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논픽션스토리_여름길

Tha road of jaiha

프롤로그


말하는 것에 자신감 없는 꼬마아이 자이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싫어했다. 혹시라도 누가 말을 걸어올까 봐 불안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이는 말을 하면 더듬거리기 때문이다. 어쩌다 가게에 가면 한참을 말을 못 하고 나올 때도 있었다. 가뜩이나 부끄럼 많이 타고 내성적인데 말까지 더듬거려서 더 내성적이 되어 버렸다. 자이에게 생각한다는 것은 나아지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말 더듬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어서 어쩔 수 없이 철학자가 되곤 한다. 사실 자이는 밖에서 뛰놀고 싶은 욕망이 더 많다. 자이는 방에서 뒹구는 것보다 들, 밖에서 야생처럼 뛰어놀며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방랑자 같은 자유인처럼은 아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많이 얘기하고 싶어 한다. 이 꼬마아이의 여정은 어떻게 펼쳐질까요?..

 


골목청소부아이의 하루시작


자이의 이야기는 국민학교에서 시작된다. 자이는 제천에서 태어나 골목길을 청소하는 아이로 아침을 맞으며 아버지의 후한 칭찬에 골목길 청소하는 게 신이 난 부지런한 아이였다. 그러던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엄마 손을 잡고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제천 남천국민학교에 1회 입학생이 된다. 그곳에서 아침마다 자이야 학교 가자라고 불러주던 여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선생님의 손을 잡고 가는 학교 등굣길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던지 어떤 날은 아침밥을 다 먹기도 전에 선생님 목소리가 들리면 성급히 책가방을 메고 뛰쳐나가기도 했다. 아마도 자이는 엄마 아버지 외에 다른 사람을 좋아했었던 첫 번째 사람인 것 같다.. 그렇게 1학년이 끝나는 시점에서 아버지의 직장이 옮겨지는 생활에서 첫 번째 좋아했던 선생님은 만날 수 없었고 강원도 함백국민학교 2학년으로 전학 가고 자이의 두 번째 낯선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3학년 때 가장 부끄럽고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 하지만 첫 번째 선생님처럼 가장 기억에서 잊히지 않은 선생님과의 일, 사건이 있었던 3학년의 시절이었다.


2회

잊을 수 없는 선생님


자이는 극 내성적인 성격에 심하지 않았지만 말더듬까지 있어서 말하거나 발표하고 나서질 못하는 아이여서 언젠가 엄마 심부름으로 가게에 가게 되었는데 사 올 것을 적은 종이를 보며 몇 번이고 외우며 가게로 들어갔다. 동네가게이어서 가게 아줌마도 자이를 잘 알아서 내 이름을 부르며 뭘 줄까 물었는데 자이는 한참을 서있다가 아줌마 얼굴을 보며 갑자기 큰소리 이 거주세요 소리쳤다. 아줌마가 깜짝 놀라며 웃으며 물건을 준 적이 있었다. 이런 자이가 3학년 공부시간에 배가 아파오며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공부시간 도중에 손들고 선생님께 말할 수 없어서 쉬는 시간까지 참으려다 그만 바지에 실수를 저질러버렸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어떤 아이가 내가 있는 쪽을 가리키며 여기서 똥냄새나요 선생님 하는 말에 선생님은 조금 일찍 공부시간을 마치고 다음 공부시간이 체육시간이 아닌데도 공부시간을 바꾸어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난 당번이라고 정해주시곤 남게 하셨다.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나간 후 선생님은 양동이에 물을 받아오셔서 실수한 내 다리를 씻겨주시고 바지까지 빨아서 입혀주시곤 나를 일찍 귀가시켜 주셨다. 어린 나이인데도 나를 씻겨주시던 선생님의 이마에    흘러내린 땀방울 보았다.(부끄럽기도 미안하기도 한 묘한 감정이었다..) 자이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1학년 이옥희 선생님 나의 실수에 나의 부끄러움을 감춰주셨던 3학년 구제명 선생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두 분 선생님의 얼굴과 이름은 잊을 수가 없다. 아니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4학년쯤 되었을까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직장 상사의 집에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를 좋아했었다. (물론 혼자만의 마음속에 품은 여자아이이었지만..)


