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땅구 05화

땅구

1. 축복과 저주(05)

by 유봉

선정이 자리를 비켜준 10분 동안 백문조 교수는 단구에게서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때문에 그는 선정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목소리의 정체가 뭔지 다음에 올 때는 알려주셔야 됩니다.”

단구의 정확한 상태를 알기 위해서 선정에게 메신저 역할을 부탁한 것이다. 어차피 선정이 아니면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지만 교수는 굳이 메신저라는 말을 붙여 그녀에게 책임감을 불어넣었다.

설거지를 마친 선정은 고무장갑을 벗어 선반 위에 가지런히 널었다. 그리고는 행주를 집어들고서 싱크대 위에 물기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단구야.”

“응.”

건성건성한 대답이 들려오자 선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단구는 항상 있는 그 자리에 배를 깔고 누워 있었다. 8평 크기의 주방이 딸린 거실과 4평 남짓한 방 그리고 작은 화장실 하나가 전부인 좁은 집안에서 단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은 현관 앞이었다. 집으로 들어와 신발을 벗고 올라서서 그대로 엎어져 있는 꼴이었다. 참으로 별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정에게는 자연스런 일상이었고 이것이 비단 집에서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었다.

단구는 어딜 가든 특정 장소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병원에 가도 식당에 가도 심지어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에도 꼭 같은 자리만 고집했다. 선정이 이유를 물었지만 단구는 그곳이 제일 안전하다는 알 수 없는 말만 했을 뿐이다. 선정은 그것이 단구가 보이는 정신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을거라 추측했고 백문조 교수 역시 동의하였다.

한창 게임에 정신이 팔려 있는 단구를 보며 선정이 물었다.

“단구는 아빠 안 궁금해?”

듣는 둥 마는 둥 이었다. 두 손에 꼭 쥔 휴대용 게임기가 단구에게는 더 중요한 듯 했다.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명하에게 받은 닌텐도 게임보이였다.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사 준 것이었지만 공부에 관심이 없는 단구는 틈만 나면 게임기를 붙잡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꼬마 악동에게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 줄 최고의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조막만한 두 손의 움직임에 따라 작은 흑백 화면속의 슈퍼마리오가 부리나케 뛰어다녔다.

“왜?”

성의없는 대답이 들려오자 선정은 하던일을 멈추고 단구에게 다가갔다. 엄마가 옆자리에 와 앉는 동안에도 피치공주를 구하기 위한 마리오의 모험은 멈추지 않았다. 잠시 단구를 바라보던 선정이 넌지시 물었다.

“왜 아빠에 대해서 안 물어봐?”

“모르니까.”

이 짧은 대답은 선정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여실히 깨닫게 해주는 회초리였다.

선정이 기억 저 편에 깊숙이 묻어두었던 한 사람. 감당할 수 없는 울렁임이 또 다시 속을 뒤집어 놓을까 차마 꺼내지 못했던 그 사람. 허나 이제는 꺼내야만 했다. 잊혀지고 잊혀져서 평화로운 삶을 살길 간절히 원했지만 자신을 세상에 있게 한 아버지를 그저 모르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아이의 모습은 그녀가 원한 삶이 아니었다. 선정의 마음속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대단할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 아빠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아빠를 단구가 쏙 빼닮았다는 사실을.

사진 한장이 불쑥 드리워져 게임기 화면을 가렸다.

“아 왜 그래~”

단구는 귀찮다는 듯 앙탈을 부렸다. 그리고는 얼른 몸을 틀어 게임을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집중이 흐트러진 사이 얄궂은 효과음과 함께 마리오는 허무하게 죽어 버리고 말았다.

“아 엄마땜에 죽었잖아.”

선정은 또 다시 사진을 들이밀었다.

“이게 누군지 알아?”

단구는 게임기를 내려놓고 사진을 받아들었다. 사진속에는 포대기에 쌓인 갓난 아이를 안고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는 단구가 괜히 신경쓰인 선정이 말했다.

“단구 애기때 기억 안나지?”

“이게 나야?”

단구가 반응을 보이자 선정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어때? 단구 같애?”

“엄청 쪼그매.”

단구는 손가락을 사진에 대보며 히죽거렸다.

“엄마 뱃속에서 금방 나온거야.”

“으엑 이상해!”

