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축복과 저주(01)
1999년 10월, 서울
“위험해. 그러다 다쳐.”
부드럽게 타이르는 엄마의 목소리에도 꼬마아이는 장난섞인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풀짝…풀짝… 개울물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는 것 마냥 보도블럭 위를 뛰어다니는 아이는 개구쟁이의 기질이 다분해 보였다. 아이의 발놀림에 어디로 가야겠다는 목표가 딱히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곳으로 뛰었다 저곳으로 뛰었다 하는 모양은 마치 어지러운 발길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곱등이를 흉내내는 듯 했다. 엄마는 활기찬 아이의 모습이 좋았지만 그대로 두기에는 장소가 적당하지 않았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크고 작은 빌딩들이 끝없이 늘어선 번화가에 전쟁같은 하루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었다. 개중에는 지각을 한 것인지 양복을 입고 부리나케 뛰어다니는 이들도 보였다. 그런 곳에서 아이가 앞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장난을 치고 있으니 금방이라도 사고가 날 것 같았다.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지하철 입구에서 한떼의 사람들이 몰려 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엄마는 아이를 다그쳐 불렀다.
“단구야 이리와.”
듣지 못한 것일까 아이는 엄마를 향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점점 더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든 아이는 조금씩 엄마와 거리가 멀어졌고 이내 온 거리를 누비기 시작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딱 이 모습일 것이다. 다행이 사람들은 알아서 아이를 피해가고 있었다. 분명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를 보며 눈쌀을 찌푸리거나 엄마를 찾아 눈알을 부라리거나. 당장 아이를 통제하지 않으면 사단을 내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대부분이 그러려니 하며 신경을 쓰지 않았고 혹 아이와 부딪힐 뻔한 사람들도 유별난 아이에게 흐뭇하게 미소를 지어주며 제 갈 길을 갔다.
정말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구나. 엄마는 자신의 뱃속에서 나온 아이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좋은 일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였다. 그래서 좋아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그 눈빛에 착잡함이 서렸다. 확실한 것은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석 달 만에 외출이구나. 한달에 두번 뿐이었지만 쉬는 날이면 꼭 아이를 데리고 가까운 곳이라도 바람을 쐬러 나가곤 했다. 하지만 여름이 다 지날 동안 하루도 쉬지 못 한 것이 문제였다. 쉴 틈 없이 바쁘게 일이라도 하는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런것도 아니었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걸까? 지치지 않고 팍팍해져 오는 현실이 점점 더 여린 마음을 옥죄어 왔다. 그것 뿐인가. 엄마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가슴이 짓눌린 듯 갑갑하기만 했다. 서른 중반의 여자 그리고 아홉살 아이의 엄마, 선정에게서 길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체 어디서 부터 잘못된 걸까? 그녀의 머리속에 지난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3년 전, 거리에 온통 노란 은행잎이 흐드러지던 늦가을의 어느날이었다. 선정은 궁전 앞에 서 있었다. 실제로 궁전은 아니었다. 그녀가 그렇게 느꼈을 뿐. 그것은 새롭게 오픈한 호텔이었다.
왕복 8차선 도로가 접한 넓은 대지 위에 자리잡은 호텔은 7층 혹은 8층 높이였다. (1층부터 3층까지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다지 높은 건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울에서도 몇 개 없는 200개 이상의 객실을 보유한 큰 규모였다. 때문에 옆으로 늘어선 다른 건물들보다 가로폭이 2배 이상은 길었다. 호텔의 외관은 어디 하나 예사롭지 않았다. 칙칙한 색상의 빌딩 사이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사막의 모래빛깔로 각박한 도심의 도피처 같은 느낌을 주었다. 특이한 것은 이 건축물의 양식이었다.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힘들었다. 3층까지 통합된 저층부는 서양의 바로크 양식 혹은 르네상스 양식을 표방한 듯 외벽을 따라 세워진 큰 기둥 위를 아치형태로 이어놓았다. 마치 비엔나의 오페라 하우스를 연상시키는 이 양식이 호텔 정문의 포르테 코셰와 어우러져 럭셔리함을 더해 주었다. 호텔의 상층부는 모더니즘 아니 브루탈리즘에 더 가까운 아주 실용적인 디자인이었다. 화려한 저층부와는 대비가 되는 단조로움이었다. 그러나 객실의 창문들이 큼지막하게 나 있어 답답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조금만 더 올라가 건물의 최상부에 다다르면 아주 특별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로 기와지붕이었다. 기다랗고 넓은 서양식 건물이 한국 전통의 기와지붕으로 덮여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기와집처럼 건물이 지붕을 떠 받치고 있는 형태는 아니었다. 옥상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올린 것으로 옥상에는 잔디밭과 연못 정원 등의 자연친화적으로 꾸며진 라운지가 마련되어 있었다. 때문에 밤이 되면 라운지 조명이 기와지붕의 처마를 밝히어 멋스러움을 더했다. 그 아래에서 한강을 품은 서울의 전경을 바라본다면 환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낼 것 같았다.