3회

자이 서울살이를 시작하다


자이는 그렇게 고향인 제천을 시작으로 강원도, 충청남도를 거쳐 서울살이가 시작된다. 이 시기에 아버지가 정년퇴직을 하시고 서울의 망우동 마당이 있는 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시골아이의 서울생활은 모든 게 낯설고 말도 잘못하는 자이에게는 정이라고는 붙일 수 없었다. 서울의 국민학교 교실을 들어가지도 못한 채 주위를 맴돌다 학교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집에 오곤 했다.(나중에  학교에서 연락하여 엄마손에 이끌려 1년의 국민학교 생활을 끝나긴 했지만..) 이 무렵 아버지는 슬라브로 된 지붕과 마당이 있고 가게가 딸린 집을 지으시고 쌀 직매장을 하셨다. 이곳에 자이의 유일한 공간인 다락방이 있었다. 그렇게 국민학교 생활이 끝나고 자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래도 중학생이 된 자이는 나름대로 적응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말을 더듬고 부끄럼 많고 발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소년이었다.


4회

집으로 가는 길


중학생이 된 자이는 학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교실에선 몇몆 친구와 얘기도 하고 그랬지만 운동장을 지나 정문을 나오는 순간엔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당시에 친구들은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바로 간 친구들이 없는 것 같았다. 운동장에서 놀다간 친구, 분식집 들른 친구, 탁구장 들른 친구, 만화가게 들른 친구 등 모두들 중학교 생활을 그렇게 보낸 것 같은데 자이는 학교와 집이 전부였고 집에 돌아오면 가게 문 닫고 저녁에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아버지에게 역사이야기를 듣다가  다락방으로 올라가곤 했다. 다락방으로 올라간 자이는 이곳에서 숙제를 하며 이곳에서 혼자만의 시간, 혼자만의 세계로 들어갔다.


5회

자이의 다락방


자이가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바로 오는 것은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고 기다리는 엄마 그리고 다락방 때문이었다. 기와지붕이 아닌 슬래브 지붕으로 된 다락방은 겨울엔 춥고 여름엔 찜통처럼 더운 곳이지만  이곳에서 자이의 말 더듬도 고쳐진 곳이었다. 엄마가 매월 사서 보는 여성 잡지의 좋아하는 여배우의 사진을 오려 그 좁은 다락방 벽에 붙여놓고 셰익스피어 4대 비극 문고판을 소리 내어 읽으며 나 혼자만의 모노연극을 하며 책을 완독 한 곳이다. 그렇게 소리 내어 읽고 연기한 독서법이 심하지 않은 말더듬이 개선되는 효과를 보며 이때부터 연극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읽는 것도 나만 들을 수 있는 낭독에 눈으로 읽어가는 것보다 훨씬 덜 지루하지 않아 완독 하는데도 부담이 없었다. 그러다 엎드리어 조그만 창문 열어 마당을 내려다보다 잠깐 잠들기도 하다 아래 방에서 밥 먹으라는 엄마 소리에 고개 숙여 내려올 수 있는 세 개의 계단으로 내려와 가게에 계신 아버지한테 가서 엄마의 밥상 소식을 전하고 들어온다. 이렇게 이곳은 자이의 연극무대방이었고 연예인을 사모하며 설레었던 방이었고 동시에 나를 위로하며 치료해 주었던 내게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었던 방이었다. 이곳은 자이의 아지트 비밀의 공간이 아니라 자이의 유일한 친구이고 연인이기도 한 곳이다.


6회

아버지의 죽음


1978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몇 개월 뒤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이듬해 1979년 6월 아버지의 죽음을 느껴야 했다. 사회생활 첫 발을 내디뎌 직장인이긴 하여도 자이는 아직 청소년이라는 냄새도 사라지기 전에 사회인이 되었고 낯선 직장생활이 적응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것이라 이 죽음이라는 이별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니 받아들인다기보다는 아버지의 모습이 관속에 있는 것을 보고도 아버지의 모습이 옆에 없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믿기지도 않고 실감할 수 없었다.(관속에 계신 아버지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청소년에서 스무 살 청년 사회인 초년생인 자이에게 바보 같다고 말해도 할 수 없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자이는 아버지. 엄마, 내 곁에 있는 부모가 죽는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마치 평생 같이 있을 사람처럼..) 더욱이 이때는 아버지가 이름도 생소한 아니 아직 병명조차 없었던 초기 암을 진단받으시고 여덟 번의 수술과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과정을 겪고 있는 중이었고 엄마와 함께 모든 걸 지켜보았는데도 아버지가 죽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이런 실감이 2000년 하고도 24년이 된 지금도 엄마가 병구환 하던 생활 아버지의 참는 모습과 쓰러지시고 다시 눈뜨시지 못한 순간, 관속에 누우신 모습, 관뚜껑이 닫힌 광경들이 내 머리가 비디오테이프인 것처럼 그 화면이 사라지질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이는 죽음에 대해 초연해졌다. 엄마는 내가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면 아버지는 유일하게 의지할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그러던 사람이 이제 없다는 것에 엄청난 충격이었는데 자이는 이 충격을 고스란히 자이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으로(누구도 알지 못하고 볼 수 없는 곳에) 스며들었다. 이 스며듦이 자이에겐 어떤 죽음의 상황에도 초연해질 수 마음으로 바뀌어 버렸다. 심지어는 자이 자신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에도 두렵지도 않고 미련도 없는 마음이 되어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는 사건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이, 아버지의 죽음으로..


