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축복과 저주(07)
“혹시 신병같은 거 아닐까?”
명하는 세상 심각한 얼굴이었다. 선정이 멀뚱히 쳐다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왜 있잖아. 막 귀신같은 거 보고 대화도 하고 그런 사람들.”
선정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피식하고 웃어넘겼다.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은 물이 끓어 오르길 기다리며 그녀는 준비해 둔 두 개의 찻잔에 인스턴트 커피를 티스푼으로 옮겨 담았다. 식탁 앞에 앉아 지켜보던 명하는 얄미운 시누이처럼 잔소리를 던졌다.
“난 프림 둘 설탕 둘, 알지?”
왜 모를까. 선정은 유독 단 커피를 좋아하는 명하의 취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 듣는 말처럼 고분고분 주문한 대로 넣어 주었다.
“신병도 대물림이 된다고 하던데. 선대에서 풀지 못하면 후대에까지 이어지니까 어쩔 수 없이 신내림을 받는다고 하잖아.”
꿋꿋하게 미신을 들먹이는 명하 때문에 선정도 잠시 고민을 해보는 듯 했다. 하지만 이내 코끝을 찡그리며 말했다.
“글쎄.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정상이었는데. 둘이 있을 땐 아무 문제 없었거든. 지금 단구처럼.”
물이 팔팔 끓어 오르자 선정은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주둥이가 달린 철냄비의 손잡이를 움켜 잡았다. 그리고는 주둥이 쪽을 천천히 기울여 커피잔에 물을 맞추기 시작했다. 와중에도 명하는 어줍잖은 실력으로 수사관 흉내를 내었다.
“근데 왜 너한테까지 숨겼을까? 정신적인 문제라면 약을 먹고 치료를 받으면 될 일이잖아.”
선정은 스푼을 휘휘 저어 완성한 커피를 명하에게 건넸다. 그리고 자신의 커피를 들고와 식탁에 마주앉으며 말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어.”
“그럼 정신분열증인가 뭔가 그게 아닌거잖아.”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에 선정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달콤한 커피향을 참을 수 없었는지 명하는 찻잔에 입을 가까이 하고 호호 불어댔다. 하지만 뜨거운 김이 무지막지하게 피어오르는 커피를 감히 마실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이었다. 시원한 공기를 들이려 열어놓은 작은 주방 창문을 통해 쓸쓸한 귀뚜라미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놀이터에서 돌아와 선정이 단구를 씻기고 재우는 사이 명하는 설거지와 거실 정리를 했다. 이윽고 할 일을 마친 두 사람은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다시 마주앉은 것이었다.
“사실 나도 확신이 없어. 오빠가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은 건 맞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도적인 것도 있었으니까.”
한참을 뜸들이다 내놓은 선정의 대답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지 명하는 고양이처럼 큰 눈을 꿈뻑꿈뻑 댈 뿐이었다. 숨을 한번 가다듬은 선정은 다하지 못했던 긴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스무살 되던 해에 오빠랑 혼인신고를 했어. 일년을 넘게 같이 살면서 좋은 사람이란 확신이 생겼으니까 망설일 이유가 없었지. 오빠도 그 흔한 이야기를 하더라.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게 하겠다는.”
명하가 슬쩍 웃어 보였다.
“정말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는지 힘든 일이라면 손도 못대게 했어. 오빤 어떻게 그렇게 눈치가 빠른건지 내가 원하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 해줬어. 엄마 아빠도 모르는 내가, 친구 하나 없는 내가 세상을 그렇게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태어나 처음으로 사는 게 즐거웠어. 정말 더이상 바랄 것도 없는 날들이었어.”
선정의 가슴 벅찬 감정은 명하에게도 잘 전달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곧 시작될 비극을 알아서일까 명하는 가만히 듣기만 할 뿐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3개월 후에 영장이 날아왔어. 그때 오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근처에도 못 가는 상황이었지. 공황장애로 생각한 난 치료를 받자고 했지만 오빠는 그런게 아니라고 했어. 내가 다그쳐 물었더니 그때서야 목소리 얘길 하더라. 어찌되었든 그걸 치료하자고 하니까 자긴 아픈 게 아니라고 했어. 그래서 치료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어찌할 수 없어서 이리저리 알아봤지만 군대를 딱히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 이미 두 차례나 입영연기를 한 상태여서 더이상 미루는 것도 힘들었거든. 한참을 고민하던 오빤 시간이 갈수록 안 좋아 질거라고 차라리 빨리 다녀오겠다고 했어.”
