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두리라고도 하며 규범, 규칙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법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울타리라고도 불리 울 수 있으며 형식, 일정한 나열배열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틀에서 벗어나있으면 마치 안 되는 것처럼 여기기도 하며 조언을 하거나 심지어는 비난의 말을 쏟아내기도 한다. 정해진 틀에서 있어야만 정도이고 벗어나면 외도라는 인식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요? 틀에서 벗어나면 잘못된 것일까요? 그리고 틀에서 어긋난 것은 생각해 볼 것도 없는 가치이고 이러한 가치의 틀만이 모든 대상물의 평가 기준이 되어 순위를 매기고 베스트와 워스트를 가리는것이 꼭옳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희망토크/심리작가.박재하
ㅇ. 글의 틀
눈으로 보고 읽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글의 틀은 시, 산문, 수필, 소설이라는 장르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장르로 글을 쓰기 위하여 기초에서 테크닉까지 글쓰기의 틀을 배우며 익힌다. 글의 고향인 머릿속 생각을 시각화하기 위해 글틀의 규칙을 준수해 가며 글틀을 고집하기도 한다. 이 고집은 우매할 정도로 준수하게 지키면서 이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거나 벗어난 글을 접하면 어떤 장르의 글도 조언이라는 미사여구로 비평하지만 사실은 그 비평은 조언이라기보다는 기존 틀에 벗어난 비난에 가까운 혹평에 가깝다. 원래의 틀에서 벗어나있다 하여 글이 아닐까? 틀에서 벗어나 글 쓰는 습관이 되었다고 해서 글쓰기의 테크닉이 업그레이드가 안 되는 것일까요? 더욱이 이 틀에서 벗어난 작품들은 베스트는 아니어도 좋은 글 아니면 그냥 글이라고도 할 수 없는 걸까요? 틀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워스트라고 할 수 없고 좋은 글이라고 보고 읽고 들어주지 않아도 글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틀에서 벗어나 쓰이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라고 조언이 아닌 조언으로 포장하는 멘토나 충언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글의 고향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보이지 않는 생각을 보이도록 시각화작업을 한 사람이 글쓴이이고 작가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시각화하여 내놓은 글들은 틀에서 벗어났다고 하여 홀대받는다는 것은 글을 대하는 올바른 행동이 아닙니다. (작가가 자신의 글을 심심해서 심심풀이 땅콩 먹듯이 장난처럼 써놓은 글의 기록이 아니라면..) 어쩌면 기초를 토대로 한 틀에서의 이탈은 창작의 아이디어가 마르지 않는 샘이 되지 아닐까요?!! 미처 생각하지도 않은 단어, 문장을 쓰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재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틀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틀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가족에서 독립했다고 가족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ㅇ. 시 그 틀에서 벗어나다!
사람들이 시를 쓰는데 가장 힘들다고 하는 것은 다른 장르에 비해서 형식과 운율과 문장의 길이, 단어의 선택, 행렬 맞추기, 엄격한 맞춤법, 적당한 상징적인 은유법 등 시의 심사기준은 시라는 장르를 통해 한 편의 글을 표현하는데 많은 제한과 틀을 규정해놓고 있어 시인으로 등단을 하든 등단과는 관계없이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한 줄의 시를 써놓고 시 쓰기, 시표현을 중단하기도 하며 혹 등단을 해서 시인이 되어 몇 편의 시를 멘토에게 피드백을 받을 때 시의 틀에서 벗어난 것을 보면 시라는 것을 이렇게 쓰면 늘지 않는다는 조언을 하지만 이것은 조언이 아닌 글 쓰는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잘못된 피드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시의 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을 시를 통해 표현한 사람이 틀에서 벗어나 쓰고 그리고 시의 문장에 써야 되지 않은 단어나 또 필요이상의 반복된 단어가 표현되었다고 해서 이것은 아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기본적인 시의 틀을 유지하려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 틀에 얽매이지는 마라. 당신의 생각을 표현하려는 글단어 선택을 망설이지 마라. 생각할 때 떠오르던 그 단어가 최고의 표현이고 그때 떠오르던 문장이 최고의 문장이고 가장 진솔된 문장인 것이니 운율에 얽매이지 마라, 과감히 시의 틀에서 벗어나보라. 벗어난 틀에서 자신만의 시의 틀을 완성해 보라, 그러면 그것이 또 새로운 시 쓰기의 틀이 형성이 될 것이다. 시의 틀을 벗어나는 것은 기존의 틀을 깨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식의 틀이 하나 더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만의 고유 스타일이고 브랜드이고 자신의 시가 업그레이드 되는 것이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단어는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이고 단어에 꼬리표를 다는 문장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라 생각하고 가능하면 그대로 표현하려고 해보려 한다. 오늘 당신이 일기도 수필도 아닌 한 편의 시로 문득 떠오른 생각을 시로 쓴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요? 중요한 것은 운율과 행렬을 생각하지 말고 펜으로 그대로 옮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시입니다. 설령 한 줄로 끝났다 해도 시입니다.