이처럼 과감한 동서양의 조합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아름답기도 했지만 이색적이고 진취적인 느낌이 더 강한 이 오묘한 어우러짐은 꽤나 그럴싸해 호텔에 특별함을 더해주었다.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들 정도로.
어떻게 건물이 이렇게 바뀔 수 있지? 선정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근처에 살고 있는 그녀는 이 호텔이 불과 일년 전만 해도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미라클 호텔. 그 이름까지도 기억이 났다. 하지만 전혀 미라클 하지 않은 모습이 더욱 생생했다. 오래된 대학교나 공공기관을 연상시키는 그저 밋밋한 회색의 건물일 뿐이었다. 그때의 호텔 사정이 어떠했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찾았는지 그녀로서는 관심밖의 일이었기에 알 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무슨 연유로 이 엄청난 규모의 호텔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이 호텔을 인수해서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새단장을 시킨 사람은 자신과는 동떨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실제로 이 사건은 신문 한켠을 장식하기도 했었다. 미라클 호텔이 매각절차를 밟고 있다. 신영그룹이 20년 가까이 운영해 왔지만 각종 비리와 방만한 운영으로 반강제적 사업축소에 들어갔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친인척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것은 호사가들의 입방아였을 뿐 실제로 개인사업가가 호텔을 인수하면서 그 이야기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대신에 호텔을 인수한 사업가의 정체에 대한 말들이 수도 없이 떠돌았다. 모두 다 대기업 혹은 외국계 기업에 넘어갈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업가에 대한 소문은 뭐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것 없이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The City. 건물의 저층부와 상층부 사이, 그 화려함과 단조로움의 경계에 붙어있는 검은색 글씨가 호텔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곡선의 유려함이 강조된 글씨체는 마치 디즈니 사의 로고를 연상시켰다. 조명을 받아 빛나는 그 글씨가 선정은 참 이쁘다 생각했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했다. 더 시..티? 분명 학창시절 배웠던 것 같은데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바로해 정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나 들어가도 되는건가? 선정은 고민했다. 외국을 나가 본 적이 없었기에 아니 한국의 유명한 관광지조차 가 본 적이 없었기에 당연히 호텔에 가 본 적도 없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서슴없이 드나드는 것을 보며 들어가보자 라는 마음을 먹었지만 이내 고급차들이 들어서자 그녀는 어색하게 주춤거렸다. 멋지게 차려입은 여자들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자 남색 가디건 차림의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난 손님으로 온 게 아니잖아. 마음을 추스렸지만 소심한 그녀는 좀처럼 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검은색 제복을 입은 호텔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얼른 눈길을 피했지만 벨보이처럼 보이는 남자는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는 쭈뼛쭈뼛 자초지종을 말했고 벨보이는 별다른 말없이 그녀를 호텔 안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프론트 여직원에게 그녀를 인계했다. 그렇게 잠시후 선정은 예정에도 없던 면접을 볼 수 있었다. 호텔 밖에 서서 고민하던 시간이 허무할 정도로 순식간에 진행된 일이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을 들키지 않으려 선정은 온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럼에도 조금씩 새어나오는 떨림은 입술을 앙 다물어 막아보았다. 그녀는 창가에 자리한 라운지 내에 앉아 있었다. 주위에는 너무도 편안한 자세로 앉아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시선과 대화 소리가 그녀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원래 이런 곳에서 면접을 보는건지 아니면 아직 면접이 시작되지 않은 것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이쪽으로 앉으라 해서 앉았을 뿐. 자신감이 없는 그녀는 긴장감을 쫓기 위해 조용히 심호흡을 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공기중에 부드럽게 퍼지는 갓 볶은 커피 향이 그나마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선정의 앞에는 마흔이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의 손에는 그녀의 이력서가 들려 있었다. 선정은 슬며시 남자의 표정을 살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을 노광섭이라 소개한 남자는 호텔의 총괄 매니저라고 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영화배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얀 피부에 곱상한 얼굴과 호리호리한 체격이 정말 자기관리가 뛰어난 사람같아 보였다. 거기에 아주 비싸 보이는 고급 원단의 양복을 차려입고 있으니 정말로 다른 세상의 사람 같았다. 혹 어떤 이들은 기생오라비 같다며 싫어할 지도 몰랐지만 선정은 아니었다. 그녀는 실제로 이렇게 잘생긴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허나 떨리는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왜 이 일을 지원했죠?”