엄마의 말이 끔찍하게 들렸는지 단구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가만두지 못했다. 그 모습에 선정이 미소를 지었다. 단구는 이내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선정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이 아저씨가 아빠야?”

“응. 단구랑 많이 닮았지?”

단구는 한동안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사진 속 남자는 보는 사람도 행복해 질 만큼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단구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홉살 인생에 처음 등장한 아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그런 단구를 지켜보던 선정이 조용히 일러주었다.

“단구가 태어나서 아빠가 엄청 좋아했어.”

그녀의 말이 단구의 마음 속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진짜?”

단구의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을 느낀 선정은 가슴이 울컥거렸다. 작고 외로운 아이가 무엇에 목말라 했는지 정확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단구에게는 친구도 선생님도 없었다. 유달리 작은 체구와 놀림을 받을 정도로 투박한 외모를 가진 아이에게 호감을 갖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혹 관심을 갖는 이가 있다면 그건 희귀한 생명체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나마도 아이의 괴팍한 성격을 보게 되면 혀를 내두르고 돌아섰지만 말이다. 이 넓은 세상에 아무런 편견없이 단구를 좋아해주는 사람은 엄마인 선정을 제외하면 선정의 친구 명하 뿐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을 향한 단구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문이 닫혀가고 있었다. 이를 보는 선정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였다. 하지만 언제 한번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있던가. 그녀는 아빠 이야기에 들 뜬 반응을 보이는 단구를 보며 반성했다. 단구를 절대적으로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조금 더 일찍 알려주지 않은 것을 말이다.

“그럼. 단구 이름도 아빠가 지어준거야.”

그녀의 말은 단구의 흥미를 돋구었다.

“근데 왜 단구라고 지은거야?”

선정은 머뭇거렸다. 그녀 역시도 남편 장우에게 던졌던 똑같은 질문이었다. 짧을 단 자에 구원할 구 자, 난해하기만 한 이름을 짓고는 만족해 하던 남편이 떠올랐다.

“그건 아빠가 비밀이랬어. 나중에 단구가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래.”

선정은 남편의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고 단구는 생각에 빠졌다.

선정은 기분이 이상했다. 단구와의 대화가 자연스레 장우를 떠올리게 하자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것이다. 묻혀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꺼내어 지는 순간이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히 원망이라는 포장지에 쌓아서 묻어 두었는데. 8년이라는 시간이 그것을 다 풀어헤쳐 놓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용서라는 말을 온전히 꺼내 쓰기에는 장우가 짖이겨 놓은 선정의 가슴이 아직 다 아물지 못하였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소박한 꿈을 꾸며 하루하루 행복한 삶을 보내던 그녀를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람. 핏덩이 같은 자식과 그토록 사랑한다던 아내를 두고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사람. 선정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엄마는 아빠가 보고 싶구나?”

불쑥 내뱉은 단구의 말에 선정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들킨 사람처럼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니야.”

“에이 어제부터 계속…”

짓궂은 얼굴에서 흘러나오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응? 어제?”

선정은 어제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처음으로 백문조 교수를 만나고 온 날이었다. 가는 길에 작은 소동이 있었고 오는 길에는 늘 그랬 듯 만복에 들러 짜장면을 먹은게 전부였다. 그리고는 집에 와서 피곤해 하는 단구를 일찍 재운 기억밖에 없었다. 짜장면을 먹으며 단구가 꺼냈던 말을 까맣게 잊어버린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단구는 씨익 웃어보이며 대충 얼버무렸다.

“별 거 아니야.”

선정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단구는 아빠 안 보고 싶어?”

아무런 의미 없는 질문을 왜 하냐는 듯 단구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제 볼 수 없잖아.”

“아니야. 눈을 감으면 볼 수 있어.”

단구는 김이 새는 소리를 내며 다시 게임기를 집어들었다.

“진짜야. 단구는 눈 감아도 엄마 얼굴 떠올릴 수 있잖아?”

“당연하지. 근데 아빠는 떠올릴 수 없어.”

“엄마가 도와줄께. 엄마가 단구 머릿속에 아빠를 그려줄께.”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던 단구가 딱 잘라 말했다.

“싫어.”

단구는 다시 게임기를 켰다. 어린 단구에게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 생각을 하던 선정이 안되겠다 싶어 작전을 바꾸었다. 그녀는 단구에게 가까이 몸을 기울이며 은밀하게 말했다.

