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축복과 저주(06)
“치료는 할 수 있대?”
캔맥주를 연거푸 들이마신 명하가 먼 발치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단구가 있었다. 미끄럼틀 아래 모래바닥에 철푸덕 엉덩이를 깔고 앉은 단구는 뭐에 꽂혔는지 모래바닥을 열심히 헤집어 놓는 중이었다.
“글쎄. 고칠 수 있는 거라면 반드시 고쳐야지.”
선정은 두 다리를 가슴깨로 접어올려 감싸안았다. 그렇게 나무벤치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 앉은 그녀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가을밤이란 캔버스에 누군가 정성스레 그려넣은 듯한 보름달은 꽉 차오른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은은한 그 빛은 사람들이 떠난 재개발 지역의 황량한 놀이터까지 아낌없이 비추어 들었지만 단구는 그조차도 닫지 않는 낮은 미끄럼틀 아래가 제 자리라는 듯 숨어버렸다. 그녀는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 눈빛이었다.
명하는 선정의 뜨뜨미지근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 말이 그래?”
한동안 보름달만 쳐다보고 있던 선정이 옆에 놓인 캔맥주를 집어들었다. 그녀는 맥주를 딸 생각은 하지 않고 두 손으로 꼬옥 감싸 쥐었다. 그렇게 시원함을 느끼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저대로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게 나을지도 몰라.”
“장난해? 저렇게 학교도 못 가고 친구도 없이 살라고? 지금 글은 제대로 읽을 줄이나 알아?”
명하의 곱지않은 반응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정확한 지적이었다.
단구가 사람들을 멀리하는 것은 단지 일차적인 문제였다. 그로 인해 생기는 수 없이 많은 문제들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교육이었다. 아홉살 아이가 한글을 모른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는, 그것도 제1도시라는 서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때문에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단구의 경우에는 정신적 문제를 차치한다 해도 작은 체구와 못난 외모로 인해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문맹이라는 타이틀이 더해 진다면 사회적 고립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봐야 했다. 남들의 시선에 상처를 받게 될 단구를 생각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글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비단 남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글을 모른다는 것은 단구가 꿈을 꾸며 살아가는 데에 커다란 제약이 생긴다는 말이었다. 자아실현이라는 거창한 표현은 제쳐두고서 소박한 꿈조차 스스로 이뤄내기가 힘들 것이었다.
인간다운 삶. 그것이 선정이 바라는 한가지였다. 허나 그녀에게 인간다운 삶이 무어냐 묻는다면 명쾌하게 대답하지 못 할 것이었다. 배움이 짧은 선정이었다. 그 짧은 기간마저 열심히 한 것도 두각을 나타낸 것도 아니었다. 어디에서도 있 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이 살아온 삶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인간다운 삶이란 보통의 삶을 의미했다. 남들보다 잘나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뒤쳐지지도 않게 그저 남들 사는것처럼만 살아가는 것. 선정은 단구가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바랬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당장에 글을 가르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지 그녀는 고민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치료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했어.”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 무미건조한 선정의 태도가 명하는 이해되지 않았다.
“누가 그딴 말을 해?”
격정적이진 않았지만 충분히 그 느낌이 전달될 만큼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말없이 캔맥주를 만지작 거리던 선정이 손가락을 더듬어 캔뚜껑를 땄다. 딸깍 소리와 함께 머금고 있던 탄산가스를 뱉어 낸 맥주는 선정의 마른 입 속을 타고 들어가 가슴속을 적셔주었다. 선정은 코끝을 찡그리며 맥주의 잔향을 느꼈다. 맛이 밋밋하기로 유명한 맥주였지만 평소 술을 마시지 않는 선정에게는 그 씁쓸함과 텁텁함조차 낯선 것이었다. 선정은 명하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아무한테도 한 적 없는데, 단구 아빠 얘기 해줄까?”
명하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동안 몇번이나 물었지만 죽었다는 사실 외에는 단 한번도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웬일이야? 말 못할 사연 아니었어? 무덤까지 가져갈 줄 알았더니.”
퉁명스런 말투와 달리 명하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누군가 꽁꽁 감춰둔 이야기에 흥미가 돋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것이 가장 친한 친구의 이야기라면 두 말 할 것도 없었다.
“그냥… 아직도 그 사람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저려. 이미 없는 사람인데 자꾸 원망만 하게 되고.”