“정말 간 거야?”
명하가 놀라서 묻자 선정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한 달도 안되서 돌아왔어. 깡마른 몸에 온통 멍자국이… 만신창이가 되버렸더라.”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는지 선정의 눈은 금새 벌겋게 물들어갔다.
“뭐야? 맞은거야? 이런 씹어먹을 새끼들.”
명하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거침없이 분노를 표출했다.
“얼굴은 멀쩡한데 몸 구석구석 성한 곳이 없었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각했는데 오빤 바보같이 웃고 있더라. 보고싶어서 왔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면서.”
이윽고 선정의 두 눈에 고인 맑은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정말 천생연분이네.”
명하의 태도가 곱지 않았다. 그 눈빛에서 애써 화를 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착한 사람들은 착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면 안되는 건가. 하지만 착하기만한 사람들은 언제나 화를 입는 것이 세상의 현실이었다. 명하는 그런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불의에 맞서 싸우는 그녀였고 그렇기에 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책없이 착하기만한 선정은 자기주장을 확실히 하지 못 해 항상 당하기만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선정이 가끔은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그녀였다. 실제로 그녀가 선정을 타박할 때면 여지없이 그런 이유 때문이었고 그것이 그녀의 위로 방식이었다. 그런데 선정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 남편이란 사람도 선정 못지 않게 바보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녀의 마음속은 갑갑하기만 하였다. 그렇지만 눈물을 보이는 선정 앞에서 격한 감정을 보일 수 없어 그녀는 끓어오른 가슴을 애써 가라앉혔다.
“군대는? 의가사 제대인가 뭔가 그런 거야?”
“아니. 훈련소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은거라 다시 가야한다고 했어.”
더이상 참기 힘들었는지 명하의 흥분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뭐? 거길 어떻게 다시 가?”
“내가 죽어도 안된다고 했지. 차라리 정신병 환자가 되더라도 죽는 것 보단 낫다는 생각에 오빠를 끌고 병원에 간 거야. 그렇게 그곳에서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어. 그게 사회적으로 사망선고라는 걸 알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그 지옥같은 곳에 다시 가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헌데 그것도 아니었더라.”
찐득찐득한 후회의 감정이 선정의 말꼬리에 엉겨 붙어 있었다. 그때의 그 날로 돌아간 듯 흐려진 두 눈의 초점과, 시간을 느리게 돌린 듯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눈물 방울은 그때의 선택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하는 번민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다.
“치료는 받아 본 거야?”
“석 달 정도 입원해 있었어. 정신적인 문제는 둘째치고 몸이 너무 많이 상해서 회복이 필요했거든. 근데 오빠는 결사적으로 반대했어. 갖고 있던 돈으로는 생활비도 빠듯 했으니까. 그래도 난 물러설 수 없었어.”
보름 전 선정의 내면에 잠재된 불같은 성격을 목도한 명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그때 태어나 처음으로 직장을 구하게 됐어.”
“다리미 공장?”
둘은 동시에 눈을 맞추며 웃음을 지었다. 선정이 다리미 공장을 다니게 된 것에 그런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명하였다.
호텔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선정은 모든것이 낯설었다. 그녀는 객실부에 소속되어 일반객실의 청결을 담당하는 하우스 키퍼가 되었다. 단순한 일처럼 보였지만 160개가 넘는 일반객실을 매일같이 드나들며 청소를 하고, 물건을 채우고, 분실물을 챙기고, 고장난 것들을 체크하고… 늘 처음처럼 유지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사회경험이 많이 부족한 그녀의 어리바리한 모습과 서툰 일처리가 동료들의 눈에 밟히기 시작했고 얼마 안 가 낙하산이라는 소문이 돌며 불만들이 하나둘씩 터져나왔다. 결정적으로 점심시간만 되면 사라졌다가 5분 10분씩 늦게 나타나는 일이 왕왕 발생하자 그녀를 향한 비난이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흘러나왔다. 그렇게 그녀보다 먼저 일을 하고 있던 8명의 직원들 중 일부가 언젠가부터 그녀를 다리미 라고 부르며 비하하기 시작했다.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출처는 한 군데밖에 없었다. 선정은 별다른 내색없이 그저 묵묵히 일을 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넉달이 지난 후에 명하가 입사했다. 명하 역시 호텔일은 처음이었지만 선정과는 확연히 비교될 정도로 능수능란했다. 거기에 더해 이국적인 외모에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진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명하는 빠르게 적응해 갔지만 그럴수록 무언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바로 선정이었다. 그때의 선정은 완전히 혼자서만 고립된 상태였다. 매니저급의 직원마저도 선정을 다리미라 부르며 무시하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부조리를 두고 볼 명하가 아니었다. 선정을 향해 유일하게 먼저 손을 내민 사람이 그녀였다. 선정에게 다가간 그녀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리고 곧바로 선정의 면접관이었던 노광섭을 찾아가 따져 물었다.
