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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Feb 23. 2022

제주 풍경

제주의 들판에 서면

                

 제주에 가면 억만 년 전의 시간과 마주할 수 있다. 그곳에선 바람도 구름도 산도 바다도 다 옛것이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시간여행을 떠난다. 상상 속에서 그것들은 옛 모습을 하고 나에게 다가온다. 때론 정답고 때론 사납고 때론 너무 엄숙해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든다. 나는 겸허해지고 소박해지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순수한 모습으로 그들이 건네는 온갖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내가 보는 풍경들은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 거기 있지만 수천, 수만 년 전의 모습이 지금도 잔상처럼 남아서 옛 모습을 기억하게 해 준다. 해풍에 몸이 누운 작은 나무들, 시간과 바람과 물결에 쓸려 깎이고 다듬어진 바위들, 무수한 발자국에 눌려 납작해진 땅들, 억만 년 전의 시간 속에서처럼 여전히 해안 절벽에 밀려와 부딪쳐 부서지는 흰 파도들, 먼 옛날의 전설처럼 찾아와서 잔잔하게 혹은 세차게 부는 바람들, 대지 위에 펼쳐진 하늘과 그 위에 떠 있는 각양각색의 구름들과 옛 연인 같은 흰 안개들... 나는 가슴 벌리고 서서 그것들을 보고 느끼고 무아지경이 되며 그것들을 호흡하며 옛 전설들을 기억해낸다. 그 때에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제주도의 풍경 중에서도 들판을 가장 사랑한다. 나를 눈감게 하고 가슴을 펴게 만들며 조용히 모든 것을 내맡기게 만드는 들판이야말로 내가 제주도, 하면 항상 꿈꾸어왔던 그 풍경을 나에게 보여준다. 거기, 빈 들판에 홀로 서면 다른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그 들판 속에서 한 마리 작은 새인 것처럼 한 그루의 나무처럼, 한 포기의 풀처럼 그 풍경 속에 젖어든다.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다 라는 모든 평가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그것 그 자체로서 장엄하게 존재하는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잠시 동안이나마 그 풍경의 일부가 되어 눈을 감는다. 그것은 정말이지 내가 이 나이동안 살아오면서 전혀 느껴본 적이 없는 어떤 일체감의 순간이다. 사물과 내가 한 몸이 되는 느낌, 자아와 타자가 분리되지 않고 그것 자체로서 완성되는 느낌, 고요하게 다가와서 가슴을 울리는 무엇, 바로 그 느낌을 들판은 나에게 안겨준다. 그 느낌은 다른 어떤 것을 볼 때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그런 감정이다. 산도, 바다도, 숲도 아름답기는 하되 그런 느낌까지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들판은 고요하고 적막하게 거기 그 자체로 존재하면서 내 가슴 속에서 어떤 것을 깨워 일으킨다.     


  푸르스름한 대기와 하얀 안개와 녹색의 들판과 거뭇한 나무들, 지천에 피어난 꽃들과 풀과 제멋대로인 듯 펼쳐진 구릉들, 그 위에 흘러가는 구름과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     

  자연은 언제나 우리를 압도한다. 그 위엄과 미와 고요와 평화는 인간들의 갖가지 희로애락을 말없이 비웃는 듯하다. 인간의 찬탄이나 칭송을 바라는 것도 아닌 홀로 존재하는 꾸미지 않은 자연의 모습 앞에서 인간은 불현듯 겸허해진다. 잊고 지냈던 자연의 장엄한 아름다움 앞에서 인간은 한갓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장식품에 불과한 것임을 자각한다.     


  낮에 가 보았던 용눈이 오름의 부드러운 능선과 황금빛의 풀밭이 잠자리에 들었던 나를 깨워 일으킨다. 그 삼삼한 풍경이 못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풍경은 언제나 그 여운이 길게 남아 가슴 속에 잔잔한 파도를 일으키고 그 알 수 없는 흥분은 편안한 수면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에 펼쳐진 밤 풍경을 바라본다. 교교한 달빛 아래 모든 것들이 잠들어 있다. 고요하고 때 묻지 않은 밤이 온 누리를 덮고 나무와 숲과 먼 산은 검은 그림자로 거기 서 있다. 나는 제주도의 밤도 사랑한다. 그곳엔 밤다운 밤이 존재한다. 인공의 불빛이 없는 칠흑 같은 밤을 나는 사랑한다. 그런 곳에서만 별은 제대로 빛난다. 그 때에 모든 것은 순수한 자기의 모습을 되찾는다. 거기에 불필요하고 지저분하고 군더더기 같은 것은 없다. 본디의 모습 그대로, 그렇게 마땅히 보여져야할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다. 도시의 불빛을 떠나 밤다운 밤을 마주하면 내 영혼도 찌꺼기 없이 맑게 순화되어 그것들과 만난다. 그런 밤에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다.     

   (20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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