사무친 것이 많아서 일까 처음 해보는 이야기가 어색해서 일까 선정의 이야기는 갈 곳 잃은 시선을 따라 조심스레 첫걸음을 떼었다.
“떠올리지 않고 살아가려 했는데 단구가 커 가는 걸 보면 점점 더 오빠랑 똑같아져서. 피하기만 하는 건 정답이 아닌 것 같아. 단구를 위한 일도 아니고.”
“그래서 아까 단구가 아빠 얘길 한거구나.”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단구를 향했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잊은 채 단구는 모래밭을 뒤집어 놓으며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약속이나 한 듯 잠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선정의 머릿속엔 장우의 기억이 하나씩 하나씩 불을 켜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이 나쁘지만은 않아 보였다.
반면, 명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단구가 까발렸던 그 이름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것이 기억의 불을 켜려 하자 명하는 재빨리 생각을 떨쳐버렸다. 그리고 애써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얼마나 잘났길래 꽁꽁 숨겨뒀는지 들어나 보자.”
선정이 그녀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정신분열증을 앓던 알콜중독자.”
명하의 얼굴이 있는데로 구겨졌다. 그 말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친구의 말이 사실이란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선정의 힘든 생활을 몇 년이나 지켜본 그녀였다. 그러면서 가끔씩 드는 생각이 자신도 자신이었지만 선정의 팔자도 보통 사나운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박복한 인생끼리 만나 친구가 되었고 누구보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었지만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었다. 선정의 인생이 이토록 가여운 처지가 된 것은 남편의 죽음 때문일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선정의 결혼생활 조차도 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겁기만 하였다. 그래도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툴툴대는 말투로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고자 했다.
“정말 할 말이 없게 만드네.”
“좋은 사람이었어.”
명하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평소에도 생보살처럼 구는 선정이었다. 언제나 짓궂은 쪽은 명하였고 선정은 늘 사람좋은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명하는 그런 선정이 누구인들 용서 못 할까 라는 생각에 괜한 심술을 부렸다.
“그게 앞뒤가 맞긴 한 거니?”
“정신분열증도 알콜중독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정도는 아니었어.”
“어렵다 어려워.”
이해가 되지 않는지 명하는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정신분열증은 그 낯선 단어 만큼이나 명하의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막연하게 떠오르는 것은 지하철에서 큰소리로 혼잣말을 해대는 아저씨였다. 그리고 맨발에 파자마 차림으로 동네를 활보하는 산발의 여인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가벼운 증상인 건가? 심하면 병원에 가 있을 테니까. 그렇담 그들이 남한테 피해를 주는걸까? 아닐까? 명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아무리 좋게 포장하려 해봐도 호불호가 확실한 그녀에게는 최악이었다. 정신분열증이라니… 잠깐. 정신이 이상하다고… 명하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 때문에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선정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설마 아니지? 라는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단구가 아빠랑 똑같은 증상이란 거야?”
선정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저 멀리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있는 단구를 보며 말했다.
“오빤 사람들이 많은 곳에는 가지 못했어.”
눈치가 빠른 명하는 이 말의 의미와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했다. 그녀의 눈도 적막한 바람을 따라 외로운 아이의 뒷모습을 담아냈다.
4년째 단구를 지켜봐 온 명하는 아이의 유독 작은 몸집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호르몬 문제라지만 치킨 한마리를 혼자서 다 먹어치울 정도로 먹성이 좋은 아이가 키는 도통 자라나지 않았다. 그녀는 단구가 사람들에게 마음에 문을 닫은 것은 그 작은 체구와 외모 때문에 놀림을 받아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잘 먹고 빨리 자라난다면 상처는 금세 아물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선정의 집을 찾을때면 그녀의 손에는 어김없이 기름진 음식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선정이 하고 있는 이야기는 이런 명하의 마음 씀씀이가 모두 헛일이라는 뜻이었다. 아이는 원래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가게 될 거라는 말이었다. 이제 막 시작된 선정의 숨겨둔 이야기는 그 출발부터 비극적 결말을 못 박아 두는 듯 했다. 선정의 이야기가 끝을 맺고 나면 단구는 두번 다시 보통의 삶을 꿈꿀 수 없는 아이가 되어버릴 것 같아 명하의 얼굴 가득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유가 뭐야?”
