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빗속을 걷고야 비로소
목사님 딸, 선교사님 딸, 그리고 첫째.
이 모든 이름은
내가 바른생활소녀로 살아가기엔 충분했다.
언제나 모범이 되어야 했고,
하루 종일 교회에 살다시피 하며 섬기고,
모든 기도회와 예배에 성실히 참석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디서든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게 나의 기본값이었다.
고3 때는 엄마 따라 기도회를 다녔고,
아침저녁마다 성경을 읽으며
내가 보기에도 영적으로 맑고 충만했던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지낸 시간들이 나를 만들어줬지만,
어느 날 문득 그 모든 것들이
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우산 아래에 있던 내가 처음으로
그 우산을 벗어나 빗속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내 우산은 비를 피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분명 하나님을 사랑했다.
정말 뜨겁게 사랑했고,
어린 시절의 나는 누구보다 순수하게 예배를 사모했다.
수련회에서 눈물로 기도했고,
선교대회에서는 친구들과 노는 시간보다
말씀 듣는 시간이 더 좋았다.
예배를 이토록 사랑하는 아이도 있을까 싶을 만큼,
그 시절 나는 진짜였다.
그런데 20살이 된 어느 날,
그 ‘진짜’ 같았던 내가 너무 가식처럼 느껴졌다.
예수님을 만났다고 믿었고,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는데
자꾸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모태신앙이라… 해볼 거 다 못 해봤어.
그게 좀… 아쉽다.”
잘못된 생각이지만
죄짓고 돌아온 사람이 더 복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들의 이야기는 진짜 살아 있는 간증처럼 들렸다.
나도 그런 탕자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첫째 아들이던 내가, 일부러 탕자가 되려 했던 거다.
물론 내가 선택한 방황은
늦잠 자서 예배 늦게 가기,
수요예배 빠지기,
새벽기도 안 나가기 같은
아주 소심한 반항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작은 틈으로
내 마음은 조용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예배가 점점 지루해졌고,
죄는 점점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왜 안 돼? 그게 더 솔직한 건데.’
그런 생각들이 마음에 스며들며,
기도보다 침묵이 편했고,
말씀보다 현실이 더 진짜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내게 찾아온 방황이었다.
눈에 띄는 일탈도, 큰 사건도 없었지만
내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이 조용히 밀려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와 돌아보면,
그 바른생활소녀로 살아가던 시간 자체가
이미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옳게’ 살아야 한다고 믿었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속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살면 안 되지.”
“기도를 안 해서 그래.”
그런 말들은 내 안에서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더 무서운 건,
그렇게 말하던 내 모습이
‘나 정도면 잘 살고 있다’는 마음으로 덧칠돼 있었다는 거다.
나는 안 그런 척했지만,
속으로는 내가 더 잘 믿고 있고,
내가 더 바르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분명히 있었다.
그 경건한 모습조차
사실은 ‘내가 옳다’는 확신을 증명하려는 교만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바로 그런 내가 진짜 죄인이라는 걸.
그러던 어느 순간,
그 시선이 나 자신을 향했다.
그제야 보였다.
내가 쌓아 올린 ‘경건’이라는 집이,
실은 교만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것.
나는 죄인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서도,
정작 내 안에 있는 죄를 보지 못했다.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죄인인 줄 모른다는 것,
그게 바로 죄인의 모습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알고 싶었는데,
그 틀 안에 있는 한,
절대 그분을 제대로 만날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무너지고 싶었다.
내가 쌓아 올린 경건함,
그 안에 숨겨진 교만함,
그 모든 걸 무너뜨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스스로 방황을 택한 건
처음으로 진짜를 만나기 위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땐 몰랐다.
이 작은 반항이 내 마음을 어디까지 데려갈지.
그리고 그 끝에서
하나님이 날 어떻게 다시 불러내실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