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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Feb 22. 2022

델로스

폐허로 변한 유적들. 역사의 잔인과 무상함.

  낙소스 섬에 체류하는 5일 동안 그곳 여행사를 통해 Oneday Trip으로 델로스 미코노스 파로스 섬 3개를 여행하고 돌아온 것은 내 생애를 통해 결코 잊을 수 없는 뚜렷한 잔상으로 남을 것 같다. 9시쯤 낙소스 항구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델로스 섬과 미코노스 섬에 들리고 파로스 섬은 가까이에 다가가서 섬의 전경만 보고 저녁 7시쯤에 돌아오는 당일치기 코스였다. 델로스 섬은 미코노스 섬에서 배를 타고 30분 정도 파도를 가르며 바람을 맞으면서 가면 만나게 되는 섬인데 그 독특한 풍경과 폐허로 변한 유적들을 보고 느낀 충격으로 내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델로스 섬은 델로스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역사책에 등장하는 섬이다. 살라미스 해전과 마라톤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아테네는 페르시아제국을 상대하려면 그리스 전역의 도시국가들과 에게 해의 섬들이 동맹을 결성해서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아테네를 위시한 여러 국가들이 B.C.478년에 델로스동맹을 맺기에 이른다. 전쟁에 대비한 기금을 걷고 그 기금을 관장하는 본부를 델로스 섬에 두었기 때문에 델로스 동맹이라 불렸으며 그 이후에는 동맹에 대한 아테네의 힘이 강해지고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면서 동맹의 본부와 기금을 전부 아테네로 옮겼다고 한다. 그러나 아테네가 “그리스의 자살‘이라고 불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패배한 후에(B.C.314년) 델로스는 아테네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누렸고 동서를 연결하는 국제무역도시로 번성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후 B.C.88년에 폰토스 왕 미트리다테스 6세에 의해 처참한 약탈 파괴를 당하고 델로스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후에도 수난의 역사는 계속되어 비잔틴 제국과 베네치안 공국에게 점령됐다가 오스만투르크에게 다시 점령되면서 델로스는 영영 가라앉고 만다. 그 당시의 수난과 약탈로 델로스의 많은 것들이 파괴되면서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존재가 된 것이다.      


  델로스 섬은 신화 속에서도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고대에는 종교적 제식이 섬의 중요 기능 중의 하나였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델로스는 에게 해의 여러 섬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한 섬이었다. 바람둥이 신 제우스는 아내인 헤라여신을 두고 티탄족의 여신인 레토와 사랑에 빠졌다. 레토와의 관계 이후에 쌍둥이인 태양과 예언의 신 아폴론과 달과 사냥의 처녀여신 아르테미스가 태어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질투한 헤라여신의 분노가 극에 이르러 출산예정인 레토를 그리스의 어느 국가나 섬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포고하여 레토는 여기저기를 떠돌며 출산할 장소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바다 위를 떠도는 섬이었던 델로스가 레토를 받아들이면서 출산할 장소를 제공하여 레토는 델로스에서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제우스는 바다 위를 떠돌던 델로스를 쇠사슬로 바다 밑에 단단히 고정해서 그때부터 델로스는 완전한 섬이 되기에 이른다. 그 후로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신들의 탄생지인 델로스는 사람들의 추앙을 받게 되어 신성한 장소가 되며 순례자들의 성지가 되었다.         

   

   델로스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 역사,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들 중 하나인 키클라데스 제도(델로스를 중심으로 낙소스, 파로스, 산토리니, 아모르고스, 미코노스 등 원형으로 빙 둘러서 있는 약 220개의 섬) 안에서 종교적 문화적 상업적 위치가 매우 중요했던 섬이다. 섬 크기는 키클라데스 제도 중에서 제일 작았지만 유물과 유적의 양으로 보았을 때는 근처의 키클라데스 제도의 다른 섬들을 다 합해서 가장 으뜸이다.     