7회

소년에서 청년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자이는 첫 직장을 몇 개월 더 다니다가 밀린 월급 때문에 사직서를 내고는 다시금 국가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 취업신청서 제출하여 재 요청을 기다리며 무직의 생활을 해야만 했다. 아버지의 공적으로 엄마가 연금을 받기는 하였지만   이것으로 생활하기엔 택도 없이 부족하여 누나들이 보탬이 되기도 했지만 그렇게 만족할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여러모로.. )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이가 막내였기에 교육비 지출이 없는 것이 엄마의 고민을 덜어 주었다고나 할까.. , 자이는 국가로터 취업명령서의 통보가 올 때까지는 집에만 있으면 되니까 외출하지 않으면 돈 쓸 일은 없었다. 그렇게 청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서 경험한 것이 백수의 일상이었고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이때 아버지의 빈자리가 엄마에게 크다는 것도 막내인 자이만 느낄 수 있었던 시기였다. 엄마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자이는 백수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엄마나 막내인 자이나 너무도 완벽한 남편이고 아버지이어서 그 빈자리는 더 크게 와닿았고 그리고 사실 남편과 아버지 외에는 또 의지할 대상이 없었던 것도 모자의 생활에 있어서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힘들고 위로받지 못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에 기다리던 자이의 취업명령서가 국가로부터 통보받아 두 번째 직장에 들어간다. 두 번째 직장은 영업부로 세일즈맨이었다. 극 내성적인 자이에겐 청년이 되었지만 할 수 없는 직종의 부서였지만 마다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어서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직장에 입사했다. 그리고..


8회

자이의 군 입대


자이는 예상과는 달리 초반에 약간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세일즈의 일을 나름대로 실적도 쌓으며 즐겁게 일을 해나갔다. 그렇게 기반이 잡혀나가려고 할 때에 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 통지서가 날아왔다. 당시 군 입대는 훈련이라기보다는 선임이 신참을 괴롭히는 분위기이어서 아무리 병역이 의무라고는 하지만 반기는 입장은 아니었다. 특히 엄마는 막내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것에 걱정이 많으셨다.(겉으로 내색은 안 내셨지만)  그 당시 신체검사에 따라 1.2등급이 현역이고 3등급이 보충역으로 방위라고도 불리며 4등급 이하가 면제 대상이었다. 당시의 내 신체라면 당연히 현역으로 입영대상이었다. 신체검사날이 오기까지는 영업인 세일즈는 계속하였다. 그리고 신체검사 당일! 신체검사와 적성검사를 마친 후 신체검사표에 신체검사 등급 표시가 붉은색으로 찍혀있었다. "1 을종"이라고 현역 입영대상이다. 마지막 징병관으로부터 판정만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징병관 앞에 섰다. 그런데 징병관이 내 이름을 부르고 확인한 후 내 얼굴을 한참을 보더니 "방위소집대상" 하며 3급이라는 도장을 신체검사표에 쾅 소리와 함께 찍어주었다. 신체등급 1 을종이면 분명 현역 입영대상일 수밖에 없는데 의아심과 함께 내심 그나마 다행이라는 마음을 갖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한테 결과를 얘기하였다. 엄마는 한숨을 내쉬시며 반가워하시는 얼굴을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현역은 2년 반 부대에 들어가서 복무를 마쳐야 하지만 방위 보충역은 집에서 출. 퇴근하며 1년간의 복무를 마치면 되기 때문이다. 엄마에게는 무엇보다도 매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안심하며 한시름 놓으셨다는 표정이셨다. 그렇게 군 입대를 위해 세일즈의 일을 마무리해 가면서 1980년 12월 군복무의 사유로 사직서가 아닌 휴직계를 제출하고선 또다시 직장생활의 공백기간으로 들어갔다.