처음으로 질문이 왔다. 선정은 광섭의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를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가까워서요.”
광섭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이미 조잡한 이력서에 실망을 하고 있던 그는 성의없이 대답을 하는 그녀를 보며 더이상 면접을 진행할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일을 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면접 기회를 준 것 만으로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는 낮은 한숨을 내뿜으며 운을 떼었다.
“저기요.”
선정은 그가 실망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알아 챌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녀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솔직함 뿐이었다. 선정은 용기를 내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이를 돌봐야 해요.”
정말 뚱딴지 같은 소리였지만 광섭은 그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자리를 끝내려던 그가 선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 멀리 몇가구 없는 이름도 모르는 섬에서 살다 온 걸까? 이력서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만도 했다. 그런데 대체 뭐가 그리 무서워서 몸을 저리 떨고 있는 건지. 보고만 있어도 짠한 느낌이 전해지는 이 여인을 어떻게 해야하나. 그는 고민했다. 왠지 이야기를 더 들었다가는 채용을 하는 것도 그냥 돌려보내는 것도 더 어려워 질 것 같았다. 그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정이 많은 자신의 여린 성격이 채용심사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이런 부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잡음이 있었는지 당해 보았기에 그는 더 객관적이고 냉정해 지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10분 후에는 객실 서비스 향상을 위한 방안 이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두세달에 한번씩 열리는 행사는 말이 좋아 세미나지 관련 학과의 교수들이 와서 맨날 똑같은 말이나 하다가 결국에는 제자들 취업을 위해 눈도장을 찍는 자리였다. 이 말인 즉 그가 들들 볶이는 자리라는 말이었다. 일찍 가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그는 결국 조금 더 자리에 앉아 있기로 했다.
광섭은 선정이 가져온 텅 빈 이력서를 기분 나쁘지 않게 돌려주며 물었다.
“이 쪽 일은 해 본 적이 있나요?”
선정은 두 손을 내밀어 이력서를 받았다. 그 모습이 마치 임금의 교지를 받드는 것 같았다. 부끄러운 이력서를 감추려는 듯 뒤집어 내려놓은 그녀는 아니오 라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비슷한 일은요?”
선정은 시선을 돌려 시원하게 트인 로비를 바라보았다. 신세계였다. 광채가 흐르는 하얀색 대리석 바닥과 그물을 쳐 놓은 듯한 격자 무늬의 천장, 중앙에 설치된 금빛 폭포수 조형물과 그것을 기준삼아 좌우로 대칭이 되는 크리스털 샹들리에. 눈길이 닿는 모든 것이 고급스러웠다. 이런 곳에서 일하는 것을 꿈 꾸어도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 때 그녀의 눈에 띈 것은 정문으로 들어오는 세 명의 인부들이었다. 잡다한 공구와 큼직한 타일을 실은 손수레를 끌고서 들어온 그들은 누구의 안내도 없이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호텔의 직원들도 손님들도 그들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다. 이 화려함을 만들어 내는 것도 인간이고 그것을 누리는 것도 인간이며 또한 그것을 지켜내는 것도 인간이었다.
‘그래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지 뭐.’