“비밀 하나 말해줄까?”

“무슨 비밀?”

단구가 호기심이 동한 듯 선정을 쳐다보았다. 효과가 있자 선정은 다시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빠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어.”

“왜?”

“아빠한테는 어떤 목소리가 들렸대.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는 목소리.”

단구의 표정이 얼어버렸다. 아홉 살 아이에게서 찾아 보기 힘든 차가움이었다. 그런 아이를 살피며 선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구도 예전에 엄마한테 그랬었지? 목소리가 들린다고?”

단구는 역시나 대답이 없었다. 이런 모습이 낯설었지만 선정은 이것을 넘어서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따뜻한 손길로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엄마한테 말해주면 안돼?”

단구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적 갈등이 극에 달했는지 단구는 선정의 눈을 마주쳤다가 다시 바닥을 보고 또 마주쳤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 모습에 선정은 확신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녀가 단구의 얼굴에 두 손을 가져다 대고는 살며시 들어올렸다. 그리고 강제로 눈을 맞추었다. 짜부가 된 얼굴을 하고서 단구는 하염없이 선정을 바라보았다.

선정은 왜 이렇게 단구가 뜸을 들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이 단구의 입을 열지 못하게 하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참고 기다렸다. 그녀는 단구가 분명히 말을 해 줄 거라 믿었다. 한번도 엄마의 말을 거스른 적 없는 착한 아들이니까. 마침내 단구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그녀가 기대하던 말이 아니었다.

“어? 이모다!”

이 쌩뚱맞은 말에 선정은 이마를 찌푸렸다.

“응? 무슨 말이야?”

단구는 금새 기분이 좋아진 얼굴로 말했다.

“명하이모 왔다고.”

쿵쿵쿵. 누군가 현관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단구는 선정의 손길을 잽싸게 빠져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현관 앞에 정말로 명하가 서 있었다. 선정이 놀랄 새도 없이 명하의 생기발랄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땅구. 이모 기다리고 있었어?”

마치 주인을 기다린 강아지를 예뻐해주는 것처럼 명하는 단구를 격하게 반겨주었다. 원래의 개구쟁이로 돌아간 단구도 싫지 않은 듯 헤죽헤죽 거렸다. 두 손 가득 짐을 든 명하가 안으로 들어오며 단구를 껴안으려 했다. 그러자 단구는 질색을 하며 얼른 몸을 내빼었다. 명하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땅구야. 이모한테 뽀뽀 안 해 줄거야?”

“안돼!”

단호하게 날아오는 대답에 명하는 눈을 흘기며 한 손에 쥔 봉투를 들어보였다.

“너 이거 뭔 줄 알아?”

묵직한 검은 봉투 안에는 뭐가 들었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명하가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기름진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이다. 이미 저녁을 배불리 먹은 상태였지만 단구는 갓 튀겨낸 고소한 치킨 냄새를 참아 낼 재간이 없었다. 단구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치킨이야?”

“먹고 싶어?”

유혹의 눈길을 보내는 명하의 입가에는 이미 승리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며 한쪽 볼을 내밀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단구가 모를 리 없었다. 단구는 선정을 향해 도움의 눈길을 보냈지만 선정은 별로 도와 줄 생각이 없는 듯 외면했다. 단구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뗐다. 그 모습이 마치 적국에 볼모로 잡혀가는 세자처럼 심각했다. 명하 앞에 선 단구는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뜨고는 대충 그녀의 볼에 입을 가져다 댔다. 태연한 얼굴로 기다리던 명하는 단구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잽싸게 고개를 돌려 입술에 기습뽀뽀를 하였다.

으악. 단구는 온갖 방정을 떨며 입술을 닦아댔다. 명하가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김단구. 어차피 할 거면서 왜 그렇게 빼는데? 내가 못생겨서 그래?”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말과는 달리 명하의 얼굴은 절대로 못난 얼굴이 아니었다.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와 주먹만한 얼굴부터 남달랐고 길게 뻗은 정갈한 눈썹에 균형잡힌 눈매와 선명한 콧날 그리고 도톰하고 붉은 입술은 화장기 하나 없음에도 매우 도드라질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이목구비가 정말 시원시원하게 생긴 이런 사람을 미인이라 칭하는 것이었다.