노광섭은 의외로 시원하게 사과를 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던 눈치였다. 객실 담당 매니저에게 선정의 사연을 일러주며 사정이 딱하니 잘 봐주라며 한마디 한 것이 그런 사태까지 몰고 왔던 것이다. 그 일은 객실부 내에서 공론화되었고 사람들은 더이상 선정을 다리미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딱 한가지 바뀐 것이 있다면 선정과 더불어 명하까지 따돌림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오빠가 몸을 회복하는 동안은 내가 돈을 벌어야 했어. 오빠는 그게 미안했는지 몇 일도 안되서 병원을 나가게 해달라고 했어. 자기가 의사를 속인거라고 멀쩡하다면서 말이야. 난 믿지 못했어. 의사 말로는 확실히 정신분열증이 맞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난 조금만 더 있자고 오빠를 달랬어.”
모든것이 제 탓 인냥 선정의 표정은 한없이 무거웠다.
“난 일주일에 두번씩 병원을 오가며 열심히 일했어. 얼마 안되는 월급은 고스란히 병원비로 들어갔지만 그래도 행복했어. 오빠를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다는게. 그런데 오빠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점점 원래의 모습을 잃어갔어. 갈수록 말수가 없어졌고 웃는 모습도 현저하게 줄어들었어. 의사 말로는 약 때문이라고 했어.”
잠시 뜸을 들이던 선정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느 날은 병원에 갔더니 오빠한테서 술냄새가 진동하더라.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소주를 두병이나 마셨더라고. 태어나 처음 마신 술이었지. 같은 병실에 지독한 알콜중독자가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됐어. 병원이 발칵 뒤집혔지. 근데 오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미친사람처럼 웃기만 하더라. 그땐 정말 오빠가 어떻게 되어버린 건 줄 알고 너무 무서웠어. 별다른 사고가 없어서 병실을 옮기는 걸로 넘어갔지만 그 날 이후로 오빠는 내게 술을 가져다 달라고 요구했어.”
오랫동안 묵혀 둔 기억은 꽁꽁 싸메두었던 탓일까 티끌 하나 묻지 않고 깨끗이 보존되어 있었다. 선정의 이야기는 막힘없이 이어졌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난 들어줄 수 밖에 없었어. 너무 간절하게 원했으니까. 헌데 얼마 안가서 오빠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거야. 처음 만났을 때 밝았던 모습 그대로. 마치 다시 태어난 사람 같았어. 난 의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의사는 자기가 열심히 노력했다며 생색을 내더라.”
선정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병원에 있을 이유가 없었지. 집에 돌아와서 오빠가 무언가를 꺼내 보여줬어. 종이에 말린 약 뭉치였어. 병원에서 지급한 약을 모아둔거지. 오빠는 그동안 약을 먹는 척만 한거야. 알고보니 그 병원은 전혀 관리가 안되는 곳이었어. 그 사실을 알고나서 처음엔 의사에 대한 배신감이 생기더니 조금 지나자 오빠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왔어. 오빠는 처음부터 의사를 믿지 말라고 했거든. 자기를 믿어야 한다고. 난 물었어. 왜 그런 곳에서 참고 지냈던 거냐고.”
정아가 원했으니까. 그것이 장우의 대답이었다.
선정은 멈추지 않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잠시 숨을 돌렸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무엇이든 그녀를 먼저 생각해주고 그녀가 원하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고 그녀가 필요한 곳에 있어주었던 사람. 그렇게 다정했던 사람이 선정의 남편이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그 얼굴을 선정은 머릿속으로 최대한 자세하게 그려보았다. 역시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웃는 얼굴이었다. 그것이 단구가 태어나던 날의 모습인 걸 깨달은 선정은 기억의 초상과 소리없이 마주 웃었다.