 

  우리가 탄 배가 델로스 섬 가까이로 다가가자 배의 갑판 위에 올라서 하선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전부 “와”하는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왜냐하면 해안가에서부터 바라보이는 나지막한 산의 경사면이 온통 수 천 년 전의 신전 터들과 돌기둥들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섬 전체가 오래된 유적지였고 그곳에서 보게 된 안내책자에 의하면 1920년부터 유적의 보존 목적과 식수의 고갈로 사람들이 살지 않는 무인도로 변했다고 한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한 육지의 모든 부분이 수 천 년 전의 유적들로 뒤덮여 있는 광경은 정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고 한동안 호흡을 멎게 하는 것이어서 형언할 수 없는 묵직하고도 장중한 감동을 느꼈다. 영어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지금 발굴되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땅 속에 묻혀 있는 것들의 25%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하며 계속 발굴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돈이 없어서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술과 돈이 부족한 그리스는 1873년부터 이 섬의 발굴을 프랑스의 아테네 학술단에 맡겨서 현재까지도 발굴과 탐사가 계속 진행 중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발에 차이는 돌덩어리와 깨어진 토기 조각들, 여기 저기 나뒹구는 석판들도 모두 수천 년 전의 유물이라고 생각하니 황송하고 오싹하고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기분마저 들었다. 뙤약볕이 내리쬐고 거친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오는 가운데 델로스 섬 체류 2시간 동안 나는 섬의 반쪽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섬의 뒤편을 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시간이 부족했고 그러기엔 너무 넓었다. 보통 때 같으면 걷다가 1시간만 넘으면 꼭 어디에 앉아서 쉬어야만 하는 내가 여기에서만큼은 남편을 앞질러 씩씩하게 걸어 다니며 이곳저곳을 보는 내내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다. 우리는 배에서 내려 사방에 나동그라져 있는 유물들을 보며 어디에 먼저 눈을 돌려야 하는지 당황해하면서 입구를 지나 우선 왼쪽으로 걸어갔다. 처음 본 유적은 아폴론 신전(Temple of Apollo)이었다. 허물어져서 원래의 건물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고 밑둥밖에 남아 있지 않은 그 신전을 보며 땅 위에 널려있는 석주와 석판들, 큰 돌들이 다 이 신전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하나라도 밟게 될까봐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나서 더 앞으로 가니 아주 작은 문이 나오는데 그 안에도 여신이 다소곳이 서 있었고 그것은 매우 보존상태가 좋아서 깨지고 달아난 부분이 없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가서 신성한 길(Sacred Road)을 따라가니  동쪽 테라스(Lion Terrace)에 줄지어 선 5마리의 대리석 사자 상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사자들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위엄 있게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사자들은 낙소스 섬의 주민들이 아폴론 숭배의 마음을 담아 델로스에 헌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자들은 복사품이고 진품은 섬 중앙에 있는 박물관에 있다. 그 앞쪽으로 호수가 있는데 지금은 말라버렸고 그 호수가 바로 신성한 호수(Sacred Lake)로서 레토여신이 아폴론신과 아르테미스여신을 낳았다는 곳이다. 섬 중앙에 있는 고고학박물관 앞으로 가면 반이 부러져 나간 디오니소스 상(Sanctuary of Dionysus)(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게 디오니소스 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매우 흥미로운 조각으로서 남근을 우뚝 세워놓은 상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이 주위를 돌면서 축제를 즐겼다고 한다)을 볼 수 있다, 섬의 서쪽 편으로 가면 산 중턱에 일곱, 여덟 개의 대리석 기둥으로 남은 이집트 신전과 클레오파트라 신전들을 볼 수 있다. 델로스의 부유한 상인들이 화려하게 집을 짓고 살았던 것을 보여주는 디오니소스 집(House of Dionysus)은 집의 바닥 한 가운데에 디오니소스의 모자이크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그 옆으로는 극장과 아고라가 있어서 델로스 섬 주민들의 오락과 여흥, 시장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서부터 제우스와 아테네의 신전의 흔적이 남아 있는 킨토스 산으로 올라가면 B.C. 3000년 후반의 키클라데스 문명의 유적과 고고학적 자료가 남아있다. 산 정상에서는 바람이 점점 심해지면서 서 있기조차 힘들어진다. 그 아래로 수많은 조각상들과 신전, 광장과 집들과 항구가 내려다보이며 더 멀리로는 짙푸른 에게 해의 바다를 배경으로 델로스 섬의 전경과 여러 섬들의 모습이 점점이 눈에 들어왔다.   

  위대한 섬 델로스는 무인도의 쓸쓸한 분위기와 오래된 유적들의 고적함,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부서지고 쓰러져 있는 유물들의 황폐한 느낌과 섬 전체를 폐허처럼 뒤덮고 있는 유물들의 믿을 수 없는 방대함,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위대한 인류의 유산들 때문에 이제껏 보았던 그리스의 다른 섬들과는 다르게 묵직한 무언가를 가슴에 던져준 것 같았다. 가슴 속에 바람 한 줄기가 휙 하고 지나간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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