“난 이제 애가 아니란 말이야.”

단구의 귀여운 항변에 명하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뭔데?”

단구가 할 말을 찾아 눈알을 굴려대자 그녀가 가당치 않은 소리는 하지도 말라는 듯 못을 박아 바렸다.

“쪼끄만게 까불어. 분하면 이거 먹고 얼른 크세요.”

흠씬 놀려 대면서도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꼬마 악동을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 명하였다. 그녀가 코끝을 찡긋거리며 치킨을 내밀었다. 단구는 입술을 삐쭉 내밀면서도 얼른 치킨을 받아들었다.

조용히 지켜보던 선정이 그제서야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선정의 태도가 왠지 어색했다. 반가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가워 하지 않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느낌이었다. 반면 명하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먼저 활짝 웃어보이며 말했다.

“저녁은 먹었어?”

“응. 좀 전에.”

역시나 어색한 선정의 대답이었다. 명하가 남은 손에 쥔 봉투를 들어보이며 말했다.

“그럼 맥주나 한 잔 할까?”

일주일에 한두번씩은 꼭 들리던 명하의 방문은 보름만이었다. 선정이 해고노동자들의 시위대를 박차고 나온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냉랭한 기류가 흐르는 두 사람 사이에는 풀어야 할 무언가가 있어 보였다.


세 사람은 거실 가운데에 작은 밥상을 두고 둘러 앉아 있었다. 주방에 식탁이 놓여 있었지만 세 사람이 앉기에는 비좁았다. 그래서 세 사람이 함께 할 때는 따로 상을 펴서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선정이 앞접시와 젓가락을 놓으며 상을 차리는 동안 명하는 분홍색 야구점퍼를 벗어 뒤쪽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그리고 봉지에 담긴 캔맥주를 꺼내 상 옆으로 세워두었다.

“이모. 내 이름은 아빠가 지어 준 거래.”

단구가 더이상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을 어지간이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명하는 관심없는 척 캔맥주를 들어 선정의 자리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상 한 가운데에 놓인 치킨 상자를 열었다. 담뿍 쌓인 후라이드 치킨이 모습을 드러내자 단구가 입맛을 다셨다. 선정이 다리 하나를 집어 단구에게 건넸다. 치킨을 받아든 단구는 명하의 대답을 기다렸다. 양쪽 팔을 걷어붙인 명하가 캔맥주를 따서 한모금 마시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빠? 너가 아빠가 어딨냐?”

말하는 뽄새가 힘 없는 아이를 괴롭히는 골목대장 수준이었다. 그것이 꼬마 아이의 약을 올리는 목적이라면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자칫 아이의 마음에 상처가 될지도 모르는 말을 저리 함부로 내뱉는 사람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술에 잔뜩 취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확실히 그녀는 평범한 여자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단구 역시 보통의 아이가 아니었다. 시비를 걸어오면 나이 불문하고 이유 불문하고 받아주는 싸움꾼 기질이 다분한 녀석이었다.

단구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말했다.

“아빠 없는 사람이 어딨냐?”

완전히 친구를 대하는 말투였다. 심통이 단단히 났다는 뜻이었다. 명하는 태연하기만 하였다. 맥주를 한모금 들이킨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단구의 약을 올렸다.

“어? 난 없는데?”

“거짓말!”

“거짓말 아니거든.”

선정은 말 없이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철부지 동갑내기 같은 둘의 대화는 늘상 벌어지는 일이었다. 틈만 나면 시끌시끌해지는 둘을 지켜보는 것이 그녀의 삶에 소소한 즐거움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명하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그녀였다. 스스로를 낮추어 아들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니 말이다. 원래도 성격이 직선적이고 거침없는 명하였다. 그렇다 해도 단구에게 하는 행동은 유독 과장되고 스스럼이 없었다. 그것을 선정이 모를 리 없었다. 친구가 없는 외톨이 단구에게 자신이 하지 못하는 역할을 명하가 자처하고 있는 것이었다. 소심한 어른에게도 아홉살 철부지에게도 명하는 분명히 좋은 친구였다.

단구는 손에 든 닭다리를 상 위에 내려놓았다. 명하의 뻔뻔함에 먹는 것도 불사할만큼 약이 바짝 오른 것이다. 단구는 이번만큼은 절대로 질 수 없다는 듯 결연한 눈빛으로 쏘아붙였다.

