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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섭 Oct 07. 2022

무해한 삶

중년 백수의 생 바라보기 1

인간의 세상사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때론 무해하기도, 유해하기도 하다. 스스로가 학처럼 무해한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겪는 누군가는 '난 피해자입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남이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나 행동이 나에게 ‘위해(危害)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무해하기가 어렵다.


세상의 현자들은 이런 무해한 삶을 두 가지로 이야기한다. 하나는 인간은 무해한 존재이기에 그 근본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은 유해한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무해를 위해 정진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삶이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간의 삶은 수만 가지의 에피소드에서 파생된 변주와 같다. 그런 변주 속에서 다양한 변수가 발생하고 그 변수에 종속되는 것이 삶을 구성한다. 그러기에 삶에는 나의 무해한 행동이나 의지가 때론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무더운 여름날, 갑자기 짬뽕이 먹고 싶어 동네의 유명한 체인점에 간 적이 있다. 서늘한 실내에 가게 안에는 온통 불 맛이 진동하고 있었고,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입맛을 다시며 짬뽕을 주문했다. 그리곤 벽에 붙은 신 메뉴의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쳐다보다가 문득 그 사진 밑에 낯선 한 남자가 내가 먹고 싶어 했던 짬뽕을 열심히 먹고 있었고, 그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돌연 무뚝뚝한 목소리로 "절 왜 그렇게 계속 보세요? 절 아세요?"라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난 순간 당황했다. 그를 본 것이 아니라, 그의 머리 위에 붙은 사진을 보았을 뿐인데 말이다. 나는 죽지 않기 위해 얼굴에 억지 미소를 날리며, "죄송합니다. 선생님 위의 신 메뉴 사진을 보고 있었습니다."라고 얼버무렸다. 


이처럼 삶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유해한 행동으로 다가오며, 순수 무해한 삶은 존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끊임없이 선한 삶을 강조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곧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행동 방향이나 역동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일 뿐이다. 


다른 한편으론 우리가 꿈꾸는 무해한 삶은 위험할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은 얼음판에서 마찰이 없으면 우린 그저 한없이 미끄러워 질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무해한 삶만이 존재한다면 우린 삶에서 허둥대는 존재일 뿐이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성찰의 시간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해한 삶보다는 남에게 적당히 영향력을 끼치는 삶이 더 건강한 삶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잔소리가 그에 해당할 것이다. 잔소리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하며 끊임없이 제삼자를 채찍질한다.


우리가 하는 선의의 행동이 때론 오해를 받아 악의로 변할 수 있기에 어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무해한 행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자의 무위(無爲)하는 삶이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하다. 심지어 아무것도 안 해도 우린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집에서 방에 처박혀 밥도 거른 채 잠을 자거나, 게임 또는 책만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행동은 어디까지나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다. 그러나 그런 일련의 행동들을 했을 때, 주위의 반응은 어떠한 가. 식구들은 제발 방에서 나와 밥을 먹으라고 윽박지를 것이며, 게임만 하지 말고 공부 좀 하라고 할 것이며, 또는 책은 눈에 안 좋으니 적당히 보라고 말할 것이다. 이처럼 내가 아무리 무위 또는 무해한 삶을 살아도, 내 주위에서 나를 무위 하는 존재나 무해한 삶을 사는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더 불안해한다. 그리고 무언인가 하라고 강요한다.


우린 무해를 꿈꾸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우리가 꿈꾸는 무위의 삶은 질타받기 쉽다. 우리가 숨만 쉬어도 우린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며 살아간다. 


무해한 삶을 살 수 없다면, 유해하진 않지만 좋은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런 최선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 수양이 필요하고, 그 수양을 완성하기 위해선 우린 끝없이 사고하여야 한다. 사고하지 않는 삶이 오히려 유해한 삶을 살게 할 것이다. 그런 공포심을 가져야 우린 한 단계 성숙해질 것이다.


우리 모두가 무해한 삶은 없지만 사유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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