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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이 Nov 01. 2023

사랑이란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

네이버 웹툰에 '용사가 돌아' 왔다는 작품을 읽었다. 100화 좀 넘게 있는 작품이고 작년에 아마 읽어보긴 했는데 도입부가 너무 유치해서 끝까지 읽지 않았다. 그런데 어제 틱톡에서 광고로 나오고 어찌어찌 시간도 남아서 다시 1화부터 읽기 시작했다.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 보니 생각보다 몰입하게 되었고, 유치한 도입부를 넘어서자 점차 스토리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설명되는 캐릭터들의 과거 스토리에서 너무나도 큰 감명을 받았다. 용사란 무엇인가? 마왕은 왜 탄생하는가? 중간중간 한국사회의 비판 또한 심심치 않은 재미가 있으며 그 과정에서 각자 개성이 있는 캐릭터들이 선과 악의 기로에 서서 어떻게 반응하지는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에 대해 공감 가고 이해할 수 있는 꽤나 심도 깊은 웹툰이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스토리 중에서 가장 감명 깊은 캐릭터는 회귀, 변신 그리고 세월의 용사이다. 세 캐릭터가 가진 공통점은 자신을 희생하여 자신이 사랑한 자들에게 혹은 자신을 사랑해 준 자들의 소박한 안녕과 행복을 바라는 희생정신이다. 특히 세월에 용사는 인간이라면, 더 나아가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가장 가치 있는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자신을 사랑해 준 자들에게 받은  배 이상의 사랑을 자기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이루어 낸다.


아무래도 작가는 사랑이 어떻게 성립되는지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물고기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건 오류이다. 물고기를 사랑한다면 물고기를 물에서 낚아 올려 작은 통 안에 담고 심지어 내장을 다 걷어내고 불에 익혀 자신의 입속으로 집어넣지는 않을 것이다. 물고기를 좋아한다면 이해가 가는 행동이다. 하지만 진정 사랑한다면 자신이 바다로 뛰어들어 물고기 밥이 되어 물고기를 위해 일용한 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 또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였다.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자신을 희생하여 확멸할 미물에 불과한 우리를 위해 스스로 양분이 되셨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혹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까지도 남을 위하여 희생하고도 행복해 할 수 있는 정신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발적인 행동이다.


아무래도 사랑이란 궁극적인 감정적 행동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필자는 이성적인 행동으로도 성립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대의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 이 또한 사랑이고 나 자신이 희생되면 그 외에 같은 종족 혹은 생명, 가깝게는 가족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이성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그리고 이런 판단의 근거는 방대한 지식으로부터 비롯된다. 도덕성을 키우려면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양적의 질 좋은 지식을 많이 접하는 것이라고 필자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렇게 궁극적인 희생이 전재되는 사랑을 자발적으로 실천하려면 방대한 양적의 질 좋은 지식들이 경험되고 습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자기 목숨을 희생해야지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잔잔하게 사랑할 수도 있다. 마치 연애를 시작할 때 자신이 열심히 모아 온 금전으로 물건을 사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한다거나 혹은 자신의 시간을 써가며 손수 만들어진 선물을 주는 행위도 소소한 희생이다. 길을 가다가 떨어진 쓰레기들을 주어 쓰레기통에 넣는 행위도 자신의 시간과 노동력을 희생하는 잔잔한 사랑이다. 대가 없이 봉사활동과 기부를 하는 것 또한 사랑이다. 다만 필자가 이야기했던 사랑은 극적인 연출을 위해 극적인 상황에서 생물이라면 가장 소중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이룩하는 사랑이 더욱 거룩하고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사랑에도 급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랑이 꼭 감정적인 행동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필자의 의견을 뒷받침할 수 있는 대목이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사랑을 이해하는 기득권이 그다지 없는 거 같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말에 무게가 없이 들린다. 마왕은 왜 탄생하는가? 사랑받지 못하여서 탄생한다. 사회로부터 희생을 강요받고 아직 대의명분이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미숙한 상태일 때 희생을 강요당한 분노에 의해서 탄생하게 된다. 점차 지식을 쌓아가며 성숙해지고 과거에 있던 일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오히려 부정적인 일들을 양분 삼아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는 자들 또한 있지만 이는 깨달음을 얻기까지 방대한 시간과 교화과정에서 많은 인내심이 필요로 한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실패를 하더라도 역경을 경험하더라도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다시 도전을 해보는 용기 또한 필요하다. 이런 과정을 스스로 경험하고 실천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많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아무래도 이런 영웅들이 소수일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이런 바늘구멍 같은 기회들이 연속적으로 만남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영웅이 될 자질 또한 스스로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웅들은 평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 정반대인 마왕 또한 평범하지 않다. 일련의 불행한 사건들과 강압적인 희생으로 인해 자신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주체들을 증오하고, 오로지 미워할 수 있게 되는 상황 또한 흔치 않기 때문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마왕의 탄생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지만 용사또한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확률의 신이 굴린 주사위에 운명이 결정되어 정해진 대로 살아가야만 하는 미물이 아닐까? 결국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이 순서가 정해저 있으며 우리의 삶의 역할 또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 운명은 결국 바뀔 수 없는 것이고 우리는 이 시공간 속에서 정해진 역할을 충실이 이행하는 NPC 같은 존재가 아닐까? '군군신신부부자자'라는 말에 뜻은 사실 주제에 맞게 살아가라는 세계의 이치를 꿰뚫는 공자의 한 줄의 평가가 아닐까? '지족불여'라는 도교의 가르침 또한 자신의 한계가 정해져 있고 그것을 넘어서지 않게 그리고 부족하지 않게 행동하라는, 사실 아주 중요한 이치가 아닐까? 결국 우리는 태어난 대로 살아갈 거지만, 거기에 선악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해야만 하는 일은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에는 내 삶에 만족하여야 한다 그러니 내 마음에 평화가 온다. 그러니 사랑도 증오도 자신의 그릇에 맞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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