9회

예비군 군복 입은 사회인 자이


1981년 그렇게 징집 소집되어 수도권  모 부대에서 4주간 출. 퇴근으로 훈련을 마치고 마지막에 근무할 곳을 배치해 준다. 3급 대상자 방위는 어쨌든 출. 퇴근이지만 부대 내인지 부대밖인지 결정되는데 나는 부대밖 중대본부로 배치받았다. 그리곤 먼저 배치받았던 선임이 데리러 올 때까지 대기 중이었는데 서너 명의 선임들이 데리고 갈 신병을 호명했다. 나는 꽤 공부했을 것 같은 선임을 따라 야산 같은 산길을 걷다 보니 시골 같은 동네가 나오더니 2층으로 된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갔다. 직사각형 나무로 된 나무 현판에 방위동중대본 부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곤 선임은 다시 1층으로 내려갔는데 알고 보니 동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선임이었다. 모든 것이 다 생소하고 처음 알게 된 일이었다. 군입대도 중간 등급에 방위라는 보충역이 있다는 것, 단색의 군복이 아닌 예비군복과 군화를 직접 사야 된다는 것, 중대본부나 동사무소에 보충역 군행정병이 근무한다는 것, 중대본부에는 전역한 장교가 3개 중대로  나뉘어 세 사람의 중대장이 있다는 것, 또 중대본부라는 곳이 예비군 행정업무를 하는 곳으로 예비군의 소집과 훈련을 관리한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일이었다. 참 세상에는 모르는 일, 직업투성이다. 그러던 2.3개월이 되었을쯤 중대본부에는 나의 후임인 신병 졸병이 들어와 나는 졸병의 딱지를 떼고 동사무소 선임이 전체 선임이 있었지만 동원중대의 선임으로 몇 해 안 되어 중대본부에서 최고참이 되어 남은 보충역 군 생활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이 나온 것 같다. 군대라는 곳에 이 새로운 환경이 내겐 색다른 경험이었고 몇 명 안 되는 후임이긴 하여도 아랫사람을 다루는 노우하우와 그리고 군대를 먼저 다녀온 형들과 아저씨들과의 예비군 훈련장에서의 얘기할 수 있는 담소의 시간도 필요했던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 그렇게 예비군 명부를 작성하며 훈련통지서를 전달하면서 동네 주민들을 만나고 동네 나무아래서  동네 구멍가게에서 쉬기도 하며 때로는 다방에서 차 한잔 시켜놓고 동전게임도 하다가 중대본부로 복귀하고 석식점호를 동사무소 옥상에서 마친 후 퇴근하였다. 이러한 생활을 반복하는 가운데 군 방위행정병의 기간이 1981년 3월에 시작하여 1982년 5월, 14개월의 사회인 군생활의 종지부를 찍는다.


10회

기록할 수 없는 이야기 그러나 1.. ~


14개월의 군생활을 마치고 직장으로 복직하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사과에 복직원을 제출하고 부서 배치의 인사발령 명령서만 통보하면  되었으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다시 영업부서로 복직되는 줄 알았다. 휴직계를 내기 몇 달 전부터 실적을 쌓을 수 있는 거래처 사장님들과 거래라인 명부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사과장님으로부터 면담이 들어왔다. 복직명령서를 할 건데 자이는 영업부보다는 내근직이 나을 거라는 말을 하고선 내 의견을 물었다. 자이는 내근직으로 복직된다고 해서 그렇게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답변하고 며칠 후 부서 배치가 정해졌다. 박자가 라는 이름이 적힌 공장관리부 관리과 근무를 명함이라는 배치명령서를 받았다. 이날이 1982년 6월이 가기 전으로 기억하고 있다. 자이는 그 명령서를 들고 본사 건물 옆에 위치한 공장 정문으로 들어가 단층으로 된 사무실로 명령서를 앞 책상에 앉아있는 여직원에게 보여주니 뒤에 앉은 간부처럼 보이는 상사에게 전달한 후 잠시 나를 오라는  손짓을 하고선 조금 더 높아 보이는 분께로 인사시키고서는 처음 보았던 여직원 책상옆이 내 책상이라고 알려주곤 앉아 있으라고 하였다. 그렇게 복직하여 새 부서로 배치된 첫날은 지나갔다.