마음을 다잡은 선정은 곧장 프런트 데스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너무나 화사한 미소를 띤 여자가 있었다. 처음 호텔에 들어서서 어리바리하던 선정을 친절하게 안내해 준 직원이었다. 젊고 단아한 그 모습이 호텔에 들어서는 이들이 제일 먼저 보게 되는 얼굴이리라. 그것 만으로도 호텔의 품격이 올라가는 듯 했다. 선정은 똑같은 복장을 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몸매가 드러나는 투피스에 정갈하게 말아올린 쪽진 머리, 과하지 않은 화장에 친절한 미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선정은 얼른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잠시후 금발의 외국인들을 안내하는 직원을 보며 선정은 자신의 헛된 망상을 꾸짖었다.
광섭은 한눈을 팔고 있는 선정을 보며 이마에 주름을 세웠지만 이내 듣지 못했겠거니 생각하며 다시 질문을 했다.
“비슷한 일을 해 본 적 있어요?”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인지한 선정이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니요 없어요.”
“그럼 무슨 일을 했었죠?”
선정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그녀를 광섭이 조심스럽게 살폈다.
“설마 아무일도 안 해본 건 아니죠?”
무슨 사연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선정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광섭의 표정이 굳어졌다. 서른 다섯이 되도록 아무일도 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나? 이건 분명히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물론 집안이 유복해서 공부만 했다거나 예술에 빠져 사는 경우도 있었다. 아니면 여행이나 다니거나 부질없는 놀이에 빠져 팔자 좋은 인생을 사는 경우도 있을테고. 하지만 눈 앞의 여인은 그런 부류의 삶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보였다. 소박한 옷차림과 화장기 없는 얼굴에 푸석푸석한 피부와 마른 몸매를 보면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살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선정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무살 때, 6개월 정도 공장에서 일 한 적이 있어요.”
이력서에 적은 내용이 아니었다. 너무 초라한 경력이라 차라리 안 적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빼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이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연 것이었다.
광섭은 그럼 그렇지 하며 아마도 대화를 하다보면 새로운 것이 계속 나올거라 생각했다.
“거기서 무슨 일을 했어요?”
역시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리미 조립이요.”
광섭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척 했지만 사실 너무 쌩뚱맞은 대답이라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는 더 물어봤자 쓸데없을 거라 싶어 얼른 다른 것을 물었다.
“다른 건요? 그거 말고 다른데서 일 한 건 없어요?”
“네.”
광섭은 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럼 일 말고 공부나 뭐 자격증 같은 건요?”
제발 뭐라도 좀 있어라. 광섭의 바람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없어요.”
광섭은 이제 더이상의 질문은 의미가 없음을 느꼈다. 이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길 찾아 온 걸까? 그는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그것이 곧장 선정에게 전달되었다.
“그럼 할 줄 아는 게 뭐에요?”
선정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런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늘상 하는 일,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이런것을 물어보는 건 아닐 터였다. 이제껏 뭐 하나 제대로 배운 게 없구나. 순식간에 치솟아 그녀의 얼굴에 홍조를 만든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세상에 소심한 사람들을 다 모아 놓아도 그 중에서 으뜸을 다툴만한 사람이 선정이었다. 사람들과는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였고 어떤 생각이 있어도 전달하지 못하였다. 워낙 말 수가 적고 낯을 가리다 보니 사람들과 섞이는 것조차 힘들었고 어쩌다 함께 하게 되면 눈치를 보며 수동적으로 움직였다. 마음속으로 어렵게 어렵게 모은 용기는 작은 난관에만 부딪혀도 게 눈 감추듯 사라져 버렸으며 마음에 난 작은 생채기에도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이런 그녀가 새로운 도전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까. 그렇게 시간만 보내다 또 흐지부지 될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선정을 움직이게 만든것은 삶에 대한 절박함이었다. 그리고 아이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그녀는 몇 달 안에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생계가 곤란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는 더이상 아이를 보는 일에만 메달릴 수 없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이곳 저곳 일을 알아보려 했지만 어떻게 찾아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주인집에 부탁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괜히 민폐가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렇게 갑갑한 생각을 하던 그녀가 더시티 호텔의 채용공고를 본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감자껍질을 까는데 쓰려고 주워온 신문에 광고가 실린 것이었다. 선정은 그곳이 어디인지 대번에 알았다. 집에서 한 블럭 떨어진 곳에서 대규모 공사가 진행중인 건물이었다. 급여와 근무조건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집에서 가까운 일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일하는 중간에 한번이라도 아이를 보러 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정에게 호텔 취직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이력서에 적어 넣을 것이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자퇴… 최종학력 중졸의 인생은 빈 칸 투성이였다. 선정은 용기를 내어 이름과 주소, 학력을 적어 넣고 마지막으로 사진을 붙였다. 그렇지만 초라한 이력서는 반쪽으로 찢겨 나가고 말았다. 그녀 스스로도 취직이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에도 다음날이면 또 쥐똥만큼의 용기를 내어 이력서를 썼고 그것은 또 다시 찢겨 나갔다. 용기와 두려움, 희망과 현실 사이를 남의 집 담벼락을 넘듯이 혼자서 몰래 오가는 사이 한달이라는 시간이 흘러 버렸다. 그동안 그녀가 남긴 것은 쓰레기통에 쳐박힌 스무장의 이력서 뿐이었다. 그것이 열 장이 넘어가던 순간부터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한 증명사진은 그녀의 손때와 엉겨붙어 낡고 지저분한 종이 쪼가리가 되어 있었다.