명하가 조금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작은 실마리라도 찾고자 함이었다.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선정이 그녀를 바로 보며 대답했다.
“어떤 목소리가 들려서 힘들다고 했어.”
“목소리? 무슨 목소리?”
“그건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어. 늘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웃어 넘겼으니까. 언제나 밝은 사람이었어.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화가 나서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나중에… 나중에 전부 말해주겠다는 말뿐이었어. 그런데 그 날은 결국 오지 않았지.”
이 아련한 이야기를 명하는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 귀담아 들었다.
“치료는 받았던 거야?”
“고등학교 때 잠깐. 고등학생이 되고 얼마 안되서 병원에 다니는 걸 봤거든.”
명하가 대뜸 말을 끊고 물었다.
“고등학교? 대체 언제 만난거야?”
“국민학교 때. 같은 보육원 출신이었어.”
“그랬구나.”
“내가 4학년 때 오빠가 보육원으로 들어왔어. 그때 오빤 6학년이었고.”
명하가 혀를 내두르며 감탄을 했다.
“성춘향 이몽룡이 울고 가겠네.”
선정은 그때의 시절로 돌아간 듯 소녀같은 풋풋한 미소를 보였다.
“그땐 단순히 첫 만남이었어. 별로 관심도 없었고.”
명하도 덩달아 그 시절로 돌아가 짓궂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내숭을 떠는 소녀의 꼬투리를 잡으려는 듯 그녀가 은근슬쩍 물었다.
“첫인상이 어땠는데?”
선정이 찬찬히 기억을 떠올렸다.
“그게… 보통 보육원에 들어오는 아이들은 어두운 구석이 있게 마련인데 오빤 그런게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어. 티없이 맑은 사람 같았어.”
명하가 걸려들었다는 듯 엉큼한 표정으로 말했다.
“관심이 없는데 어찌 이리 잘 기억하실까?”
선정은 자신이 명하의 미끼를 문 것도 모르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명하는 허공을 보며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한탄하듯 말했다.
“옛말이 틀린 거 하나없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딱 너를 두고 하는 말이네”
명하가 늘상 선정을 놀려먹는 패턴이었다. 이런 무거운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그녀 덕분에 분위기는 한없이 가라앉지 않았다. 선정은 오히려 더욱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친구가 생긴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선정의 머릿속을 지나쳐 갔다. 그러자 또 미안한 마음이 따라왔다. 보름 전 시위현장에서 크게 다툰 후 화해를 하려고 찾아 온 친구를 서먹하게 대했으니 말이다.
말이 끊어진 친구를 보며 명하가 이야기를 재촉했다.
“근데 처음 만났을 때는 괜찮았나 보네.”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그때도 조금씩은 증상이 있었다고 했어. 그러다 오빠가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부터 심해졌어. 그때부터 원장님이 연결해 준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했거든. 그런데 몇달이 지나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어. 오히려 아이들을 멀리하기 시작했고 가끔은 보육원에 돌아오지 않는 날도 있었어.”
꽤나 상세한 기억이었다. 그것은 선정에게 있어 장우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알게 하였다. 그리고 그녀답지 않은 수다스런 말투가 그 설레임을 느끼게 하였다. 그녀가 이렇게 마음을 풀어 놓는것이 명하의 위로 때문인지, 스스로의 마음변화 때문인지, 아니면 한 모금 들이킨 술기운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에게서 어떤 해방감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를 이채롭게 바라보던 명하는 시원하게 맥주를 넘기며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더이상 보육원에 있을 수 없어. 그때부턴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거지.”
명하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선정과 친해지게 된 후 얼마 안 되어서 그녀에게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 호기심이 생긴 명하가 생각없이 캐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선정이 해주었던 보육원 이야기에 그녀는 개탄스러운 작금의 현실을 탓하며 울분을 토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준비도 안된 아이들에게 단칸방 하나 얻기도 힘든 돈을 쥐어주고 세상밖으로 내몰아야 하는 냉혹한 현실이 내키지 않았지만 보육원의 문제가 아니라며 오히려 오갈데 없는 자신을 길러 준 보육원을 고마워하는 선정을 보며 화를 누그러트렸던 그녀였다.
선정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근데 오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마자 자립하겠다고 통보했어. 처음있는 일이라 모두가 말렸지만 오빠는 고집을 꺾지 않았지. 알고보니 더이상 보육원에서 지낼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안 좋아 진거였어.”