11회

기록할 수 없는 이야기 그러나 2.. ~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간에서의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나 자이는 극 내성적인 성격이 아니던가! 그런 시간이 꽤 경력이 있어 보이는 주임님으로부터 내가 할 업무에 대해서 배우고 인계받을 건 인계받으며 점차 익숙해져 갔다. 내가 맡은 업무는 공장에서 사용되는 물품들을 하자가 있는지 없는지를 검수하는 일이었다. 처음엔 생소했지만 이 일에 익숙질수밖에 없었다. 1차적으로 본사 자재부에서 공장에 납품할 업체와 계약을 하고 제품을 1차 확인한 후 내가 2차로 검수하는 것이어서 하자가 있거나 불량한 제품은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청업체가 꼼수를 부릴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납품하는 거래처가 끊기는 상황이고 그것도 중기업의 거래처는 보증수표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내가 복직한 회사는) 그래서 업무가 익숙해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고 말단 직원인 내게 공장관리부라는 곳은 가족 같은 곳이었고 직장의 동료나 상사를 떠나서 모두 가족처럼 그렇게 일을 했다. 본사의 건물과 떨어져 있어서 그런 같기도 했다. 공장관리부에는 관리과와 노무과 단 2개의 부서만 있어서 직원도 몇 명 안 되었기 때문이다. 노무과는 생산직 사원들의 인사과이고 관리과는 본사의 총무부와도 같은 곳이다. 오히려 내근직 동료들보다 생산직 사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는데 이런 만남이 자이에게는 더불어 살아가는 의미를 일깨워주었다. 노무과에 누나뻘로 보이는 여직원, 나보다는 한두 살 어린 걸로 보이는 나와 처음 마주쳤던 여직원, 돌아가신 아버지처럼 대해주셨던 부장님, 업무를 빨리 익힐 수 있도록 가르쳐주신 선배이자 형 같은 주임님, 야구광이신 과장님, 그리고 영업부 입사했을 때 입사동기였던 동료, 이곳이 복직한 내가 일하는 곳이었다. 특히 한두 살 어린 여직원은 시간이 지날수록 장난도 많이 치면서 근무했다. 사랑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은근히 좋아했었던 것 같다. 내가 이 직장을 갑작스럽게 그만두게 되는 일이 없었다면 좋아했던 감정이 더 좋아졌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생각도 많고 기억할 것도 많은 곳이었는데 무어라고 기록으로 남길 수가 없다, 기록으로


그러나 영업부서 때 보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부서이다, 이곳 공장관리부 관리과..


12회

회상


(첫 직장은 월급이 나오질 않아서 그만두었지만 두 번째 직장은 그만둘 이유도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사직서를 내버렸다. 그리고 그만두어야 할 이유가 내가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고 회사를 3일 무단결근하고서는 인사과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공장관리부 사무실로 향했다. 그때 자이는 사직서를 내러 가는 발걸음도 공장관리부 식구들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도 무거운 마음 미안한 마음 다시 실직되어 백수의 생활을 엄마와 둘이 해야 한다는 마음 등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기억나는 건 회식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술이 덜 깬 내가 거리에서 어떤 여성과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자이는 파출소 유치장에 있었는데 다행히 쌍방의 가족이 와서 발생된 문제의 오해가 풀려서 다음날인가 다다음날 아침에 나올 수 있었다.  이것이 회사에 출근할 수 없는, 무단결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같아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출근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파출소 유치장에서 있었다는 것이 범죄자 같은 마음이 들어서 직장의 사람들 얼굴보기가 부끄러워 서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유독 마음속에 좋아했었던 여직원이 생각 속에서 떠나질 않았고 그냥 미안한 마음도 들어서 더 근무할 수 없었다. 사직서를 내고 공장관리부 식구들과의 송별식의 밤도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송별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왜 그렇게 집으로 들어가기 싫었던지.. ,) 이후 참으로   긴 백수의 생활이 이어졌는데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continue ~

자이의 이후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질까요?..


13회는 2024년 12월 이후 자이의 여름길은 작가의 연재 북스토리에서 다시 이어집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