“아빠없이 어떻게 태어나냐?”

단구는 반박을 해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태도로 명하를 주시했다. 하지만 명하는 오늘 단구를 제대로 골려먹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얼른 닭다리를 집어들었다. 방금 전까지 단구의 손에 들린 그것이었다. 단구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그녀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닭다리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리고는 일부러 냠냠거리며 말했다.

“응. 난 하늘에서 내려왔거든. 선녀라고 들어 봤어?”

지켜보는 사람이 다 얄미울 정도로 명하는 뻔뻔함을 과시했다. 평범한 아이라면 분통함에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단구는 자극할수록 더욱 거세게 반발하는 고무공같은 아이였다. 단구는 빼앗긴 닭다리를 되찾기 위해 명하에게 들러붙었다.

“거짓말쟁이.”

명하는 몸을 베베꼬며 닭다리를 사수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다 단구가 옆구리를 꼬집으며 공격해오자 그녀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한 팔로 단구를 막아내며 말했다.

“저기 하나 더 있잖아.”

“저건 엄마꺼야!”

단구는 명하의 팔을 붙들고 용을 쓰며 잡아 당겼다. 그런다고 성인의 힘을 당해낼 리 없었지만 명하가 힘을 과도하게 쓰지는 않았다. 그녀는 끝내 못이기는 척하며 항복의 의사를 밝혔다.

“알았어. 알았어.”

단구는 힘을 빼고 명하가 닭다리를 돌려주길 기다렸다. 명하가 밝게 웃으며 단구의 목을 한 팔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반대쪽 손에 든 닭다리를 단구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단구는 고민없이 닭다리를 베어 물었다.

“넌 엄마만 챙기고 이모는 안 챙겨?”

명하가 짐짓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단구는 뾰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거짓말하니까 그렇지. 난 거짓말 하는 사람이 제일 싫어.”

“거짓말 아니라니까.”

명하는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단구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거짓말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단구가 다시 열을 올렸다.

“우쉬. 이모 아빠 이름이 뭔데?”

“땅구는 바보래요. 아빠가 없는데 어떻게 아빠 이름이 있냐?”

장난스럽게 넘어가려는 명하를 단구는 고집스럽게 물고 늘어졌다.

“아빠 이름 뭐야?”

“아빠 없다니까.”

명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구가 한글자씩 또박또박 끊어가며 이름을 외쳤다.

“오!장!석!”

마치 변검을 펼치 듯 명하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그 싸늘해진 얼굴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단구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처음보는 명하의 모습이었지만 겁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단구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상황을 어떻게 넘어가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명하의 매서운 눈초리는 선정을 향했다.

“너가 말해줬어?”

목소리도 말투도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선정도 그 모습을 보고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러나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실을 누구에게 알려준다는 말인가. 선정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명하의 의구심은 깊어졌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선정이 그랬을리 없다는 것을. 단구가 또렷하게 뱉어 낸 이름은 그녀가 실수로라도 꺼낼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할 수 있다면 그녀의 인생에서 완전히 도려내고 싶은 이름이었다.

그녀는 무거운 눈빛으로 단구에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단구는 아무런 대답도 꺼내지 못하였다. 자신이 보통 큰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김단구.”

명하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와 달리 너무나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단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단구는 주눅이 든 목소리로 말했다.

“비밀이야.”

명하는 말없이 단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곁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단구는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이모 봐.”

차가운 말투에 단구가 옆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맞추었다. 완전히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보다 못 한 선정이 나섰다.

“그만해.”

선정의 차분한 목소리가 명하의 냉랭한 기운을 조금은 가시게 하였다. 명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멋모르는 아홉살 꼬마에게 자신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결국 그녀는 이 일을 그냥 덮어두기로 하였다. 계속 파헤쳐 봤자 제 살을 도려내는 꼴이었다. 그녀는 예기치 않게 벗어버린 가면을 다시 얼굴에 씌웠다. 그렇게 밝은 모습으로 돌아간 그녀는 단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심을 시켜주었다.

“그럼 계속 비밀이야. 다신 그 이름 꺼내면 안돼. 알겠어?”

다정해진 그녀의 말투에 안심을 하며 단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이모.”

이것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과의 말이 아니었다. 명하가 겪었을 큰 아픔을 달래는 말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알 리 없었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04화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