며칠이 더 지나서 좋지 않은 느낌에 병원에 데려간 아이가 발달장애 판정을 받았던 날이었다. 삶의 끝자락까지 몰린 선정은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어 다시 이력서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 꼬깃꼬깃해진 사진을 찾아 조심스럽게 붙였다. 그렇게 이력서를 챙겨 무작정 호텔로 찾아 간 것이었다.
할 줄 아는게 없으면 배우면 되지 라고 생각하며 일생일대의 용기를 낸 선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면접을 보게 되니 순진한 생각에 빠져있던 스스로가 너무 창피할 따름이었다. 자신의 절박함이 타인에게는 무례함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또 한번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박선정씨! 여기 아는 사람 있어요?”
광섭의 말투는 완전히 냉소적으로 변해 버렸다. 해도해도 너무 하잖는가. 이토록 성의없이 면접을 준비해 오면 어떤 사람이 좋아하겠는가. 아무리 정이 넘치고 마음이 약한 광섭이라 해도 이런 여자에게 일자리를 내어 줄 수는 없었다. 혼자서 일하는 곳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의 입장도 생각해야 했다. 그는 더이상 면접을 볼 생각이 없었지만 대체 이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이미 면접은 끝났다고 느낀 선정이 조용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시종일관 의기소침해 있는 그녀가 광섭은 갑갑하기만 했다. 그것이 이제는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 같아 짜증이 치밀었다. 그는 까칠함을 듬뿍 담아 말했다.
“뭐가 죄송한데요?”
그렇게 크지 않은 목소리에도 선정은 선생님께 혼나는 아이처럼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보자 광섭은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말 대책없이 오셨네. 일 하고 싶은 건 맞죠?”
“네.”
“그럼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알려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제가 도와드리죠.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와서 일하고 싶다고 하면 세상에 누가 그냥 일을 시켜주겠어요. 이력서도 이렇게 대충 끄적거려오고. 누군가의 시간을 빼앗으려면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할 거 아니에요.”
그냥 돌아가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만난지 5분밖에 안된 사람에게 굳이 불편하게 이런 말들을 늘어 놓을 필요가 있을까. 그럼에도 그는 거친 감정을 드러냈다. 이제 막 사십줄에 들어선 그에게 선정은 막내 동생 뻘이었다. 그가 보기에 선정은 이 호텔이 아니라 어디를 찾아가도 일자리를 얻지 못한 것 같았다. 굳이 외모를 논할 필요도 없었다. 대체 저 순진함을 아득하게 넘어선 모자람은 뭐란 말인가. 그는 따끔한 충고로 정신을 차리게 할 생각이었다.
“진짜 할 줄 아는 것 없어요? 이제껏 뭐하면서 사신 거에요?”