명하는 팥 없는 붕어빵을 씹은 표정으로 물었다.
“잠깐! 그래서 그렇게 그냥 나간거야?”
선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둘 사이의 로맨스는 언제 시작되는 거야?”
선정은 무얼 기대했냐는 듯 새초롬한 표정이었다.
“응? 딱히 없는데. 보육원에서 같이 지내는 동안 사람들을 즐겁게 해줬어. 나한테도 잘해줬고. 가끔씩 불쑥불쑥 나타나서 내 일을 도와주기도 했는데, 그게 다였어. 우린 따로 사귀거나 비슷한 데이트도 한 적 없어.”
“그게 뭐야? 그럼 단구는? 술 먹고 사고친거야?”
아무래도 명하는 급한 성격이 제어가 안되는 모양이었다. 선정은 못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단구가 태어난 건 한참 뒤에 이야기야.”
“아무튼 누군가는 먼저 마음을 내비췄을거 아냐? 보나마나 세계 제일 쑥맥인 너는 아닐테고.”
선정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보육원을 떠나기 전날 오빠가 날 불러내서 물어보더라. 고등학교 졸업하면 갈 데가 있냐고.”
“오호!”
명하는 이제야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시작되려나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로맨스에 빠진 사춘기 소녀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은 로맨스에 지대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는 연애와 결혼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서른살이 훌쩍 넘도록 시집은 커녕 연애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남들보다 월등한 외모를 가지고서도 말이다. 이는 그녀의 가정사로 인해 남자와 결혼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나이를 불문한 수컷들이 그녀에게 숱하게 대시를 해왔지만 그녀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친구의 연애사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친구가 보이는 생기발랄한 모습 때문이었다. 그 옛날 대갓집의 계집종처럼 언제나 어디서나 억눌려 있던 선정이 마침내 방언이 터진듯 수다스런 모습을 보이자 그 모습이 달갑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느끼는 산듯한 기분을 선정에게 전달해주고 싶은 것이었다. 너의 새로운 모습에 내가 이렇게 기분이 좋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받아 선정도 기분 좋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때 난 중3이였으니 그런 건 생각해 본 적 없었지. 그래서 갈 데 없다고 말했더니 다짜고짜 데리러 오겠다고 하더라.”
명하가 고개를 갸우뚱 하였다.
“전개가 뭐 이래? 어딘가 홀랑 빠진 거 아냐?”
누가 들어도 의구심이 생길 대목이었다. 하지만 선정은 별달리 붙일 말이 없는 듯 했다.
“아니. 정말 그게 다야.”
그 말은 사실이었다.
3년 뒤에 데리러 오겠다는 장우의 고백같지 않은 고백이 선정을 당황스럽게 만들었었다. 보육원에서 같이 지낸 5년 동안 두 사람은 이렇다 할 추억도 없었고 특별한 대화도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스치는 사이일 뿐이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그런 말을 듣게 되니 적잖이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충분히 불쾌감을 드러낼 만한 상황이었지만 선정은 그러지 않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가슴이 두근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선정을 보며 장우는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서 있었다. 마치 선정이 거절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 날의 설레임을 떠올리던 선정에게 날아든 것은 명하의 퉁명스런 대꾸였다.
“뭐가 이렇게 중간이 없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다더니 딱 그 짝이네.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알겠다고 했지. 그냥 해 본 소리인 줄 알았으니까.”
명하는 소리없이 콧방귀를 뀌었다. 차라리 매일 밤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를 했다면 믿어주었을지도 몰랐다. 그간 지켜본 선정의 성격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렇게 가볍게 말하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선정이 몇 번의 확답을 얻어내고 진실한 마음으로 기다렸을 거라 생각했다. 전쟁을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거라면 한 평생을 기다리고도 남을 인간이었으니 말이다.
명하의 추측만큼은 아니었지만 선정이 장우를 간절히 기다린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둘은 이런 이야기는 굳이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근데 진짜 데리러 온 거야?”
명하는 궁금증이 더해졌다. 그도 그럴것이 보통의 연애와 달리 전개를 종잡을 수 없으니 듣는 입장에서는 더 집중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안그래도 큰 눈을 동그랗게 치켜 뜬 그녀를 보며 선정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응. 정확히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는 날.”
“와! 멋지다.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네.”
