충 배만 채울 요량으로 커리를 먹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때부턴 또 양말 위로 삐져나온 발목이 따끔거리고 가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또 뭐람. 아무래도 모기에 물린 모양이다 한 방도 아니고 여러 방이 물려서 양쪽 발목이 따끔거려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조금 더 미적거리다가는 발목뿐 아니라 종아리와 정강이까지도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고 나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골목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데 모기 한 놈이 내 몸 어딘가에 붙어서 따라온 것인지 이번에는 종아리 쪽이 따끔거리기 시작한다. 도대체 모기들이란!! 옛날부터 모기란 모기는 전부 나에게만 달려들어 나를 괴롭혀 왔는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밥 먹는 식당에서까지 나를 공격하다니 !!  너무한 거 아닌가? 야외 식당도 아니고 육면의 벽이 있는 실내 식당에서도 모기에 물릴 줄은 몰랐다. 걸어가는 와중이라 긁을 수도 없고!!  어디가 한 번 가려우면 피가 날 정도로 긁어대는 나로선 지하철역까지 불과 십 몇 미터도 안 되는 길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아무래도 약국을 찾아서 벌레물린 데 바르는 약을 구입해서 바르지 않고는 집까지 갈 수 없을 듯하다. 나는 두리번거리다가 길 건너에서 작은 약국을 하나 발견하고 주저없이 안으로 들어 가서 바르는 약을 산다. 앉아서 약을 바르고 가도 될까요 묻고는 허락을 받자마자 카우치에 앉아 약을 치덕치덕 발라댄다. 겨우 조금이나마 가려움이 가라앉고 나서야 지하철을 타러 간다. 기껏 기분이 좋았다가 그놈의 모기란 놈이 오늘의 마지막 불운을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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