미지근해진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명하는 울고웃는 선정을 기다려 주었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아침을 준비해야 하는 이들에겐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마지노선 이었지만 직장을 잃은 두 사람에게는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시간을 잊은 두 사람은 고요한 밤의 분위기를 빌려 깊은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갔다.
“그러니까 정신병은 아니라는 거네?”
명하가 다시 이야기에 시동을 걸었다.
“글쎄, 그걸 정확히 확인하고 싶어서 어제 병원에 다녀온거야. 제대로 된 의사를 찾아서.”
선정은 조금씩 감정을 추스리는 듯 보였다. 서늘한 기운이 집안으로 들이치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창문을 밀어 닫았다. 그러자 멀리서 들려오던 귀뚜라미 소리도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돌아와 앉으려던 그녀가 명하의 빈 찻잔을 보고는 물었다.
“커피 다 먹었으면 다른 거 좀 줄까?”
명하가 빈 잔을 건네며 말했다.
“아냐. 됐어. 그냥 따뜻한 물 좀 더 줘.”
선정은 냄비에 끓여 두었던 물을 조심스레 따라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명하가 물었다.
“단구는 어떻게 태어난거야?”
선정은 냄비에 남은 물을 자신의 찻잔에 부었다. 커피가 반쯤 차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의 커피잔은 묽어진 커피로 넘실거렸다. 다시 자리를 잡은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빠와 난 다시 행복한 생활로 돌아갔어. 하지만 모아둔 돈을 다 써버린 상황이었어. 우린 목돈을 모아 전셋집부터 마련하기로 했고 오빠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봤어. 문제는 오빠가 매일 술에 취해 있었다는 거야.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술을 마시는 거였거든.”
“너무 심한 거 아냐?”
“그래도 알콜 중독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어. 정신은 멀쩡했거든. 그냥 그래야 마음이 편해진다는 말에 그러려니 했어. 그치만 직장에서는 얘기가 다르지. 술 냄내를 풀풀 풍기는 사람을 받아줄 곳이 어디 있겠어.”
“그렇지.”
“그때부터 오빠는 새벽같이 집을 나섰어. 인력시장을 나간거야. 그렇게, 힘들지만 둘이서 돈을 벌게 되자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어. 그런데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어.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됐거든.”
“음~ 단구가 드디어 등장하네.”
명하가 희미하게 웃으며 반가움을 표했지만 선정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잘 생각해 봐. 그땐 내가 스무살이었어.”
명하는 선정이 말한 나이를 곱씹어 보았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서른 다섯살인 그녀가 스무살에 아이를 가졌다면 아이는 지금쯤 열네살이 되어 있어야 했다.
“뭐야? 단구가 첫째가 아니야?”
새로운 사실에 명하는 놀란 반응을 보였지만 선정은 그리 달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응. 그런데 6개월만에 유산했어.”
명하는 혀를 차며 안타까워 했다. 6개월차의 태아는 신체의 모든 기관이 형성된 하나의 생명체였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갓난아기와 크기만 다를 뿐 동일하게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그런 생명을 잃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또한 몸은 몸대로 힘들었을 것이다. 아기를 낳는 것과 진배 없었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6개월째 유산을 하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임신 4주에서 12주 사이에 유산이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선정의 성격상 스스로를 적잖이 책망했을 것이다. 같은 여자로서 명하는 가슴이 미어졌다. 자신 못지않게 기구한 인생을 산 친구가 그녀는 참으로 딱하였다. 누가 있어 이런 여자에게 인생 경험을 논하며 근천맞은 삶을 산다고 폄박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모진 일들을 다 견뎌내고 지금은 너무도 꿋꿋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 선정이 대견하기도 하였다.
선정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내가 몸이 너무 약했거든. 지금은 살이 많이 찐거야.”
명하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선정은 지금도 충분히 마른편에 속했다. 군살 하나 없는 몸매에 마른 근육들을 보며 누군가는 부러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다지 건강해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기서 몇 키로그램이 더 빠진 선정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오마이갓. 걱정스런 몰골이 떠오르자 그녀는 친구가 살이 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가볍게 웃어넘긴 선정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무튼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행히도 오빠가 직장을 구하게 됐어. 구로공단에 있는 작은 금속공장. 몇달간 열심히 하는 오빠를 보고 인력시장 사장님이 소개를 시켜줬나봐. 모든 일이 다 잘 풀릴려나 보다 생각했어. 식구가 하나 늘어난다는 사실이 난 솔직히 조금 겁이 났었는데 오빠는 뛸 듯이 기뻐하더라. 그러면서 내게 무리하면 안 된다고 일을 그만두라고 했어. 난 괜찮다고 했고. 돈을 조금 더 모으고 싶었거든. 그리고 종일 앉아서 하는 일이라 상관 없을거라 생각했어. 그때 오빠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내가 욕심이 너무 많았나 봐.”