명하의 진심어린 반응에 선정의 가슴 깊숙이 온기가 퍼져나갔다.
세상에 더이상은 장우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을지도 몰랐다. 오직 선정만이 그의 기억을 아프게 품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요 몇년간 단구만 보고 정신없이 살아 온 그녀에게 장우의 기억은 사치였고 또한 금기였다. 단구를 보며 문득문득 떠오르는 단편적인 기억조차 애써 떨쳐 내려던 그녀였다. 이렇게 하나하나 곱씹으며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장우가 떠나고 처음있는 일이었다.
선정이 환하게 웃었다. 가슴이 저밀 듯 아플 줄 알았는데 아프지 않았다. 마음이 애달퍼 슬플 줄 알았는데 슬프지 않았다. 친구의 입에서 흘러나온 멋지다는 칭찬이 왜 그렇게 기쁜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기억으로 되살아난 장우는 여지없이 그 환한 미소를 머금고 꽃다운 그 시절로 그녀를 붙잡아 이끌었다. 그리고 여지없이 그녀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그녀는 문득 그의 싱그런 미소가 너무나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그녀의 마음속은 열망 가득한 생의 기운으로 채워져 갔다. 동시에 그리움의 눈물이 눈가를 촉촉히 적셔갔다.
선정은 이제서야 장우와의 추억이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었고 최선을 다해 살았으며 누구보다 선정을 사랑해 주었고 세상에 큰 선물을 남겨주었다. 그런 사실들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부풀어 오른 선정은 슬며시 눈가를 훔치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오빠하고 같이 살게 된 거야. 이미 집을 구해 놨더라고.”
“이야~ 노처녀가 판을 치는 시국에 누군 참 시집도 쉽게 가네.”
선정의 북받치는 감정을 명하는 괜한 볼 멘 소리로 날려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한창 수다에 빠져있을 때였다.
“엄마, 왜 울어?”
갑작스레 끼어든 목소리에 두 사람은 깜짝놀라 뒤를 돌아봤다. 모래와 흙먼지로 된통 더렵혀진 단구가 벤치 뒤에 멀뚱히 서 있었다. 수다에 정신이 팔린 두 사람을 놀래켜 주려 시야 밖으로 슬금슬금 돌아 온 것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보고는 장난을 칠 마음이 달아났던 것이다.
“응? 아니야. 다 놀았어?”
선정이 묻자 단구는 대충 고개를 끄덕일 뿐 의아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는 얼른 눈물을 삼키며 말을 돌렸다.
“옷이 그게 뭐야? 다 더러워 졌잖아.”
자리에서 일어나 단구 앞에 선 선정이 세심한 손길로 모래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무릎을 접고 앉아 단구와 키를 맞춘 그녀에게 단구가 불쑥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단구는 꼭 쥐고 있던 손을 펼쳐보였다. 여리여리한 손바닥 위에는 세 개의 비단고둥 껍데기가 올려져 있었다. 놀이터의 모래흙 속에서 찾아 낸 것들이었다. 단구가 열심히 모래속을 헤집었던 이유를 앍게 된 선정이 감동한 듯 미소를 지었다.
“우와. 엄마 주는거야?”
단구는 동글동글한 비단고둥을 그녀의 손으로 넘겨주었다. 가로등 불빛을 받아 은은한 연분홍색을 띠는 그것은 선정도 처음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원래의 색인지 모래속에서 색이 바래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떻겠는가. 아들이 처음으로 준 선물이 그녀에게는 어떤 보석보다 소중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단구가 왜 세 개를 찾아 왔는지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저 기쁜 마음이 그녀를 어루만질 뿐이었다.
“엄마가 깨끗이 씻어 놓을께.”
단구는 여전히 선정의 눈가를 보고 있었다. 엄마의 눈물이 신경쓰인 단구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담담하게 물었다.
“엄마는 아빠가 보고싶구나?”
선정은 마음속을 들켜버린 것처럼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명하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나이답지 않게 무게를 잡고 있는 아이에게 핀잔을 주었다.
“쪼끄만게 뭘 안다고.”
하지만 단구의 대답에 명하마저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응. 난 아빠를 몰라.”
아홉살 꼬마의 말은 큰 울림이 되어 두 여자의 가슴속을 흔들어 놓았다. 잠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적막함 속에서 도심에 터전을 잡은 외로운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만이 바람을 타고 울려퍼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