“아이를 돌봐야 해서…”
광섭은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결국 또 마음이 약해진 것이다. 그는 아직 미혼이었고 아이도 없었다. 그런데 왜 아이 얘기만 나오면 측은한 마음이 드는 건지. 그것은 선정의 상황이 대충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남편없이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여자… 미혼모 아니면 이혼 그것도 아니면 사별? 뭐가 되었든 찾아보기 힘든 경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선정이 계속 아이를 들먹이는 걸로 봐서는 그보다 조금은 더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 듯 했다. 그가 넌지시 물었다.
“아이가 몇 살 인데요?”
“여섯 살이요.”
“아이가 아픈가요?”
“네.”
광섭의 예상은 들어 맞았다. 그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가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 보았다. 혹시나 경찰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말이다. 그가 말꼬리를 흐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남편분은…?”
“죽었어요.”
아! 그는 순간 그 말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지 못하였다. 너무도 무덤덤한 선정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거짓을 말 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잠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선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가련함이 무기라면 그녀는 지금 완전무장한 상태였다. 측은한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 들었고 뒤이어 미안한 마음이 쓰나미처럼 그를 집어 삼켰다. 자신이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지탱하고 살았을 여인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들었던 건지. 그는 괜한 오지랖에 대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는 더이상 질문을 건네지 않았다. 그 어색한 침묵 뒤에서 그는 진심으로 갈등했다. 일자리 하나 내어 줄 권한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지만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을 들였다가 일어나게 될 분란도 생각해야만 했다. 그는 힘든 결정을 내렸다. 안타깝지만 그녀의 불행한 사정이 고용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사연이 생각보다 더 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녀의 삶을 더 깊이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면접이 끝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면 서로가 금방 잊혀질 사람일 뿐이었다. 누구나 사정이 있고 그 사정은 스스로 헤쳐나가야만 하는 것이니까.
그는 자연스럽게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박선정씨. 사정이 딱한 건 알겠지만…”
“여~ 노 과장! 아니 지배인님.”
걸걸한 목소리가 광섭의 말을 통째로 집어 삼켰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로비 중앙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선정은 건장한 체격의 중년인을 알아 보았다. 조금 전 프런트 여직원을 보며 상상을 펼치던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서양인 무리에 섞여있던 신사였다. 손님들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활기가 넘치는 얼굴에 여유가 흘렀고 걸음걸이에도 자신감이 베어 있었다. 지체가 높아 보이는 복장이었지만 거만해 보이지 않았고 우렁찬 목소리에는 사람을 끄는 힘이 느껴졌다.
남자가 가까이 오려하자 광섭이 그러지 말라는 듯 얼른 일어나 먼저 다가갔다. 그렇게 두 남자는 선정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서서 대화를 주고 받았다.
“얘기는 잘 됐어요?”
광섭이 먼저 묻자 중년의 신사가 대답했다.
“다음 달부터 10톤씩 받기로 했다.”
“일사천리네요.”
“내가 누구냐! 대한민국 무역왕 장성필이다 임마.”
호방한 성격을 거침없이 뿜어대는 사내였다. 그러면서도 무례하거나 실없어 보이지 않는 것이 단지 그가 멋드러지게 차려 입은 명품 수트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당한 풍체에 절제된 자신감과 갈무리된 여유는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느껴지게 했다.
장설필 회장. 스스로를 무역왕이라 자처하듯 그는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쌓은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경제인들 사이에서도 그만큼 가파르게 성공 가도를 달린 이는 많지 않았다. 정재계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을 정도로 그의 주가는 고공행진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외의 평가는 극명하게 양분되었다. 누군가는 그를 타고난 사업가라 칭송하며 장보고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허나 더러운 장사꾼이라 깎아내리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이유는 있었다.
육군사관학교 15기 출신인 그를 항상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있었다. 바로 하나회였다. 그가 12.12 사태의 결정적 역할을 한 비밀 사조직, 하나회 출신이라는 것은 공식적으로 밝혀진 사실이 아니었다. 그래서 추측만 난무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는다는 듯 하나회와 관련해 단 한번도 입장을 표명한 적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의혹은 점점 불어나 작금에 와서는 그가 전두환의 비자금으로 이 자리까지 왔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역시나 그는 철저하게 무시하였다.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한 이듬 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무난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1983년 17사단으로 배정되었다. 하지만 그는 소위에 임관한지 1년도 안되어 군생활을 정리하고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갔다. 그가 어떤 연유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누구도 알 지 못하였다. 그야말로 돌발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미궁속에서 살아갈 것 같았던 그가 모습을 나타낸 건 1986년 서울 국제무역박람회였다. 놀라운 것은 그가 참관 기업이 아닌 정부측의 인사로 참여했고 국제기업의 총수들을 일일이 에스코트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논란의 도화선이 된 것이었다.