회한의 목소리가 심야의 고요함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럴 수 있지.”
명하의 털털한 음성이 무거워지는 공기를 흩어 버리자 선정이 힘을 얻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회사에 임신 사실을 숨기고 일을 하던 중에 쓰러지고 말았어. 빈혈성 쇼크라고. 내 몸엔 살도 피도 부족하다고 하더라. 그 일로 양수가 터져버려 아이가 유산된거야. 병원에서도 특히나 조심하라고 했었는데 순전히 내 잘못이었어. 수술후에 난 몸과 마음이 다 망가져 버렸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라. 몸이 힘든 건 견딜만 했는데 아무 의욕도 생겨나지 않았어. 불행한것도 느껴지지 않았고 화가 나지도 않았어. 슬픈 것도 기쁜 것도 다 잃어버렸고, 추운 것도 더운 것도 다 잊어버렸지.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어. 내 의식은 어항 속 물고기처럼 작은 공간에 갇혀 있었어. 벗어날 생각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어.”
선정은 오늘 고해성사를 하기로 마음먹은 사람 같았다. 가녀린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자신의 과오를 털어놓는 그녀는 이제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많이 힘들었겠네.”
“내가 워낙 소심하고 나약하잖아.”
“나약하지 않아. 그 어린나이에 그런 큰일을 누가 가볍게 털어낼 수 있겠어.”
명하의 말은 진심이었다.
한 번 시작된 비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드는 법이었다. 가난이 질병을 낳고 그 질병은 또 가난을 불러오듯이 비극이 또 다른 비극을 낳는 것이었다. 두 여자의 삶도 이러하였다. 명하에게 시작된 비극은 그녀를 지금의 삶으로 이끌었고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선정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의 인생을 휩쓸어버린 비극의 파도는 좀처럼 그녀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 파도 속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붙잡고 살기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바로 비극을 대하는 자세였다. 명하는 비극으로부터 도망치며 지금의 삶을 받아들였고, 선정은 계속해서 찾아드는 비극에 온몸을 부딪히며 저항하는 중이었다. 그것은 비극의 대물림을 막기 위한 엄마의 처절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명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쩌면 이 여리여리하고 착해 빠진 친구가 누구보다 강한 여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찾아드는 부끄러움을 피할 길이 없었다.
명하의 이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정은 긴 한숨을 내뱉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근데 정말 내가 미운 건 뭔지 알아? 모든 잘못을 오빠 탓으로 돌렸다는 거야. 분명히 다 내가 어리석어서 일어난 일인데 난 오빠를 만나서 이런 고생을 한다고 생각했어.”
“그랬구나.”
“오빤 내 걱정만 하면서 어떻게든 챙겨주려 했는데 난 밀어내기만 했지. 오빠가 집에 있는 동안에는 난 거의 잠만 잤어. 오빠가 출근하고 나서야 일어나 조금씩 움직였지. 계절이 몇 번씩 바뀌는 동안 난 넋을 놓고 지냈어. 그렇게 조금 더 행복할 수 있던 시간을 잃어버렸어. 그렇게 몇 년이 흘쩍 지나버렸어. 어느 날 오빠가 이사를 가자고 하더라. 작은 단칸방에 갇혀 있는 내가 보기 싫다고. 그렇게 찾아 온 곳이 여기야.”
명하는 대화가 오가고 있는 주방과 몇 발자국 떨어진 작은 거실, 그 사이에 낀 현관과 맞은편에 위치한 화장실, 그리고 그 옆에 단구가 자고있을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금속 공예로 만든 고래 장식과 천장에 메달린 물고기 장식들, 국적을 알 수 없는 이국적인 조각상들과 커다란 액자에 담겨진 묵죽화(墨竹畵), 단구와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과 소품들, 단구의 장난감과 낡은 인형들, 가구 사이사이 배치된 물건들에서 특별히 단구 아빠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선정이 애써 감춘 모양이었다.
