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아닌 척했지만 심장이 두근거리고 다리까지도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 거기, 그 자리에 있어야할 내 초록색 신용카드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여기 있어야 하는데? 항상 지갑 바깥쪽 작은 칸에 넣어두는 신용카드가 보이지 않는다. 아까 유니클로에서 계산하다 빠진 걸까? 아니 오늘 난 그 카드를 쓴 적이 없는데. 나는 지하철을 타려다 말고 가방 속에 신용카드가 없는 걸 발견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혼란에 빠졌다. 백화점 2층에 있는 유니클로에 다시 가서 한번 물어봐야 하나? 근데 내가 분명히 그 초록색 카드를 쓰지 않고 파란색 카드를 쓴 게 확실하고 초록색 카드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된 거지? 나는 혼란스러운 상태에서도 뭔가 차근차근 아까의 상황을 되짚어 봤다. 만약에 카드를 잃어버린 것이라면 옷값을 계산하던 때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그외의 상황에서는 신용카드가 필요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거람? 또 내 덤벙거리고 뭐든지 빨리빨리 해치우려는 조급한 성격 때문에 카드가 흘러서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계산이 끝난 뒤 서둘러서 물건만 챙겨들고 나온 것인가? 하는 불안이 몰려왔다. 혹시 잃어버렸다 한들 근데 설마 요새 카드 하나 갖고 뭘 할 수 있겠어? 비밀번호 모르니까 내돈은 안전할꺼야. 요새 남의 카드 갖고 어디 가서 물건을 산다고 해도 금방 발각될텐데 뭘. 나는 두근두근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서 이런저런 논리적 설명을 자신에게 해주느라 열심이었다. 그렇지만 어떤 천재적이고 초능력적인 해커라도 있다면 그까짓 비밀번호쯤 뚫리지 않을까? 나는 요즘 횡행하는 보이스피싱 사례를 떠올리며 또 다시 불안해졌다. 하필이면 며칠 전에 1년 기간으로 예금했던 목돈이 만기가 돼서 자동으로 내 계좌에 들어와 있는데 그돈이 털리면 어떡하지? 갑자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견딜 수 없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 어떡해? 나 신용카드 잃어버린 거 맞나? 아님 내가 그걸 어디 딴 데 두고 지금 엉뚱하게 잃어버렸다고 착각하고 난리치고 있는 것 아니야? 내 머리는 온갖 상상과 경우의 수와 논리적 반박과 안심 섞인 위안이 뒤범벅이 되어 뒤죽박죽 복잡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하면서 걱정했던 마음은 천천히 정돈되어 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내가 지갑 바깥쪽에서 그 카드를 꺼낸 적이 없다는 점, 바깥쪽 칸이 빡빡해서 일부러 잡아빼지 않는 한 저절로 빠져서 흘러내릴 수는 없었으리란 점, 혹시라도 그것이 자기 스스로 빠져서 밖으로 떨어졌다면 그런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내가 얼빠진 상태는 아니었으리라는 점, 분명히 오늘은 초록색 카드를 내가 쓰거나 지갑에서 빼낸 적이 없었다는 점 등등을 생각하며 걱정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안심시키려 노력하면서 초조감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은 카드의 행방은 나의 불안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했다.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다시 한번 벤치에 앉아 가방 속의 물건을 다 끄집어 내며 확인해 봤지만 카드는 내 눈앞에서 사라진 채 계속 내속을 태울 뿐이었다. 이젠 어쩔 수 없다. 밖에서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면 집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아니라면 필름이 끊긴 것처럼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어떤 상황에서 카드가 자진해서 스스로 내곁을 떠나간 것에 틀림없다. 일단 집에 가서 확인을 해보고 그래도 없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때 카드 분실신고를 하면된다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신용카드를 3개를 갖고 쓰고 있는데 하나는 남편통장과 연결된 생활비 전용카드이고 하나는 내 통장과 연결된 용돈 전용카드, 또 하나는 그저 현금을 인출할 때만 사용하는 카드이다. 원래는 2개만 갖고 쓰다가 몇 년전에 핸드폰 구입할 때 할인받기 위해 또 하나 만든 것이 이번의 이 난리의 대상이 된 초록색 카드이다. 카드사용료가 많을 수록 할인금액이 높아지기 때문에 요새는 이 카드를 훨씬 많이 사용하고 그전의 카드는 현금인출 용도로만 사용하고 있다. 내 용돈전용카드에 연결된 통장에는 기껏해야 몇 백만원 정도만 항상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잃어버린다 해도 피해가 크지 않았었겠지만 얼마전에 예금했던 돈이 만기가 되어 자동으로 이체되서 그 통장에 들어가 있어서 나의 불안은 그만큼 커져버린 것이다. 전철을 타고 가는 동안 내내 내머리를 쥐어짜게 만든 고민의 원인은 바로 그거였던 것이다.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요새는 카드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당장 피해가 닥쳐올 위험이 적은데도 초조한 마음은 자꾸 나쁜 쪽으로 부풀려지게 마련인 것이다. 뭉게구름처럼 커져가는 불안감에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고 가슴은 진정할 줄을 모르고 쿵쿵 뛰고 있다.