다음해부터 그가 전세계를 오가며 사업가로서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의 출신과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난 행보가 오버랩 되어 전두환이 뒤에 있을 거라는, 적어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거라는 호사가들의 입방아가 끝이질 않게 된 것이었다.
그가 진짜 하나회를 등에 엎고 승승장구 한 것인지 아니면 그를 시기하는 이들의 협잡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실력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사업을 보는 안목과 과단성은 그의 행보를 통해 쉽게 검증 가능한 부분이었으니 차치하더라도, 폭넓은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것을 풀어내는 유려한 화술은 그를 만나 본 사람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정도로 탁월하였다. 이런 범상치 않은 인물이 일년 전 또 한번 세간의 주목을 크게 받게 되었다. 바로 미라클 호텔을 인수하면서였다.
광섭이 신기한 듯 성필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한 거에요?”
“싱가폴 NTUC랑 계약할 수 있게 해준다니까 바로 오케이하던데.”
광섭은 금새 수심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근데 이거 남해 유통 하대표가 공들이던 거 아녜요? 괜찮겠어요?”
“니가 걱정할 일 아니야.”
광섭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캐나다 오션필드 기업과 랍스터 유통 독점 계약을 따낸 것에 관한 대화였다. 내용은 비즈니스에 관한 것이었지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태도가 보통의 사장과 직원 관계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훨씬 더 밀접해 보이는 것이 오랜시간을 함께해 온 사이가 분명해 보였다.
“부산 메리어트랑 스카이워크에 500키로씩 들어가고 나머지는 이쪽으로 올라 올거야.”
“감대표가 많이 바빠지겠네요.”
“그래. 다들 더 바빠질거야”
진중한 표정으로 말하던 성필이 돌연 광섭을 향해 따지듯 물었다.
“근데 넌 일 안하고 여기서 뭐하고 있냐?”
“면접이요.”
광섭이 선정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죄를 지은 사람마냥 고개를 숙인 선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정말로 처연하기 그지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눈길을 준 성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면접? 1차 채용 마감한 거 아니었어?”
“그게… 일을 하고 싶다고 불쑥 찾아 왔어요.”
난감한 표정으로 말하는 광섭을 보며 성필이 호쾌하게 말했다.
“잘 됐네. 객실부랑 조리부에 몇명 더 충원해야 한다며?”
이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헛갈리는 듯 광섭은 멀뚱한 표정이었다.
“그건 그런데…”
성필이 답답한 듯 물었다.
“그런데 뭐?”
“아무런 경력이 없어요.”
“경력? 그게 뭐가 중요하냐. 일이야 배우면 되는거지. 경력과 실력은 비례하는게 아니야. 널 보면 알잖아. 너는 뭐 경력이 없어서 일을 그렇게 하는거냐?”
광섭은 어이 없다는 듯 웃었다.
“일이야 시켜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경력 화려한 애들중에 의외로 삐리리한 놈들 많다. 반대로 말이야, 기대도 안 했는데 사람 놀래키는 애들도 적지 않아. 그래서 이력서로는 최소한만 검증하면 돼. 중요한 건 의지야 의지! 얼마나 일하고 싶었으면 저렇게 막무가내로 찾아 왔겠냐?”
같은 상황을 완전히 반대로 인식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였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의 가치 판단은 옳고 그름의 영역보다는 성공과 실패의 영역에서 훨씬 더 많은 이견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인식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요인은 다양하지만 그 중 가장 큰 것이 경험이었다. 그래서 무언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대부분 경험이 많은 이의 의견을 따르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유교의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두드러지는 경향이었고, 승승장구하며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 온 장성필 역시 자신의 경험을 제일 큰 자산이라 믿는 사내였다.
성필이 턱을 어루만지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 경험상 말이야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사람 많지 않다. 너는 죽어도 못할 걸.”