선정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오빠는 포기하지 않았어. 이곳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했지. 아이를 갖자고 했어. 건강하게 잘 준비해서 우리 둘을 닮은 예쁜 아이를 꼭 낳자고 말이야.”
명하는 다시 선정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제 정말 단구의 이야기가 나오려는 듯 했다.
“그 말에 조금씩 힘이나기 시작했어. 아직 기회가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내가 뭘 해야할지 정신이 번쩍 들더라. 아침에 일어나 활동을 하고 산책도 하고 요리도 하면서, 엉망이 되버린 몸을 가꾸기 시작했어. 비로소 오빠와 난 예전의 그 모습들을 되찾아가기 위해 대화를 많이 했어. 그제서야 보이더라. 지금의 이 집과 채워진 물건들. 온통 나를 위한 것이었어. 그걸 위해서 오빠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난 그동안 오빠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고맙고 또 미안해서 꼭 아이를 선물해주겠다 약속했어. 그리고 정말 그 약속을 지키게 된 거야.”
“단구는 참 귀한 아이구나.”
“응. 오빠를 쏙 빼닮았어. 성격까지 전부 다. 내가 잘못 알았지. 오빠가 날 위해 준 선물인데.”
고생했다는 듯 명하는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선정 역시 마주 웃어 보이며 고마움을 대신했다.
이야기는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다. 남은 이야기는 단구 아빠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듣는 이도 말하는 이도 모두 껄끄러운 부분이었다. 명하가 먼저 판을 깔았다.
“그래.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사고가 난 거야?”
그녀는 단구 아빠의 죽음을 굳이 사고라고 표현했다. 친구를 위한 배려였다.
“그러게, 왜 그랬을까? 정말 그럴 사람이 아닌데.”
대답속에 긴 한숨과 가는 떨림이 섞여 들었다.
“유서 같은 것도 없었어?”
“응. 그래서 더 힘들었어.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이야기를 더 들어봐야 명확해 질테지만 명하는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만 놓고 보면 단구 아빠는 아주 건실하고 긍정적인 사람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선정을 아끼고 사랑해 주었고 그토록 바랬던 아들도 가지게 되었다. 더욱 더 삶의 의지를 불태워야 할 시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그 다정했던 사람이 유서 하나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더더욱 믿기 힘들었다.
선정이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그 사람들이 말한 이유는 납득이 되지 않아서…”
명하의 눈이 아주 날카롭게 빛났다.
“그 사람들?”
“응. 경찰들.”
명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했길래?”
“시위 현장에서… 분에 못 이겨 뛰어내렸다고…”
“그게 정말이야?”
낮은 목소리로 놀란 듯 되묻는 명하의 표정은 꽤나 심각했다.
“그걸 알고 싶어서 4년을 허비했어. 단구를 품에 안고서 여기저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찾아다녔던거야. 대부분 비슷한 증언을 했어. 노동자들 대부분이 참여한 대규모 동맹파업이 일어났어. 대국정유라는 화학공장 앞에서 집회가 열렸데. 주최자들 몇 명이 커다란 굴뚝같은 타워에 올라가 집회를 주도했는데 사고가 있던 날 오빠가 거길 올랐나봐.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런 일이 벌어진거야.”
“음…”
명하는 이제서야 보름 전의 일이 이해가 되었다. 그 날 선정의 분위기는 평소와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너무나 차가워 폭풍이 일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시위현장을 벗어나려는 선정을 붙잡았을 때 마침내 폭풍이 불어닥쳤다. 온갖 악을 질러대며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은 다른 사람이 아닐까 느껴질 정도였다. 선정이 보인 경멸의 눈빛은 그녀마저도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었다. 해고노동자의 평화집회가 시민단체의 참여로 폭력적인 양상으로 뒤바뀐 바로 그날이었다.
명하는 선정을 다그쳤던 일에 그리고 맞서 고함을 질렀던 것에 자괴감이 들었다. 내켜하지 않았던 시위에 끌어들인 것도 미안해졌다. 그 아사리판 같은 현장에서 죽은 남편을 떠올렸을 친구를 생각하니 마음이 애려왔다. 그녀는 이 일에 대해 꼭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귀를 기울였다.
“난 아니라고,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얘기했지. 소용 없었어.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검을 원했지만 경찰은 코웃음을 치더라. 그래도 난 끝까지 부검을 고집했어.”