'한 줄의 시'라는 당신이 만들어낸 시의 틀입니다. 후일에 이것은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의 새로운 장르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시인입니다"
✒️울타리라는 틀에 대하여
울타리는 경계선일수도 있고 주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알림판일 수도 있고 관계자 외에는 출입하지 말라는 경고판일 수 있다. 그리고 틀의 기본 모형이기도 한다. 그 모형의 대표적인 울타리가 가족이라는 울타리이다. 이 울타리가 모든 틀의 기초공사를 하는데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가족이란 틀은 아무 교육을 받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정해지지 않는 듯한 규칙의 틀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 자연스러운 규칙의 틀이 만들어지는 것을 모르면서 가족의 중요성을 얘기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가정교육이 잘못되어 삐뚤어진 성격이 되어버리는 것은 교육의 틀이 없는 것 때문이 아니라 지나친 틀 규칙이나 규범 때문이 아니었을까? 틀이라는 정해진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틀에 얽매지는 말아 아야 할 것이다.
법이라는 강제성이 있는 틀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사회와 가족의 틀은 강제성이거나 과해지면 역효과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즉 과부하현상인 것이다. 지나친 틀의 과부하현상을 머리로는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가족 내에서의 틀은 부모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교육에서부터 일상의 대화까지 자녀의 생각과는 관련 없이 틀의 규범을 정해놓고 따라오도록 하는 강제성을 띠고 있다. 아마도 이 강제성 때문에 부모와 자녀의 일상의 대화가 되지 않고 의견충돌이 일어나고 있고 자연스럽게 쳐졌던 울타리의 틀도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녀에게 무엇인가를 하라고 할 때 모르겠지 라는 사고의 인식부터 바뀌어 시켜야 할 것이다. 부모가 모른다고 생각할 때 이미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틀처럼 어느 수준까지는 알고 있는 것이다. 넌 아직 모르겠지가 아니라 이 정도는 알고 있겠지 라는 사고로 가정교육의 틀과 일상 대화의 틀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가족의 틀은 강제성이 되어서는 안 되며 또 그 틀은 보이는 울타리가 형성되기 전부터 틀의 설계도는 이미 완성되었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가족의 틀은 혈연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지만 비혈연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으니 이 비혈연의 틀도 가족의 틀, 울타리라는 것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틀의 규범과 규칙을 말하고 요구할 때 상대방도 이미 알고 있다는 관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즉 "나만이 알고 있었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경계선과 틀
지구상에서 이 둘을 빼고서는 얘기할 수 없다. 이 둘은 참 묘한 관계이기도 하다. 같은 부류에 속한 것 같으면서도 그 기능의 역할은 다르다. 둘의 기능을 이해하여 매칭시키면 이상형의 현실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경계선은 어쩌면 편을 나누고 각자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재능의 분업, 에너지의 분배로 일의 효율은 높이고 각자 가지고 있는 인간의 한계를 안배할 수 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공존, 더불어라는 말이다. 경계를 한다는 것이 거리를 둔다는 의미도 있지만 지켜야 할 예의나 배려의 의미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계선 안팎에서 서로 부대끼며 공존하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틀을 세워놓고 있다. 경계선과 틀을 부정적인 눈으로만 보면 인간의 욕망, 이기심의 산물로 보이지만 긍정의 눈으로 보면 지구 위의 영역을 나누어 관리하게 되는 지구의 관리인이 되는 것이다. 경계선의 구역이 없었다면 지구라는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경계선의 이면에는 침략과 지배와 전쟁의 가슴 아픈 역사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땅과 바다의 선을 그어놓고 선의 안팎에서 틀을 세우고 지구의 질서를 지키려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직은 이 경계선이 개인이나 집단의 욕망에 흘러가고 있지만 그때마다 틀이라는 조련사가 등장하여 욕망의 흐름을 조절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 경계선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선이 그어져 있지만 그 선을 거리 두려는 선이 아니라 배려와 힘의 안배라는 틀의 법칙으로 여긴다면 관계는 멀어지지 않을 것이고 소통하는 방법, 대화하는 방법, 이해하는 방법이 깨달아져서 높아만 보였던 세대와 세대의 벽에 보이지 않던 문을 발견하여 손으로 문고리를 돌려 들어가 벽안에 감추어져 있던 방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렇듯 경계선과 틀의 매칭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경계선을 그었다고 경계대상 위험인자로 볼 필요도 없고 틀에서 벗어났다고 적대감을 가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선이 그어진 그곳에서 틀에 벗어난 '틀탈'에서 문고리 같은 해답의 열쇠가 있는 것이다. 그 열쇠를 손에 쥐는 것은 보물찾기 하듯 찾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