그 말을 온전히 인정할 수는 없는 광섭이었다. 지금은 사업의 성패를 좌지우지 할만한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광섭은 원칙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자존심을 살포시 긁어 놓은 성필의 마지막 말이 화살이 되어 돌아갔다.
“그렇게 경험을 중요시하는 분이 경험이 없는 사람을 뽑으라니 말이 됩니까?”
“그게 그 말이 아니잖아.”
성필은 눈알을 부라렸다.
“원칙이라는게 있습니다.”
“너야말로 지금 앞 뒤가 맞다고 생각해? 원칙 따지는 놈이 면접은 왜 봤냐?”
“그거야 나중에 필요하면…”
정곡을 찔린 광섭이 말을 얼버무리자 성필이 가당치 않다는 듯 잘라버렸다.
“웃기고 있네. 딱 보니까 구구절절 사연 들어주고 있었구만.”
유치한 입씨름이 오가고 나서야 광섭은 깨달았다. 성필이 지금 자신의 마음속에 남을 찜찜함을 대신 해결해주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처량하게 앉아있는 여자. 예정에 없던 면접.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경력이 없다는 말. 이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성필은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도 없는 결정을 내리려 하는 자신을 대신해 나선 것이었다. 어쩌면 이런 통찰력이 성필의 진짜 무서운 능력 일런지 몰랐다. 광섭이 피식하고 웃으며 꼬리를 내렸다.
성필이 태도를 바꾸어 부드럽게 말했다.
“꼼꼼한 건 좋은데 너무 빡빡하게 굴지마라. 임원 선출하는 것도 아닌데. 그러다 잘생긴 얼굴에 주름 생긴다.”
광섭이 민망함을 감추려 괜히 툴툴 거렸다.
“이럴거면 왜 저한테 뽑으라고 한 거에요? 직접 뽑으시지.”
성필은 막내 동생을 보는 듯한 따뜻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 없으면 니가 해야지.”
광섭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성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외로이 앉아 있는 선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기다리게 하는 거 아니야? 가서 일 봐.”
성필은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바쁜 일이라도 생긴 사람처럼 엘리베이터를 향해 로비를 가로 질렀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광섭은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선정이 있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광섭이 다시 자리에 앉자 선정은 어깨를 좁히며 또 움츠러 들었다. 그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 되는거냐 생각했다. 무거운 눈빛으로 선정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오랜 군사정권이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뚱딴지 같은 소리에 선정을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대한민국은 이제 문민정부 시대를 맞이했어요. 이 정부는 평화와 민주를 가치로 내세우고 경제 정의를 실현하겠다 했죠. 실제로 많은 개혁을 단행하며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집권 후반기에 들어선 지금 점점 민심을 잃어가고 대통령은 레임덕으로 치닫는 중입니다. 너무 큰 사고들이 많았잖아요. 배가 침몰하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말입니다.”
선정은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경제만큼은 나쁜 상황이 아닙니다. 처음으로 국민소득 1만달러를 넘어섰죠. 정부는 세계화를 외치며 개방의 물결을 탔고 때마침 출범한 WTO의 영향으로 증시는 연일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어요. 그 때문에 외국인 투자자와 기업인들의 방한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서울에서의 호텔 비즈니스가 한창 호황을 누리고 있는 이유죠.”
용기를 내어 광섭과 눈을 맞춘 선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광섭이 대답을 해주었다.
“새시대가 왔고, 우리 호텔은 바쁠거라는 얘기에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그가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각오하라는 말입니다.”
몇 초가 흐른 뒤에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된 선정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언제부터 나올 수 있어요?”
이미 마음을 비우고 아이 생각을 하고 있던 선정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이에요?”
“너무 좋아하진 말아요. 우선은 계약직으로 채용하는 거니까.”
그녀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을 것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일은 잘 할 수 있겠어요?”
처음으로 선정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게 인생이었고 그래서 충분히 살아 볼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절망속에 살던 선정은 태어나 처음 스스로의 힘으로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초라한 그녀의 인생도 화려한 서울의 호텔도 이제 막 새로운 도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어떤 시련이 또 그녀를 덮쳐올지 알 수 없었지만 선정은 오직 아이만을 생각했다. 그것만이 그녀의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힘이었다. 이제껏 들려주지 않았던 기운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네. 잘 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