“그래서?”
“믿고 싶지 않았지만 오빠의 투신은 사실이었어. 모든 정황이 그랬고 그걸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후~”
“남은 건 이유였지. 왜 오빠가 거길 올라갔으며,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유가 불분명했어. 난 진실을 알고 싶었어.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어. 타워에 있던 일곱명의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얘기했고 그걸 가지고 경찰은 고민없이 결론을 내려버린거야.”
명하는 계속해서 한숨만 뿜어냈다. 분명 석연치 않은 죽음이었다. 진실이 무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선정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누군가 진실을 덮어버렸다 해도 이제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녀는 갑갑해지는 가슴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시위중에 일어난 일이니 난 남편의 목숨값이라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국가에 보상을 요구했지. 다행스럽게도 도와주겠다며 나선 변호사가 있었어. 그렇게 3년 가까이 법정을 오가며 싸운거야.”
담담한 선정의 말에 명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건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대책없이 순박한 친구가 스스로 법정소송까지 벌였다니 놀랄 노자였다. 그래도 이건 잘한 일이라 생각이 들었다. 명하는 자신이었어도 분명 그렇게 했을거라 생각하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오백만원. 그게 전부였어.”
“뭐? 장난해?”
명하는 정말 기가 찬다는 표정이었다.
“회사측의 안전관리 소홀 문제만 인정했어. 국가에는 책임이 없데.”
“그게 말이 돼?”
“결국 내가 오빠만 정신이상자에 술주정뱅이로 만들어 버렸어. 오백만원 때문에.”
명하가 답답함에 목소리를 높였다.
“왜? 왜 그렇게 된건데?”
“법정에서 증언이 전부 바뀌었거든.”
명하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타워에 올랐던 7명의 사람들, 그 중에서도 시위를 주도했던 한 사람, 알고보니 대한노총의 청년위원장 이더라구. 그 사람이 주로 증언에 나섰는데 처음에는 분명히 오빠가 시위를 하러 올라왔다가 분에 못 이겨 투신을 했다고 말했어. 그런데 법정에서는 술 취한 오빠가 막무가내로 올라와 횡설수설하더니 말릴 새도 없이 뛰어내렸다고 했어. 시위랑은 아무 관련 없다는 취지로 말한거야.”
상식적이지 않은 일의 연속이었다. 어처구니 없다는 말은 딱 이럴 때 쓰는 것이었다. 결국 억누르고 있던 명하의 감정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그걸 말이라고 해! 이 개같은 놈들!”
명하는 확신했다. 그들이 무언가를 감추려 했다는 것을. 그녀는 열을 식히려 찻잔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자신을 대신해서 화를 내주는 명하를 보며 선정은 큰 위안을 얻었다. 그런 큰 일들을 겪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의지할 데가 없다는 것이었다. 변호사를 제외하면 잠깐이라도 그녀가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그렇게 홀로 견뎌내기란 쉬운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갓난 아이와 함께 삶을 포기하려 했던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에 와서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람을 따로 만나서 얘기하고 싶었는데 항상 문전박대였어. 법정에서 마주쳐도 너무 매몰차게 대하더라.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그 후로 다시 볼 일이 없을 줄 알았지. 그런데 보름 전, 거짓말처럼 눈 앞에 나타났더라. 우리가 있던 호텔 시위 현장에 말이야. 대한노총 서울지부장이란 명함을 달고서.”
명하는 뒤통수를 쎄게 맞은 듯 했다. 선정이 역정을 내며 시위 현장을 떠났던 진짜 이유가 이것이었다. 그녀는 선정이 말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을 코 앞에서 마주한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가끔씩 연단에 올라 회사측의 부조리를 설파하고 강하게 맞서 싸울 것을 종용하던 사람이었다.
지리한 집회가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한 남자가 대동한 사람들로 시위대는 순식간에 두 배로 불어났다. 그에 맞선 경찰들의 수와 장비도 확연하게 달라졌다. 한 무리의 선동으로 시위는 걷잡을 수 없는 폭력사태로 변질되었다. 더시티호텔의 해고노동자들도 부지불식간에 휩쓸려버렸다. 선정은 아연실색하여 현장을 떠났지만 명하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 목소리를 높여 싸웠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을 무렵 명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시위현장이 노동자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자신들의 잇속만 차리려는 한낱 저질의 싸움판이라는 것을. 그렇게 삼일 전 명하 역시 시위를 그만두게 된 것이었다.