드디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사온 물건을 팽개치다시피 던져두고 어제 입었던 옷의 주머니와 들고다녔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옷의 주머니는 비어 있었고 가방 안팎을 열어보니 가방의 가장 깊숙한 안쪽 지퍼칸 안에 예의 그 카드가 들어있었다. 내 가슴은 이번엔 다시 안도의 흥분으로 쿵덕쿵덕 뛰는 듯했다. 이런, 여기 이렇게 깊숙히 넣어놓고 기억을 못했다니!! 나는 바보같은 내 자신이 미워졌다. 아까 전철 타기 전부터 지금 집에 도착하기까지 약 30~40분간 초조감의 극을 달리면서 나를 징하게 괴롭혔던 걱정이 이 건망증 때문이었다니 !! 도대체 나는 왜 이 카드를 평소에 넣어두던 곳에 두지 않고 이렇게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것일까. 이 바보같은 행위가 이 모든 사단의 근원이었다고 생각하니 허탈하면서 기가 막히고 화가 나기까지 했다. 기억만 해냈으면 하등 불안할 일이 없었을텐데 그거 하나를 기억 속에서 까맣게 지워버려 이런 소동을 치뤘다니 허탈하기 그지 없었다. 마치 블랙아웃이라도 된 것처럼 그 무렵의 행동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났던 것이 이상했다. 그러고보니 이번 사건뿐만 아니라 그동안 일어났던 크고작은 여러 일들이 생각났다. 이건 단순한 건망증이 아니고 혹시 그 말을 꺼내기도 두려운 ‘치매’ 같은 것이 아닐까? 내 가슴은 새로운 불안으로 다시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지난 달에 여러 명의 친구를 만났을 때도 내가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자 친구 한 명이 대뜸 “너 왜그래? 아무래도 이상하니 치매 검사 받아야겠다”라고 돌직구를 날려서 내 머리가 한동안 얼얼해지게 아팠던 적이 있다. 난 그 친구의 ‘심한 말’에 불평을 하기 보단 “내가 정말 왜 이런 거지? 진짜 어디가 이상한 것 아닐까?“라는 걱정이 앞서서 친구한테는 “흐흐 정말 나 이상하네”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하고 말았지만 머릿속은 설명할 수 없는 내 ‘기억력‘에 대한 해답을 찾느라고 끙끙거렸다. 집에 돌아와서도 불안이 가시질 않아서 인터넷으로 ‘치매초기증상’이라는 키워드로 치매증상을 알아보았다. “ 아, 한심한 내 신세여. 어쩌다가 내가 이런 지경에까지 와 있단 말인가?“ 하는 참담한 심경으로 그날의 나머지는 우울한 기분 속에 보냈다. 건망증과 치매증상을 아무리 구분해서 해석하려해도 그게 그거인 것같은 안갯속에서 명확한 대답은 찾아지지 않았다. 몇 가지 구별 기준은 있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아니야, 절대 치매는 아니야. 그저 건망증일 뿐이야”라고 나 자신을 안심시키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 많았고 치매초기에는 그것과 이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란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해서 “그래 나는 치매야 빨리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봐야겠어“라는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확실한 것도 아닌데 나 자신을 괴롭히기 보다는 나를 안심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일까? 그후로 나는 그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오늘 또 이런 일이 생기니 정말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아아, 삶이란!! ‘생노병사’의 구불구불한 어느 언덕쯤에 나는 서있는 것일까? 아무리 부정하려해도 내가 수월치않게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 이것저것 먹어야하는 알약의 갯수가 많아지고 해야하는 집안일 앞에서 자꾸자꾸 뒤로 물러서서 하기 전부터 심리적 부담감을 느끼고 “휴”하는 한숨을 뱉는 횟수가 점점 많아진다는 사실! 바깥으로 외출을 해야할 때는 미리 심신을 너그럽게 풀어놓아 에너지를 비축해 놓아야 한다는 사실! 오늘처럼 뭔가를 자꾸만 깜빡깜빡하고 뒤늦게 허둥지둥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지만 맘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 병원출입 횟수가 계속 늘어난다는 사실! 등등을 점점 부인할 수 없었다. 어쩌랴, 이 모든 것이 노화의 어쩔 수 없는 과정인 것을! 그렇지만 오늘도 나는 나를 위로하기로 했다. ”아냐 단순한 건망증이야. 내가 치매일리가 없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