명하는 쩌렁쩌렁한 남자의 목소리와 얼굴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임희창. 그 이름까지 기억났다. 그가 8년 전의 어느 날 단구 아빠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세상속에 비일비재한 우연일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서늘함이 그녀의 뒷목을 스치었다.
선정이 말했다.
“아무튼 그들의 진술이 바뀐 시점부터 회사의 사장도, 동료들도, 경찰마저도 오빠를 정신병자로 몰아갔어. 내가 아무리 오빠를 변호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어. 정신분열 판정과 입원 경력으로 사람을 순식간에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더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검에서 알콜이 다량 검출됐어. 그건 나도 어떻게 설명을 할 방법이 없었어. 결론은 정신병 환자가 술 먹고 난동을 부리다 자살한 사건이었지.”
선정의 감정은 다시 요동치고 있었다. 남편을 위해, 자식을 위해, 홀로 맞서야 했던 시간들은 그녀의 가슴깊이 생채기만 남겨 놓았다. 파릇한 소녀시절에 꿈꾸던 미래와 애딸린 미망인의 현실은 봄과 겨울의 차이도, 하늘과 땅의 차이도 아니었다.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그것은 나무와 종이의 차이였다. 숲을 이루길 원했던 나무는 잘리고 또 잘려나가 형태도 알아볼 수 없게 변해버렸고 이제 다시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내가 했던 모든 일들이 내 발목을 잡은거야.”
통한의 눈물방울을 떨구며 선정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명하는 그 어떤 위로도 건넬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지켜봐 주는 것이 자신이 할 일임을 알고 있었다.
“죽고 싶었어. 정말 죽을까도 많이 고민했고. 근데 단구 때문에, 단구가 매일 날 보며 환하게 웃어줘서, 살 방법을 찾아야 했어. 돈은 다 써버리고 월세도 밀려서 쫓겨날 판이었어. 너무 막막하기만 했어. 거기다 단구마저 발달장애 판정을 받았고, 정말 왜 세상이 이렇게 날 미워하는 건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싶더라. 그렇게 겨우겨우 버티다 마지막 용기를 내서 호텔을 찾아간거야.”
그렇게 선정의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사연없는 인생이 없다지만 선정의 인생은 마치 한 편의 소설 같았다. 나무와 소년의 이야기 말이다.
바람에 나부껴 거친 황무지에 쳐박힌 씨앗은 누구의 관심도 받을 수 없었다. 그래도 꿋꿋이 뿌리를 내리고 차가운 태양과 뜨거운 빗물을 훔쳐 싹을 틔우고야 말았다. 인고의 세월을 버티며 어엿한 나무로 자라나자 작은 아이가 찾아와 이름을 붙여주고 정성껏 돌봐주었다. 나무는 쑥쑥 자라났고 마침내 꽃망울을 터트렸다. 사나운 봄이 되어 개화(開花)에 들어섰을 때 무심한 벼락이 가지를 꺾었다. 떨어진 가지는 한독(寒毒)이 되어 토양을 물들였고 나무는 말라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오염된 대지를 작은 손으로 갈아엎었다. 또 다시 나무는 자라나고 매마른 가지에 아담한 꽃망울이 맺혀갔다. 화려한 꽃이 피어나고 아이는 미소지었다. 한독이 온몸에 퍼진 아이는 생명을 다해 스러졌다. 나무는 성장을 멈추고 아이를 품었다. 하늘의 겨울과 땅의 여름날, 아이의 혼은 대기를 물들였고 육신는 땅으로 스미었다. 그리고 지금, 아이의 썩은 육신은 거름이 되어 다시금 나무를 꿈틀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선정의 삶이 아무리 짓밟히고 거칠게 잘려나가도 그녀가 나무의 꿈을 꾸는 한 그녀는 나무였다. 이 나무의 이야기는 듣는 이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명하는 선정이 견뎌온 세월이 언젠가 그녀에게 값진 보상을 할 것이라 믿었다. 물론 당장에 들이닥친 시련의 파고를 넘어야 하겠지만. 명하는 조용히 선정의 손을 잡았다.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는 말은 서로가 굳이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껏 참고 참았던 명하의 두 눈마저도 붉게 물들어갔다. 훌쩍이는 콧소리와 깊은 한숨소리만이 나직이 울려퍼지는 탄식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